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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명애 / 짜면서 짜이는 것

이선영

짜면서 짜이는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얼마 전 세종보갤러리 개인전에서도 전시된 [embroidery pattern] 시리즈는 계절의 여운을 담은 율동과 형태, 그리고 색감이 특징이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우명애의 작품에도 살아온 경험들이 반영된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화단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로부터 벗어나 있었고, 생활인으로 작업과 단절된 시기를 겪었으며, 그러면서도 작업의 끈을 놓지 않게 지속해왔던 드로잉이 있었다. 최근 발표된 작품에는 생활 속 식물에 대한 애호, 그리고 코로나시기에 바느질을 했던 경험 등이 모두 녹아있다. 예술은 최악의 것조차 작품이 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품어준다. 작가는 그동안 수묵, 채색, 구상, 추상 등 여러 양식을 섭렵해 왔고, 현재는 식물을 주요 소재로 삼는다. 식물적 선으로 풀어낼 것이 아직 많이 남은 탓이다. 작가는 ‘식물 이미지를 수놓듯 그리는 작업’에서 ‘나열된 기둥 모양의 식물군은 선과 선 사이사이로 다양한 사물을 품고 있는데, 그곳에는 나무와 숲이 있고 알 수 없는 동물과 꽃, 집과 마을이 있으며 바람이 불고 빛이 드는 공간이 있다’(2023)고 말한다. 




Plant in my garden 4, 112㎝×112㎝, mixed media, Korean paper, 2021



The 7th embroidery pattern, 112㎝×145.5㎝, mixed media, Korean paper on canvas, 2023



전공이었던 동양화의 조형 어법은 드로잉과 맥이 닿아있다. 한지에 작업하는 것도 연속적이다. 주로 사용하는 물감인 아크릴은 유화보다는 담백하다. 본격적인 작업을 펼치기에 크지 않는 공간이어도 드로잉은 지속가능하다. 그렇게 틈틈이 해온 드로잉에서 몇몇은 큰 작품으로 탄생한다. 드로잉은 그자체가 작품이자 개념이 전개되는 실험의 장이 된다. 우명애의 작품은 작든 크든 그 밀도가 유지된다. 작은 것을 단지 크게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가 텍스트 같은 방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편물이나 자수처럼 촘촘히 짜이는 화면은 추상적이지만,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끼워 넣어, 관객은 그 안에서 집이나 화분 같은 소재를 찾아낼 수도 있다. 특히 화분 모양의 형태가 많이 보이는 것은 최근 발표 작품에서 식물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비중을 보여준다. 작가의 눈에 띄는 집안 어딘가에 특정 식물이 있었겠지만, 작품에서는 식물적 조직 안에 집이 끼어 있는 식이다. 


한편 짜듯이 그리는 작업은 식물에(의) 고유한 섬유질을 떠올린다. 이전 시대에 마나 면 같은 식물성 소재는 천으로 손수 짜이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에서 짜임에 대해 ‘식물의 자라나는 모양을 표현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선을 긋고 면을 채우고 하는 반복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繡(수)놓다’라는 제하의 작가노트에서는 ‘반려가 되는 식물과 사물, 혹은 존재하는 그 무엇이 포함되어 스티치로 드러나고 있다’(2021)고 말한다. 대체로 그녀의 작업은 추상적이다. 자연으로부터 온 형태소와 작업의 리듬이 합쳐져서 화면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놓는’ 것이다. 화면과 평행하게 배치되는 형태소들은 화면의 평면성을 확인한다. 작가에게 영감을 준 대상은 패턴으로 녹아있지만, 식물적 형태소와 색감은 자연과의 관련을 유지한다. 예술이나 사회적 삶같이 중요한 대목의 배경이었을 자연은 화면 전면에 배치된다. 삶의 주기에 따라 방점이 달라지는 예술은 자연으로 기운다. 자연 안에서의 삶과 예술이다. 




The 8th embroidery pattern, 130.3㎝×162.2㎝, mixed media, Korean paper on canvas, 2024



The 33th embroidery pattern, 38㎝×38㎝, mixed media, Korean paper, 2024



작품 제목 속 ‘pattern’이라는 키워드처럼, 자연의 외관이 아니라 자연이 방식이다. 바늘구멍처럼 보이는 형태소의 배치에 따라 식물적 삶의 패턴이 드러난다. 가령 수직으로 쭉쭉 올라가는 형태소들은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이 느껴지는 궤적이다. 큰 작품의 경우에는 기후나 기상 등의 조건과 관련된 식생의 움직임이 반영되기도 한다. 작품 [움직이는 붉은 능선]은 봄이 되면 남녘부터 개화를 알리는 소식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며, 가을이 되면 단풍 소식이 그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사계절과 관련된 식물지도는 흙이나 바위 같은 무기질 물질에 생명체 같은 피부를 입혀준다. 다양한 꽃의 무리들이 있는 능선의 풍경은 고체가 아닌 유체나 기체처럼 움직인다. 작품 [노란 바람 무늬]에서 해초처럼 유영하는 듯한(듯) 식물의 움직임을 만드는 것은 바람이다. 작품 속 식물은 빛을 향해 몸을 펼치고 엽록소 가득한 내부에 빛을 붙잡고, 지상의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산소를 내뿜는다. 


우명애의 그림이 추상적임에도 불구하고 화면 위아래가 확실한 것은 식물의 생태 조건이 반영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식물은 빛 에너지를 끌어들이고 흙 속의 자양분과 수분을 길어 올리기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자크 브로스도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식물 내부에는 두 가지 흐름이 정착하는데, 땅속에서 빨아들인 수분과 무기질을 전달하는 상승 수액과 탄소 동화작용의 결과물을 뿌리에까지 전달하는 하강 수액이라고 말한다. 식물은 두 끝점에서 왕성하게 생장한다. 자크 브로스에 의하면 위로는 줄기가 공기 중에 포함된 이산화탄소와 햇빛을 빨아들이기 위하여 가지와 잎을 확산시키는 반면, 아래쪽에서는 수분을 흡수하고 단단해진 줄기를 받쳐주기 위해 뿌리가 갈래를 펴나가는 것이다. 식물로부터 영감을 받은 우명애의 작품 또한 ‘흡입하고 그 흡입 물을 여러 곳으로 흘려보내기 내부체계’(자크 브로스)가 표현되어 있다. 자연에서 형태는 기능이고 기능에는 잉여가 없다. 




The 42th embroidery pattern, 162.2㎝×13.3㎝, mixed media, Korean paper on canvas, 2023



The 44th embroidery pattern, 80.3㎝×80.3㎝, mixed media, Korean paper on linen, 2023



자기만의 시공간을 짜나가는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작가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 과정 속에서 포획될 수 있는 소재나 주제가 작품화 될 수 있다. 어떤 소재가 들어오든 화면을 짜는 작가만의 방식에 의해 다시 짜인다. 짜는 형식의 작품은 대상보다는 맥락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맥락 그자체가 대상, 즉 작품이 된다. 우명애의 작업은 짜기라는 은유를 통해 현대철학의 사유와 연결된다. 그것은 작품을 텍스트로 본 사상이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텍스트란 ‘짜여진(짜인) 것, 얽힘, 짜인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텍스트는 하나의 생산품, 이미 만들어진 베일로서 그것 뒤에 의미(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상호 엮어져 가며 만들어 내는 생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텍스트는 연속적인 결합을 통해 확장된다. 우명애의 작품에서 촘촘한 텍스트의 특징인 빈 구멍은 생성의 자리인 셈이다. 작가 또한 짜면서 짜이고 있다. 


예술적 진리의 발화자로서 작가의 능동적 위치는 상대화 된다. 텍스트 이론에서 말하는 ‘저자의 죽음’(바르트)은 언어의 힘을 강조한다. 옥타비오 파스는 작가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언어이고, 그때 작가는 다만 분명해질 뿐이라고 한다. 현대의 문화 이론에서 개인이 주체가 되는 능동적 표현이라는 신화는 소멸해 간다. 그렇지만 작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문제에 매달리는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작품’(바르트)이다. 하지만 만물을 텍스트로 본다면 예술 고유의 문제 또한 보편적인 문제와 연동된다. 바르트는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 자신을 가두면서, 작가는 ‘왜 세상인가, 사물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보다 열린 질문을 제기한다고 말한다. 작품의 창조자와 달리 텍스트의 생산자는 질문하는 기술에 자신을 한정한다. ‘작품이란 질문하는 기술이지, 거기에 대답하거나 그걸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다’. ‘작가는 의미를 말하지 않고, 의미가 있는 장소를 말할 뿐’(바르트)이다. 




The 48th embroidery pattern, 60.6㎝×72.7㎝, mixed media, Korean paper on linen, 2023



The 52th embroidery pattern, 72.7㎝×60.6㎝, mixed media, Korean paper on linen, 2023



소비자의 수동적인 방식과, 실제로 무엇인가 만드는 자 요컨대 생산자만이 세계와 긴밀하게 접속할 수 있다. 소비자로서의 선택은 코드화와 물신주의에 한정된다. 하지만 (텍스트)생산자는 세상 또한 자신과 자신 작품처럼 짜인 것으로 이해한다. 재현은 주체와 대상이 나뉘지만, 텍스트로서 세계를 보는 관점은 텍스트를 짜는 자 또한 짜임을 인정한다. 그것은 작업과 수행을 비슷하게 간주한다. 한편 우명애의 작품 속 자연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인간 주체가 아니라 또한 자연에 녹아드는 상호적 주체임을 말한다. 짜는 작업은 몇 단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풀이었다가 풀 덩어리로 변하고, 이후 어떤 모양으로 짜이기 시작했다. 코로나시기에는 집에서 바느질을 했다. 모든 것이 멈췄을 때 단절된 것을 이어주었던 작은 실행들은 작품의 몸통이 되었다. 재봉틀이 고장 나 생긴 구멍이나, 천에 수를 놓으면서 생겨난 형태는 화면에 편재하는 작은 공간들이 되었다. 점은 풀이되고 숲이 되고 집과 마을을 연상시키는 형태소가 되었다. 


2024년 세종보갤러리 전시 ‘점으로부터’에서, 작가는 ‘수놓듯 그리는 나의 작업은 점과 점을 잇고 선이 되고 면이 되었다. 면들은 맞닿아 그물 같은 짜임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정원 가꾸기나 농사일이 온전히 인간의 계획이나 노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뿌린 씨앗같은(씨앗 같은) 점들은 어느 부분은 자기들끼리 자라기도 하는 법이다. 시작은 작가가 하지만 추수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러한 불확실이 자유의 몫인지 저주의 몫인가. 그에 대해 수많은 예술가와 미학자들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해왔다. 붓으로 작업하면서도 짜기의 어법이 지속되었다. 수놓듯이 그리는 그림에서, ‘수놓다’에서 바늘과 실이라는 비유는 드로잉에 기반한(기반 한) 선적인 조형 언어를 설명해 준다. 죽 이어지는 선은 시간이고 시간인 한 서사지만, 우명애의 그것은 단선적이지 않다. 작가는 ‘어떤 점에서 시작된 다음 점 혹은 다른 점으로 가는 방향은 선택지가 분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데...점과 점을 잇는 선은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혹은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나타난다(나타나고 있다)’ 고 말한다. 




The 57th embroidery pattern, 80.3㎝×80.3㎝, mixed media, Korean paper, 2024



 The 66th embroidery pattern, 72.7㎝×60.6㎝, mixed media on linen, 2024



그림은 한 색으로 짜기도 하고 여러 색으로 짜기도 한다. 특히 (비유적으로)바늘의 구멍에 해당되는 밝은 부분은 선의 궤적을 암시하는 형태로 더 중요하다. 마치 숨구멍처럼 식물 에너지로 가득한 화면을 숨 쉬게 한다. 식물은 스스로는 정지해 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생명의 본질을 실현한다. 구멍들은 한 방향을 향해 가다가도 어떤 지점에서는 복잡해진다. 문장으로 치면 다른 단락이 시작되는 부분일 것이다. 문학에서는 다른 내용으로 전환하기 위해 문체나 시제까지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누보로망의 작가 로브 그리예 에 의하면, ‘작품에서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의 빗나감’이며, ‘작가가 형식에 개입하는 것은 그가 의미체계를 바꾸는 순간들이고, 의미의 비밀스런 변화가 일어나는 분절들’이다. 얼마 전 전시 제목처럼 ‘점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점은 기하학적인 공리의 점은 아니다. 우명애의 작품 속(속,) 선들은 점과 점 사이의 최단 거리가 아니다. 미로와도 같이 우회하는 길들이다. 


만다라가 명상을 가능하게 하는 선적 미로이듯이, 작품 또한 선적 여로를 따른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다시 올 수도 있지만, 그곳은 더 이상 최초의 출발점과 똑같지 않다. [embroidery pattern]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길어내는 시리즈 작업으로, 하나의 원형의 재현이 아닌 무수한 변형의 가지치기다. 그것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계통수처럼 자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질 따름인 리좀이다. 이야기로 친다면 기승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과 거리가 있는 작품에서 선은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외에 상위 개념이 없다. 작업을 다시 시작한 후 한동안의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듯 많은 작품이 탄생 되었지만,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지 않는다. 작품 하나하나가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세계이다. 재현주의가 아닌 작품에서 시작과 끝은 불확실하지만, 작업의 가속도가 붙어가며 무의식이 현실화한다. 작업을 통해서만이 결과가 확실해진다. 그래서 작품 제목에 숫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붉은 능선, 162.2㎝×390.9㎝, mixed media on canvas, 2023



노란바람 무늬, 132.3㎝×162.2㎝,  mixed media on canvas, 2023



작품 제목에서 앞 번호는 먼저 한 것이지만 작업에 돌입하면 무아지경이 되기 때문에, 순서는 작가가 통과한 시간에 대한 표지일 따름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시리즈처럼 일련의 것들이다. 재현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원근법은 계층적 질서에 의해 작동한다. 시작과 끝이 있고 중심이 있다. 하지만 우명애의 작품은 계속 짜이는 과정이 중요하다. 계층적이거나 이원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다. 물론 그 흐름은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 한동안 멈춰있는 듯도 보이며, 객관적인 질서로 간주되는 전체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를 만큼 주변화 되어 있기도 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공간을 구축하는(또는 그렇다고 믿어지는) 예술은 누군가에게는 대안의 세계다. 사회적 시스템은 자연적 나이와 사회적 나이를 일치시켜 가며, 어떤 지점에 개인을 계속 재배치하곤 한다. 장기판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을 움직인다는 불길한 느낌과 실제적인 압박이 있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듯한(듯 하는) 지배적 질서와의 길항 관계 속에 자리하는 예술의 역할은 그러한 압력을 운명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출전; 2024 아트허브 평론지원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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