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2012, 화선지에 수묵, 95×180cm
필묵을 품고 산천단(山川壇)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레고 흥분된다. 마치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까마득한 태고 속으로 떠나는 시원의 화첩기행 같은 느낌이다. 제주시 산천단에는 여전히 곰솔 여덟 그루가 신화처럼 살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가 나무 위에 앉아 깍깍 소리 내어 울고 처진 솔가지에 바람이 스칠 때면 노송(老松)은 한 층 더 신령스럽게 느껴진다.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거대한 노송 앞에 서면 나는 한없이 작아져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다. 닮게[似] 그린다고 그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옛 기법을 충실히 따라한다고 되는 것도 아닐 것이며, 형태를 왜곡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채색을 곱게 한다고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다. 나는 얽히고설킨 곰솔 가지 아래를 걸으며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으로 가지들의 포치(布置)를 관찰하다가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중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애써 고심하던 나의 그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미완의 작품을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허공에 떠 있는 연처럼 훨훨 날리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야말로 ‘진(眞)’, 즉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화도(畵道)의 높은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나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 산천에 묵묵히 뿌리박고 서있는 소나무를 관찰하고 그려 왔다. 어쩌면 우리 소나무야말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만들어낸 비대칭, 비정형, 비상식, 비표준 그리고 겸손, 인내, 당당함 등을 두루 겸비한 진정한 목신(木神)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갈필(渴筆)을 이용하여 껍질이나 가지를 그리고 마차 바퀴 모양으로 솔잎을 그리는 옛 기법에서 탈피하는 데 꽤나 오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급기야 농묵과 초묵(焦墨)을 이용하여 서예의 한 획 개념에서 그 방법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넘어질 듯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서있는 소나무의 위태로운 자태는 나에게 더 큰 화흥(畵興)을 불러일으켰고, 솔바람은 언제나 버리고 버리며 비우고 또 비우라고 가르쳤다.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송백의 후조(後凋)를 알리라.
- 문봉선(1961-) 홍익대와 동대학원을 졸업, 중국 남경예술학원 박사졸업, 현 홍익대 동양화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