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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만리창에서 청백리 최만리를 떠올리며 ‘김영란법’을 생각한다

최열

만리창(萬里倉) 연지주유도(蓮池舟遊圖),종이, 55×35.5cm, 개인소장



  비가 흠뻑 내린 성밖 들판에 백성 마음 즐겁고      雨饒郊野民心樂  

햇살 밝은 도성에 기쁜 기운 새로운데                  日瑛京都喜氣新

병색 많음이야 피로가 쌓인 까닭이요                   多黃雖云由積累

 다만 위하는 건 군자의 몸 조심 뿐이라네              只爲吾君愼厥身


                                 - 세종, <꿈속에 짓다[夢中作]>『 세종실록』

        


만리창(萬里倉)은 지금 서울시 용산구 청파초등학교 뒷산 중턱에 있던 창고였다. 만리창을 설치한 기관인 군자감(軍資監)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설치한 군수품 저장 및 출납을 담당하던 군사기구였다. 군자감은 대략 30만 섬규모의 곡식을 관리하였는데도성 안의 본감(本監)과 숭례문 안쪽의 분감(分監), 그리고 도성 밖 한강 변의 강감(江監)으로 나누어 유지하다가 영조때 본감을 폐지했고 그 뒤 연이어 분감도 폐지하였지만 강감만은 계속 두었다. 강감은 지금 원효로3가 1번지 그러니까 용문동 우체국 뒤쪽 땅에 있었던 강변의 군자감으로 용산 일대의 창고를 관할했다.


이곳 용산에 창고를 설치한 까닭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용산나루는 지금에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조선 8도 전체를 다니는 조운선(漕運船)이 정박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전국의 배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므로 정부는 이곳에 수군 주둔지를 설치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뒤에도 용산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선조 29년인 1596년에 새로이 별영창(別營倉)을 설치하였고 또한1640년 대동법 실시 이후 선혜청(宣惠廳)의 별고(別庫)는 물론 그 밖에도 호서창(湖西倉), 호남창(湖南倉), 영남창(嶺南倉)을증설해 나갔다. 그러므로 용산 일대는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거대한 창고였던 셈이다.


그 가운데 만리창은 어느 창고보다도 뒤늦게 설치하였는데 새로 지었으므로 신창(新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창을 설치한지역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1445)가 살았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만리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최만리는 세종대왕이한글창제를 완성한 뒤에 한글의 불필요함과 쓸모없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한글 창제반대론의 대표자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세종의 뜻을 무척 잘 받들었던 과정을 생각하면 한글 자체보다는 한자음(漢字音) 개혁과 관련한 반대라는 견해도 있다. 세종은 반대하는 최만리에게 “내가 만일 이 문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고 되묻고 있음을 보아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최만리에 대해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당시 유학자라면 누구라도 중화주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지나친 것이다. 더구나 최만리는 청백리(淸白吏)였다. 청백리란 그저 청렴하고 결백한 관리를 칭송하는 말로만 전하는 게 아니라실제 그런 제도가 있었다. 중국의 경우 기원전 168년 한나라 때부터 청백리를 선발하여 이후 추앙받는 관리의 상징이었고 조선은개국과 더불어 청백리제도를 시행하였다.


조선시대 청백리 선발 기준은 ‘청백(淸白), 근검(勤儉), 경효(敬孝), 후덕(厚德), 인의(仁義)’로써 그 삶은 ‘나라가 정한 급여이외에 국가나 민간 어느 쪽에도 폐해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한 것을 생활철학으로 삼은 인물’이다. 선발 정원은 없지만엄격하여 최소한의 인원으로 제한했으나 조선후기에 들어 노론당 일당독재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관리기강이 문란해지고 따라서탐관오리가 흔해빠지기 시작함에 따라 청백리를 선발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다. 강효석(姜斅錫)이 1914년에지은『 전고대방(典故大方)』에 218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풍요의 시대이자 문예부흥기라고 하는 18세기인 영조시대에 9명, 정조시대에 겨우 2명일 정도로 줄어들었고 순조 때 4명을 선발한 뒤 헌종 이후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20세기 들어 식민지와 군사독재시대에야 없는 게 당연하지만,민주시대인 오늘날 청백리 제도를 시행해야 할 텐데 참으로 몇사람이나 뽑힐 수 있을까. 공직자의 청렴의무를 규정하는 이른바 김영란법에도 저처럼 혼비백산인데 말이다. 요즘 청와대는 물론모든 관료와 국회의원 따위가 풍기고 있는 부패한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견딜 수가 없다. 관료들이 세종처럼 혼신을 다해 세상에 봉사하거나 최만리처럼 청백리의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윤리감각, 도덕감각이나마 갖추면 좋겠다. 한글 창제를 완성한 해인 1446년 세종대왕은 나라와 백성에 혼신을 다하던 군자 다시 말해 청백리와 같은 참된 인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꿈속에서마저 노래하던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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