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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경 / 화면 위를 유영하는 실 선

박영택

두껍고 눅눅한 장지는 깊은 바다 같다. 그것은 마음의 밭이자 심적 심연일 것이다. 아니 모든 화가들은 자신의 화면, 납작한 평면을 그런 깊음으로 채우고 싶어 한다. 정신과 마음으로 마냥 울울한 그런 화면말이다. 어떤 깊음에의 열망이 그림을 이끄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깊음’이라 칭했지만 그것도 정확한 명칭은 아닌 듯 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문자로 기술되거나 언어로 명명되기 어려운 어떤 조짐, 기운, 느낌이나 분위기로 절여진 상태일 것이다.
노신경의 추상적인 화면은 그런 깊음이나 아득한 배후를 연상시키면서 펼쳐져있다. 무엇이란 이름 짓기 힘든 난해가고 아스라한 색채들이 물들어 있고 그 색채는 종이의 표면과 내부로 삼투해 들어가 주름과 결을 만들고 습기 찬 상황성을 만들었다. 다분히 분위기 있는 화면이 되었다. 흡사 염색된 천을 보는 듯도 하다. 이미 무수한 색채의 혼합과 그것들이 얼룩지고 스며든 자취 자체가 충분히 회화적인 피부를 조율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거나 특정 이미지가 아니라 색채와 장지라는 종이의 질감, 표정과 상태만으로 자족적인 회화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그 위로 섬세하고 가는, 예민한 선들이 미세한 균열처럼 지나간다. 순간 나는 오래된 벽의 표면, 사물의 껍질을 들여다보는 듯 하다. 시간과 세월의 힘에 의해 그려진 흔적, 그 압력에 의해 눌려진 상처 같은 자취들이 자아내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혹은 앞서 언급했듯이 무척 오래되어 바래지고 헤진, 나달거리는 천의 일부를 보는 듯도 하다. 그것은 인위에 의한 흔적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이다. 실측하기 어려운 무수한 시간이 만든 이미지이자 재료 자체가 받아들이고 내포한 포용 아래 가능한 얼굴말이다.

그러나 그 가는 선들은 바느질 자국이다. 작가는 바탕 면을 색채추상으로 연출한 후 그 위로 재봉질을 통한 바느질 선, 이른바 바느질 드로잉을 했다. 모필과 먹을 대신해 바늘과 실이 화면위에 선을 긋는다. 남긴다. 물리적 실체가 선이 되고 그 선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종이의 표피에 균열을 안긴다. 종이에 의도적으로 형성한 주름이자 자연스러운 시간의 잔영인 것처럼 머무는 한편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화면을 유영한 마음의 자취이자 그동안의 시간의 궤적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화면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장지위에서 보낸 시간, 몸과 마음의 과정이 그대로 선이 되고 물질이 되었다. 먹을 머금은 모필의 선은 종이와 일체가 되는 것이라면 이 선은 그와는 달리 종이 위에 독립해서 자존하는 존재이자 촉각적으로, 부조적으로 올라가 묘한 동선을 만들어나간다. 그래서 보는 이들의 시선과 마음의 이동경로를 만드는 지도 같은 기호가 된다.
사실 이 바느질 드로잉은 목적을 망실한 선의 경로다. 그곳은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어지고 새겨지는 선 자체가 중심이다. 무의식적으로 끌고 가는 재봉선은 화면을 종횡무진 누빈다. 종이 위를 긁어나가면서, 문지르고 지나가면서 감정과 마음의 유동하는 상황성을 또박또박 각인한다. 해서 그 선은 알 수 없는 선들이다. 작가는 종이위에 모필을 대신해 재봉질을 통해 선을 만들었다. 먹이 실로 대체되었다. 모필의 강약, 농담의 변화는 균질한 재봉선으로 마감되었다.
사실 재봉질은 두 개의 물질을 결합시키는 것이라면, 천위에 장식을 얹히는 것이라면 노신경의 재봉질은 ‘목적 없는 드로잉’, ‘무의식의 자동기술’, ‘순수한 선긋기’에 기여한다. 그런데 이 선들은 분명 이미 장지위에 시술된 ‘색채추상’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얹혀진다. 따라서 드로잉은 바탕화면의 상태와 유기적 연관을 맺는다. 그 둘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긴 어렵다 해도 바탕연출과 그 위로 지나가는 선이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문제는 장지위에 어떤 상황성을 연출하고 그 깊은 추상화면이 어떻게 재봉질에 의해 이루어진 선과 만나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 둘이 별개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노신경의 근작은 장지위에 바느질드로잉을 촘촘히 하고 그 위로 작은 천 조각들을 운동감 있게 부착했다. 그 조각들이 표현적인 언어로 적극적 기능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조각들은 다소 애매해 보인다. 오히려 그 조각들 없이 좀 더 매혹적인 벽이나 심연 같은, ‘깊은’ 추상적 배경에 정처 없이 떠도는 그 무심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나 동선을 유인해내는 실선의 연출만으로도 이미 풍성한 화면이 될 것이란 생각이다. 바느질과 오브제로 부착되는 천조각의 조형이 문제가 아니라 힘 있고 깊이 있는 화면과 선이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그림, 회화일 것이다. 아마도 그 지점이 이 작가가 생각하는 동양화의 새로운 계승 및 해석과 맞닿아 있는 장소에서도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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