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놀이 혹은 지난한 노동으로서의 ‘심심파적’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사소한 것들로부터
작가 김등용의 작업은 사소한 것들에게서 온다. 그것은 벽보가 나붙은 거리에서 뜯겨 나온 청테이프처럼 일상 속에서 쉽게 발견되는 흔해 빠진 낡고 버려진 것들이거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땀과 같은 비루하고 지저분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는 인간에게 여유로운 산속의 캠핑을 방해하는 해충과 같은 제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연에 생명의 기운을 전하는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투명하고도 맑은 이슬과 같은 보존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것은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이다.
김등용은 이러한 사소한 것들을 어떻게 미술의 언어로 시각화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거리에서 채집된 청테이프 조각을 가지고 같은 현장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 붙이는 방식으로 원래의 맥락을 뒤집는 유희적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작품 〈다시 붙이기〉(2016)는 장난기 많은 짓궂은 소년의 놀이처럼 엉뚱한 무엇이자 자폐증 환자의 집착 놀이처럼 골똘한 무엇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땀을 채집하고 그것을 증발시켜 소금으로 만드는 또 다른 퍼포먼스 연작인 〈한 땀 프로젝트〉(2019)는 공기가 안 통하는 땀복을 입고 명상이나 운동을 하는 방식의 우스꽝스럽고 희한한 무엇이지만 한편으로 진중한 실험이기도 했다. 자연에 나가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하나하나 채집하는 퍼포먼스 〈참이슬 찾기〉(2019)는 또한 어떠한가? 그것은 어린아이의 맘처럼 순수한 놀이이자 한편으로 과학자의 표본 연구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모든 퍼포먼스는 아이들의 치기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행위를 너무도 진지하게 펼쳐나가는 까닭에 마치 놀이처럼 가볍게 보이다가도 한편으로 지난한 고난을 견디며 지속하는 묵언 수행(默言修行)처럼 진중한 무엇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등용, 한 땀 프로젝트, 2019 & 김등용, 다시 붙이기, 1800x9000(mm), 수거된 청테이프, 2016
II. 심심파적의 놀이 - 유쾌하거나 진지하거나
김등용의 퍼포먼스가 공유하는 세 면모, 즉 ‘사소한 것들에게서 이끌어 내는 예술적 행위’와 더불어 ‘흥미롭고도 재기발랄한 면모’ 그리고 ‘진중한 수행적 면모’는 이번 홍티아트센터에서의 개인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개인전의 부제는 “심심(甚深)을 다하여”이다. 여기서 ‘심심’이란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심심하다’의 어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와 동음이의어 중에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음식 맛이 조금 싱겁다”라는 뜻을 지닌 순 한글 ‘심심하다’의 어근인 ‘심심’이 있음을 알고 있다. 작가 김등용이 선택한 다중적 의미의 용어인 ‘심심’은 이번 전시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업의 출발점이 바로 부제로 내세운 한자어 ‘심심(甚深)’이기보다 ‘무료하고 재미없다“는 의미의 ‘심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료한 ‘심심함’으로부터 출발한 후 그 심심함을 잊기 위해 행하는 ‘심심풀이’ 혹은 ‘심심파적(--破寂)’을 행하고 그 행위가 점차 깊고 간절한 ‘심심(甚深)함’에 도달하는 일련의 퍼포먼스가 그의 작업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무료한 심심함을 타계하기 위해 행하는 그의 퍼포먼스를 우리가 ‘심심풀이’라는 익숙한 용어로 칭하지 않고 한글과 한자의 조합인 ‘심심파적’으로 부르려고 하는지를 곰곰이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 이러한 성찰을 위해서 홍티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전시를 둘러보자.
전시는 크게 두 개의 범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비행기 날리기〉(2019)라는 제목의 단채널 영상 작품이고, 또 하나는 〈심심 모으기〉(2019)라는 제목을 지닌, 퍼포먼스와 연동되는 다양한 오브제와 영상 작품들의 조합이다.
작품 〈비행기 날리기〉는 작가 김등용이 홍티아트센터 레지던시 기간에 ‘방황 아닌 방황’으로 다대포 해변을 무료하게 어슬렁거리던 중 무심하게 허공을 바라보게 되면서 종종 맞닥뜨리곤 했던 비행기의 출몰을 영상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을 별생각 없이 촬영하곤 했는데, 이번 전시에는 5월 중 일주일간의 기록을 편집하여 상영한 것이다. ‘나는 비행기’를 단지 기록만 했을 뿐인데 그가 ‘비행기 날리기’라는 능동적인 행위 주체를 연상하게 하는 제목을 달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김해공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의 이미지를 뒤집어 반대편으로 나는 모습으로 편집한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이다. 단순한 발상, 그것의 집요한 추적과 채집, 그리고 유쾌한 전복이 이 작업에 나타나고 있는 미학인 것이다.
작품 〈심심 모으기〉는 전시장 가운데 설치된 커다란 크기의 푸른 수조 안에 들어가 우리가 흔히 ‘뽁뽁이’라고 부르는 포장용 에어캡을 하나씩 터뜨려 그 안에 들어 있는 공기를 하나둘씩 투명 용기 안에 모으는 작업이다. 어떤 경우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얼굴만 수면 밖에 두고 앉은 채로 무심한 동작으로 에어캡을 하나씩 터뜨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경우는 수중에 엎드린 채 스노클(snorkel)로 호흡을 하는 고된 자세로 에어캡을 마치 노동을 하듯이 터뜨리기도 한다. 작가 김등용은 무료함을 달래는 이러한 ‘심심풀이 혹은 심심파적’을 통해서 ‘공기 채집 놀이’라는 단순한 유희적 행위뿐 아니라 ‘공기 채집 노동’이라는 고된 행위를 동시에 실행한다.
생각해 보자. 그가 물속에서 에어캡을 터뜨리는 퍼포먼스는 피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기 채집’을 시각화하려는 장치로 고려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소한 것’을 예술의 소재로 견인하고 그것을 ‘예술 유희’와 더불어 ‘예술 노동’으로 변주하려는 그의 작가적 태도로부터 기인한다. 즉 무료함을 달래는 단순한 ‘심심파적’이 때로는 극한의 노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하거나 그 ‘심심파적’을 통해서 무료한 심심함을 극한의 창작 노동이라는 ‘심심(甚深)함’으로 변주하려는 작가적 태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어떤 때는 놀이이고, 또 어떤 때는 수행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유쾌하고 한편으로는 진지하다.
김등용, 비행기 날리기, 단채널 영상, 00:12:10, 2019
III. 심심파적의 노동 - 용이하거나 지난하거나
자, 여기서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 글은 왜 그의 퍼포먼스의 출발 지점을 ‘심심풀이’라는 순 한글로 부르기보다 ‘심심파적’이란 한글과 한자의 조합으로 칭하기를 선호하는가? 우리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은 김등용의 작업에 나타난, ‘심심(한글/무료함) → 심심파적(한글+한자/무료함의 망각 혹은 타계) → 심심(한자/간절함)’에 이르는, 단계를 비교적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글과 한자의 조합인 ‘심심(한글)+파적(한자)’으로 칭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조합은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비롯된 ‘심심’함과 깊은 철학적 명상에 이르는 단계의 ‘심심(甚深)’함 사이에서 양자를 매개하는 그의 퍼포먼스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로 마련된 것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심심파적’의 놀이는 유쾌함과 진지함 사이에 있다. 뒤샹(M. Duchamp)의 작품 〈50cc air de Paris〉(1919)가 50cc 부피의 유리 앰플을 파리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50cc 파리 공기’가 담겨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우겼던 것처럼, 물속에서 공기를 모으는 김등용의 작업 또한 능청스럽고 유쾌하다. 또한 아콘치(Vito Acconci)의 작품 〈Step Piece〉(1971)는 의자 위를 오르내리는 무모하리만치 단순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용이함’으로부터 ‘지난함’으로 자리 이동했던 것처럼, 김등용 또한 ‘용이한 단순 행위’를 ‘지난한 신체적 고행’에 이르기까지 지속한다. 처음엔 단순하고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지속되는 한 고되고 어려운 일이 된다.
그렇다. 그의 퍼포먼스를 노동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용이함과 지난함 사이에 놓여 있다. ‘유쾌하거나 진지한 놀이 사이’, 그리고 ‘용이하거나 지난한 노동 사이’는 그의 작품 세계가 놓인 공간이다. 그의 작품 〈비행기 날리기〉는 무료함이 야기한 유쾌한 관찰 습관을 집요한 기다림과 진지함으로 변주한다. 그것은 비디오카메라로 피사체를 추적하였던 가벼운 출발을 진중한 기다림과 분석으로 이끈다. ‘식은 죽 먹기’였던 그 행위는 이제 지난함 속으로 잠입한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심심 모으기〉는 일련의 유쾌한 발상의 심심풀이용 유희에 기초한 퍼포먼스를 실행하기 위한 수조와 같은 대규모의 구조물 제작을 해야 하고, 그 속에서 성공적인 퍼포먼스 실행과 그것을 기록하는 영상의 효율적인 녹화 방식을 시뮬레이션으로 사전 점검하는 빈틈없는 계획 또한 요청한다. 게다가 이 단순한 퍼포먼스를 예술의 언어로 번안하기 위한 다양한 조형적 장치를 세분화해야만 할 당위성마저 끌어안는다. 그뿐인가? 작가가 선보인 퍼포먼스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다양한 방식을 연구하고 그들에게 예술 창작과 예술 향유의 기쁨을 제공하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론을 고민해야만 한다. 관객이 모은 공기를 일일이 분류하고 그것을 작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는 효율적인 공간 연출의 방식도 실험해야만 한다. 용이함으로부터 시작했건만, 그것을 실행하는 동안 이르게 되는 지난한 노동을 철저하게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김등용, 심심 모으기, 단채널 영상, 00:04:15, 2019
IV. 심심을 다하여
여기 무료함과 심심함을 이기기 위해 시작한 ‘심심파적’을 화두로 한 채, 유쾌함과 진지함. 용이함과 지난함 그리고 유희와 노동을 오가는 예술 세계를 펼치는 작가 김등용의 진솔한 고백이 있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나는 지금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과 장소와 현재의 감정에 집중하여 작업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반복적이며 실험적인 형태를 가지며 때론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홍티아트센터에서 진행하는 ‘심심을 다하여’ 전시는 상황과 시간에 따른 나의 감정을 통해 나타난 무의식적 반응들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나는 공허하고 적막한 상황 속에서 심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행해지는 행동들 또한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작업은 심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무의식적 행동들의 결과물이다. 심심한 행동을 심심이 어린 자세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처럼 김등용의 전시 ‘심심을 다하여’는 전시명처럼 ‘소소한 심심함’을 어떤 ‘간절한 심심(甚深)’함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과정과 심심의 변주에는 지난한 노동을 수반한다. 즉 그의 퍼포먼스 자체가 무료하고 지루한 것을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무의식적인 발상의 ‘한판의 심심파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내 현실계 속 고단하고도 수고로운 노동을 요청하는 ‘끝 간 데 없는 지난함’을 낳는다. 흥미롭게도 이 극도의 지난함은 거꾸로 지루함을 낳고 허망한 무의미를 낳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것은 소소한 예술적 행위를 통해서 ‘무의미로 가득한 어떤 덩어리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 달리 말해 어떤 ‘미학적 가치와 의미를 찾는 일’과 연동된다. 작가 김등용은 오늘도 그 목표를 향해서 묵묵히 걸어간다. 김등용의 걷기, 즉 ‘유쾌하거나 진지한 또는 용이하거나 지난한’ 걷기가 우리의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출전/
김성호, 「유쾌한 놀이 혹은 지난한 노동으로서의 ‘심심파적’」, 비평매칭프로그램 20190711, 홍티아트센터 자료집, 2019
(김등용 개인전, 2019. 7. 3 ~ 7. 17, 홍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