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던 해, 때맞춰 오픈한 중국국립미술관이 첫 전시 작가로 선택한 조각가가 잔왕(展望·Zhan Wang·49)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의 예술적 에너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통해 완성된다. 중국적이고, 당대적이며, 개인적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던 조각에 전통 미학을 입고, 세계적 작가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그를 베이징 아틀리에에서 만났다. 조각·설치미술·비디오 등 여러 분야에서 실험적 작품을 선보여온 조각가 잔왕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대표적 작품은 ‘가산석(假山石·가짜 바위)’ 시리즈다. 쑤저우(蘇州) 부근 타이후(太湖) 주변 구릉에서 채취하는 가무잡잡하고 구멍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인 타이후석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가짜 바위들이다.
“작가가 자연을 재창조해 만든 이 작품에 서구 컬렉터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중국 전통미학에 기반한 아름다움 때문이에요. 중국인들에게 이상적인 정신세계의 상징물로 예술의 주요 소재가 되어온 바위를 현대 문명의 전형적인 소재라 할 수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하죠.”
아트미아 갤러리 진현미 대표의 설명처럼 작가는 “가장 중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를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239도시풍경’시리즈. 39Look-New Beijing(Urban Landscape Series)’, Stainless steel kitchenware, stainless steel plates, wooden observation platform. Observation platform 2410*1610*180㎝, Kitchenware installation1600*1000*200㎝
베이징 도심에서 30분 정도를 달려 잔왕의 퉁저우(通州) 숭좡 아틀리에 입구에 들어섰다. 너른 마당은 거대한 타이후석과 한창 작업 중이던 스테인리스 조각들로 부산스럽다. 성공한 중국 작가들의 상징과도 같은 광활한 작업실로도 모자라 마당으로 나온 작업들에서 작품 규모가 짐작된다. 네이비 컬러 패션을 데님, 레이온, 면 등 소재를 달리해 감각 있게 연출한 작가는 자신의 아틀리에 투어부터 권했다.
“가산석 시리즈는 제작 과정 자체가 행위예술입니다. 망치를 두드려 평면적인 걸 자연의 곡선으로 변화시키죠.”
그는 타이후석의 실루엣에 따라 스테인리스 조각들을 두들겨 형태를 만든 다음, 조각보를 엮듯 짜깁기한다. 돌을 빼낸 뒤 이음매는 연마해 없앤다. 이어 예술적 미감을 발휘해 광택 부분과 비광택 부분으로 나눠 연마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가산석들은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장소에서 또 다른 예술적 퍼포먼스가 됐다. 신축 건물 사이, 가정집 마당은 물론 영유권이 없는 바다, 에베레스트산, 만리장성까지도 무대가 됐다.
이렇게 가짜 산수를 만들어 내던 작가는 급기야 조물주가 되어 자연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틀리에 한쪽에 자리한 커다란 기계가 ‘조석기(造石机)’라고 했다. 말 그대로 돌을 만드는 기계. 지난해 8월 베이징의 Today 미술관에 전시됐던 이 설치작품은 찰흙 한 무더기를 넣어 기계를 조작하면 자연과 같은 조건의 비, 바람, 파도 등이 몰아치며 흙무더기를 기암괴석으로 만든다. 1억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자연의 풍화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연이 단 1시간 만에 완성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 어떤 환경운동가도 해내지 못했던, 물색 없는 컬렉션으로 사라지고 있는 타이후석에 대한 환경 문제를 해결했다.
조석기를 지나 작가가 안내한 작품은 부처를 모신 신전 ‘불약당(佛藥堂)’. 지난 상하이 비엔날레 전시작이었던 불약당 안의 부처들은 하나같이 비타민, 항생제 등과 같은 서양의 약을 담고 있다.
“시각예술은 관람자의 육체와 정신 모두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철학 사상으로 보면 정신과 물질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인 것이죠. 이러한 나의 예술적 철학이 담긴 작품이 바로 이 불약당입니다.”
부처가 정신을 상징한다면 약은 물질 즉 육체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부처 안에 약을 넣어 은유했다.
아틀리에엔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또 다른 재미있는 설치작품이 있다. ‘ATM Deity Search Engine’이라는 제목의 ‘신(神)을 뽑는 기계’. 이 작품은 돈을 뽑듯 ATM 기에서 신을 뽑는다. 전 세계 모든 신들의 프로파일이 들어있는 이 기계에 신연합 카드(Deity Link:은행 연합이 있듯 신연합)를 넣고 원하는 신을 불러내는 것이다. “원하는 신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을 넣어도 된다”는 작가의 재치 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에 “정신과 육체, 물질은 하나라는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 없는 논리적으로 완벽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광활한 스튜디오 한쪽에는 냄비, 접시, 컵 등 싱가포르와 인도 거리에서 구입했다는 스테인리스 주방용품들이 늘어져 있었다. 작가의 또 다른 유명작인 ‘도시 풍경’ 설치 시리즈에 사용되는 재료들이다. 작가는 수백 개의 주방용품을 쌓아 스펙터클한 고층 빌딩을 만들고 도시를 세운다. ‘가산석’ 시리즈와 이 ‘도시 풍경’ 시리즈를 결합해 그는 2009년 ‘가든 유토피아(Garden Utopia)’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했다. 자신이 만든 도시에 자신이 만든 자연을 결합해 ‘이상적 정원’을 실현한 것이다.
“동방 문화의 가치에 대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치를 재창조하고 싶었습니다.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을 끌어들이는 방법, 약이 병을 고치듯 약 같은 가치, 치유의 능력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나는 나의 지혜를 총동원해 자연을 재창조합니다. 자연을 파괴해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해서 보존하자는 것입니다.”
작가와 함께 1시간 남짓 아틀리에 내 작품을 둘러보고 나니 공통점 하나가 잡혔다. 모두가 하나같이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들이라는 것. 가산석은 중국 전통 정원의 미학적 요소를 차용해서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정원으로 전시장을 옮겨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짜 돌일지라도 그 모양을 보면 누구나 중국 전통 정원을 떠올릴 것이다.
“사회적 상호 작용과 상호 이해의 기반 위에서 작가의 예술과 관객 사이의 교류가 일어나도록 했어요. 덕분에 학식이 높든 낮든 누구나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거죠.”
진 대표의 설명은 잔왕이 왜 세계적인 작가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됐다. 잔왕의 ‘가산석’ 시리즈는 보스턴 뮤지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오크란 뮤지엄, 시카고 대학 뮤지엄, 스탠퍼드 대학 뮤지엄 등 세계 각지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하버드 시클란 미술관에는 컬렉터가 기증한 가산석이 고대(古代) 돌과 함께 전시돼 있다고 한다. 올해 말에는 대형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이번엔 또 어떤 작품으로 자연을 재창조할까. 자신만의 예술언어로 조물주의 능력을 대신하고 있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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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왕
=1962년 산둥성 출신. 중앙미술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중국 아방가르드 1세대 현대미술 조각가. 조각·설치미술·비디오 등 여러 분야에서 철학적·개념적 특성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제작한 ‘가산석(假山石·가짜 바위)’ 시리즈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진현미 대표
=영어 이름 미아(Mia). 베이징 다산쯔 차오창디 예술특구에서 자신의 갤러리 ‘ARTMIA(아트미아)’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블루칩 작가들과의 만남을 중앙SUNDAY 매거진과 리빙 매거진 ‘레몬트리’에 연재하고 있다.
-중앙선데이 2011.5.1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