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초상 속의 성상과 영상
이선영(미술평론가)
하복진의 작품들은 어딘가 작가를 닮았으면서 자기들끼리도 닮았고, 표정도 비슷하다. 떼지어 무대에 등장하는 아이돌 스타들처럼 말이다. 무대 위의 그들은 대중들의 취향에 맞춰 선정된 유형에 성형이나 화장 등이 비슷해서 복장이 달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눈을 몰아서 치켜뜬 모습인데, 그것은 몰입과 상상과 연관된다. 잠이나 꿈은 일상에서 경험될 수 있는 몰입의 예다. 작품 [햇살 가득한 오후의 낮잠]에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가 여럿이 되는 과정은 조용한 세포분열이 아니라, [자아 폭발]처럼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몰입과 상상의 기표이기도 한 인물의 눈동자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관객의 시선을 뜨겁게 또는 차갑게 되돌려주는 응시 또한 초점이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귀여운 꾸밈새는 현실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하다. 화장기는 진하지만,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비율이 커서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오동통한 체형은 도톰한 입술로도 반복된다.
햇살 가득한 오후의 낮잠,2022,gouache on canvas,90.9x60.6cm
Clones,2023,gouache on canvas,145.5X112.1
아이에게도 섹시 코드가 적용되는 현대적 미감과도 무관하지 않은 귀여우면서도 육감적인 캐릭터는 마주한 거울상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분신으로 나타난다. 아나로그 시대가 자아와 주체를 전제하거나 강조했다면 디지털 시대는 그 위상이 확실하지 않다. 디지털 시대는 자아를 대신하는 아바타같은 존재가 수많은 시공 속에 편재하며 활동한다. 하복진의 작품에서 쌍둥이같은 인물들은 자아나 주체의 분신이지만, 무엇이 원본인지도 불확실하다. 여성과 남성이 아니라 서로 닮은 여성들만 나타나는 점은 분신의 속성을 강조한다. 하나이자 여럿인 도상에는 움직임이 잠재해 있다. 작품 [타임루프 애니메이션]처럼 이를 애니메이션으로도 표현한다. 하지만 하복진의 주요 작품은 거대한 캔버스에 과슈로 그린 초상이다. [Dream gates] 시리즈는 얼굴들이 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영상에서 영감받은 이미지로, 회화적 초상과는 거리가 있다. [Dream gates]라는 제목은 작품의 주제가 인간의 무의식이나 꿈임을 알려준다.
분신은 현실과 관련은 되지만 현실은 아닌 무의식이나 꿈과 유사하다. 작가는 현대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이 대안의 현실에 몰입한다. 6명의 인물이 둘씩 짝을 지어 서 있는 작품은 가상현실에서 아기자기하게 캐릭터를 꾸미는 듯한 유희가 있다. 소품으로 등장하는 꽃 또한 플라스틱이나 풍선으로 만든 것같은 인공성이 강하다. 동질이상의 인물 4인이 나타나는 화면에는 꽃도 네 송이다. 분신같은 유형은 작품끼리도 성립되어 시리즈 작품을 마주 걸면 또다른 시너지 효과를 자아낸다. 작품 [다차원] 시리즈에서 인물과 함께 하는 꽃들은 마치 그런 모양의 젤리나 사탕같이 보이며, 인공성 강한 인물들과 어울린다. 인형같은 얼굴들과 비슷한 계열이지만, 사물에는 입체감이 더 강조되어 있어 여러차원의 공존을 말한다. 하나의 주형에서 나온 복제품같은 반복에도 차이는 있다. 작가는 인쇄로 친다면 판들이 어긋나는 듯한 선을 가미한다. 비디오 키드인 작가가 어릴 때 즐겨 봤던 비디오의 특징인 노이즈들을 표현한다.
하복진_Reflection_112x112cm_gouache on canvas_2023
하복진_Reflection_112x112cm_gouache on canvas_2023
작품 형식은 자전적 이력과 밀접하며, 그렇다 보니 작품의 내용 또한 자아가 자리하는 상상의 세계가 주된 무대가 된다. 작가는 미술 입시 학원이 없는 곳에서 자랐고, 대학에서도 전공한 시각디자인은 작품에 일러스트같은 흔적을 남겼다. 디자인의 특징인 단순 간결함과 강렬함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서 살짝 벗어나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은 그 차이의 의미를 극대화한다. 94년생의 작가는 스스로를 ‘비디오 세대’라고 생각한다. 집에 케이블 텔레비전이 없었던 작가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까지도 만화를 보러 비디오방을 다녔다. 작가는 막걸리를 사 가지고 들어갔던 성인 구역과 어린이 구역이 따로 있었음도 회고한다. 이전에 그 수많은 만화방이 사라졌듯이 비디오방도 점차 인터넷에 밀려 사라졌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매체계의 흔적은 컸다. 문화 지체 현상이 있었던 상황에서 인터넷 세계를 선체험 한 셈이다. 하복진의 회화에서 핀트가 안맞는 듯한 외곽선은 화질이 안 좋았던 비디오 영상의 인물 주변에 늘 보였던 잔상에서 왔다.
애니메이션 작품은 물론 회화에도 디지털 과정이 필수다. 잔상을 그리기 위해서 동일한 스케치가 두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슈로 색칠할 때 두겹의 스케치를 살린다. 물론 그 반대의 과정, 그림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한다. 초창기 디즈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매체의 영향력, 특히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의 체험은 작가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정은 아니다. 비디오라는 출발점은 컴퓨터나 프로젝터 등 기계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에 회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회화의 색감과 크기에 대한 작가의 신뢰다.디스플레이도 점차 커져서 벽면을 가득 채우는 시대가 왔지만, 아직 작가들이 모니터 크기를 선택하는 것에는 제한이 따른다. 하복진의 경우 300호 정도의 대형작품에서 진가를 발한다. 전시 공간과 시간이 허락되면 공간 자체를 디자인하고픈 욕심도 있다. 큰 작품에서 몰입은 더욱 용이해지며, 그자체로 꿈과 무의식의 공간으로 다가온다.
다차원,2023,gouache on canvas,60.6X60.6cm
다차원,2023,gouache on canvas,60.6X60.6cm
다차원,2023,gouache on canvas,60.6X60.6cm
회화는 작가의 자아 탐구의 장인 셈이다. 작가는 2022년 개인전 [오차원]에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은 환상의 세계로, 나 자신을 알고 싶은 사람은 무의식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나는 장소인 꿈’을 그린다. ‘무의식의 상태인 꿈의 세계에서 자아 탐구를 시작했다. 이성보다 위에 있는 무의식, 오직 나의 본성만으로 흘러가는 곳인 꿈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일상에서 겪었던 상황을 꿈속으로 불러와 꿈 필터를 끼워, 오묘한 컬러가 돋보이는 환상의 세계를 이미지로 옮긴다’ 작가는 꿈을 ‘과거-현재-미래를 포괄하는 5차원’으로 간주한다. 작품 속 인물에 대해 자신을 닮은 일종의 자화상이지만, 이름이 없다는 점에서 캐릭터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이런저런 모습이거나 불특정 다수의 모습이다. 비슷한 인물이 한 명부터 대여섯명이 등장하는 분신의 테마는 물론, 핀트가 맞지 않는 듯한 외곽선으로 ‘흔들리는 나’를 표현한다.
큰 화면에 펼쳐진 분신을 통해 ‘나도 모르는 나의 행동’과 ‘자아를 탐구’한다. 자아에 대한 탐구는 형식적으로 회화와 영상의 관계, 아나로그와 디지털 언어와의 관계 속에 놓인다. 빠른 시간 동안 매체계의 진화는 격변이라고 할만한 변화를 야기했다. 자아를 비춰보는 거울이 상상의 무대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체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자아와 주체를 정립한다. 하복진이 구사하는 어법에 따라 방점은 조금씩 달라지는 셈이다. 작가가 말하는 5차원까지는 몰라도 매체에 따라 차원의 변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 시기들로 이끌어간다고 말한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이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첫 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 번째 것은 예술을, 세 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낸다. 성상/ 예술/ 영상으로의 추이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각각의 리듬 속에는 앞서 나타났던 것이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차원,2023,gouache on canvas,116.8x91.0cm
자아폭발,2022,gouache on canvas,116.8x80.3cm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가설을 적용할 수 있다. 비디오 영상을 보면서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을 이해한 작가에게는 초상화가 내재해 있다. 마찬가지로 그림으로 그려진 하복진의 초상에는 성상이 내재한다. 성상적 요소는 ‘시간적 이상의 단축, 즉 우상은 부동의 시간의 이미지이며, 영원의 가사 상태이자 신성이 응결된 무한 속의 종단면’(레지스 드브레)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에서 자신만이 유일한 중심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아의 원형이 된다. 레지스 드브레에 의하면 성상의 다음 단계인 예술은 움직이는 형상들을 보여준다. 이후 영상적 시각은 속도에 사로잡힌 순수한 리듬으로 끊임없이 회전한다. ‘우상은 두려움을, 예술은 사랑을, 영상적 시각은 관심을 각각 불러일으킨다’는 유형화에 따르면, 수많은 코드들 중에서 눈에 띄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보화 사회 속에서 고투하는 하복진의 강렬한 초상에는 두려움과 사랑이 내재한다.
출전;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