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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금원섭 / 순환의 역린

김성호

순환의 역린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역린(瀝鱗) - 추상 원형 혹은 자연 원형   
금원섭은 오늘도 자연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계곡으로 나선다. 그곳에는 간혹 태양을 가리는 기암절벽이 있거나 더러 시야를 가르며 시원하게 물줄기를 쏟아 붓는 폭포가 있기도 하다. 대개 그곳에는 초록이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드는 너럭바위가 자리하는데 그곳은 쉼의 시간을 갖는데 제격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노동 아닌 노동’을 한다. 사진 안에 들어오는 피사체인 자연을 포획하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을 동반하는 희열의 사진 행위이다. 이러한 사진 행위에 있어서 자연은 ‘관조적인 타자의 풍경’이 더 이상 아니다. 그가 자연 속에서도 ‘특이한 자연’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찾아나서는 사진 기행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그가 카메라 앵글로 포획하는 ‘특이한 자연’이란 사전에서조차 이름을 찾지 못하는 ‘역린(瀝鱗)’이다. 한자로 ‘가라앉을 역, 비늘 린’으로 구성한 이러한 이름은 작가 금원섭이 작명한 것이다. 그것은 계곡의 절벽이나 바위에 피어 있는 물의 흔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계곡으로부터 쏟아지는 물줄기로부터 튀어나오는 물방울의 세례를 받은 바위 혹은 그것으로부터 이격된 거리에서 물의 영향을 받은 바위 위에 피어나는 ‘마른버짐 같은 희뿌연 색의 물의 흔적이자 물무늬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돌 위의 물의 침전물이 공기 중에 미세한 이물질과 혼합하면서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드러나는 ‘바위 표면의 자연 무늬’인 셈이다. 
작가 금원섭은 그곳에서 자연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추상의 본디 꼴’ 즉 ‘추상 원형(原形)’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람의 얼굴을 찾아내거나 동식물의 형상을 발견하지만, 자연은 실제로 어떠한 형상을 만들고자 의도하지 않았기에 그 자연 무늬는 분명코 ‘추상 원형’이다. 한편, 그것은 ‘의도되지 않은 자연 원형(原型)’이기도 하다. 즉 이 원형은 “같거나 비슷한 여러 개가 만들어져 나온 본바탕'을 지칭하는데, 세상의 모든 형상은 자연이 만드는 무위(無爲)의 형상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자연이 물리적 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생존을 도모하면서 만들어진 생태적 형상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 유기체의 비정형의 존재를 보라! 마그마가 냉각되면서 각기 저마다의 형상으로 굳어져 만들어진 화성암(火成巖)이나 물살을 따라 제 몸을 굴리면서 제각각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강가의 돌을 보라! 풍상을 겪으며 뿌리로 버티고 줄기를 세운 소나무의 비대칭 자태를 보라! 우리가 자연 속에서 무수히 발견하는 시메트리(symmetry) 이미지나 프랙털(fractal) 이미지도 실상 엄밀히 말하면 모두 비정형이다. 계곡 속 바위 위에 만들어진 ‘물무늬 이미지’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자연 원형(原型)이자, 자연 원형(元型)이기도 하다. 후자의 원형은 “생물 발생 면에서의 유사성에 의하여 추상된 유형”으로 “생물학, 심리학 성격학 따위에서 생명 현상을 유형화할 때 사용”되는데, “생긴 현상이 형식적으로 다르다 하더라도 본질적, 발생적으로 같은 유형”을 의미한다. 
그렇다. 작가 금원섭이 계곡 속으로 카메라를 들고 탐험가의 자세로 찾아나서는 그것은, 그가 ‘역린’이라 이름을 붙인 ‘바위 표면 위에 새겨진 물의 흔적 혹은 물무늬’로, 하나의 ‘추상 원형(原形)’이자, 가장 근원적인 ‘자연 원형(原型, 元型)이라 할 것이다. 






II. 흔적(痕跡) - 지표로서의 인덱스   
산행에 나선 사진가! 금원섭은 계곡의 물가 언저리에서 온종일 탐색하듯이 산책하고 노동하듯이 창작을 실행한다. 그가 역린이라 표현하는 ‘바위 표면 위의 물무늬 혹은 물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주위를 탐색하고, 발견한 그것을 여러 각도에서 수차례 촬영하는 노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계곡을 서성이는 동안, 산삼을 찾는 심마니처럼 신중하게 탐색하고 겨울철 하루의 땔감을 위해 땀을 흘리는 나무꾼처럼 고된 노동을 지속한다. 
그가 찾은 역린! 금원섭이 열심히 그것을 촬영하고 있는 것 자체를 혹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내세워도 그가 피사체로 삼는 그것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에게는,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에 기생하듯이 번지는 그것이 질병의 흔적처럼 보이거나, 번듯한 바위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불청객처럼 보일 따름이다. 금원섭이 흑백으로 인화한 이것의 이미지는 이러한 분위기를 보다 더 극대화한다. 혹자에게 그것은 마치 노인의 얼굴에 피어나는 검버섯처럼 바위 표면 위에 들러붙은 세월의 때가 묻은 흔적일 뿐이고, 제거되면 좋을 불쾌한 이미지일 뿐이다. 바위와 흑백의 대조를 이룬 바위 표면 위 물무늬는 제거되어도 무방할, 아니 얼룩처럼 필히 제거되어야 할 ‘더러운 흔적’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특히 바위 표면 위에 피어난 이 물무늬를 클로즈업한 상태로 정면에서 촬영한 사진 작품은 그 바위가 있었던 맥락을 탈각시키고, 주변의 풍경 이미지를 배제한 흔적의 메시지만을 가중시킴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최근에는 바위가 위치한 주위 풍경을 최소한의 범주이긴 해도 사진의 프레임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바위가 처한 맥락을 바위와 함께 동시에 작품화하는 변형을 꾀하고 있기는 하다. 이러한 변형은 그가 탐색하는 물무늬(텍스트)에 대한 풍경(컨텍스트)을 병치함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맥락화하는데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에게 ‘추상 원형’ 혹은 ‘자연 원형’인 이 물무늬, 혹은 물의 흔적(trace)은, 기호학의 입장에서 인덱스(index)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인덱스는 표상하는 사물과 의미 사이의 인과 관계와 상관성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흔히 ‘색인(索引)’으로 번역되는 인덱스는 원래 “책 등에서 중요한 단어나 항목, 인명 따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에 따라 별도로 배열하여 놓은 목록”을 지칭하지만, 기호학에서는 ‘지표(指標)’로 번역되는데, “방향이나 목적, 기준 따위를 나타내는 표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공장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는 공장의 가동이 시작되었음을 고지하는 지표이지만, 깊은 숲속 산장에서 나는 굴뚝 연기는 등산객을 위해 산장의 주인이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지표가 된다. 분주한 식당의 한 테이블 위가 물기가 있는 것은 방금 전에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나갔다는 지표이며, 주방에 물기가 남아 있는 것은 방금 전에 설거지를 마쳤다는 지표가 된다. 또한 얼굴에 핀 검버섯은 나이가 들었다는 지표이며, 어린아이의 무릎에 난 멍 자국은 얼마 전에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흔적’이라는 것이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를 의미하듯이 ‘지표’ 또한 사물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추적하게 만든다. 
이러한 차원에서 작가 금원섭이 바위의 표면에서 추적하는 물의 흔적은 ‘지시로서의 인덱스’가 아니라 ‘지표로서의 인덱스’에 연동된다. ‘바위 표면 위의 하얀 물무늬’는 오랫동안 물방울들이 바위의 표면과 접촉했던 사실을 알리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지시로서의 인덱스가 ‘의미를 찾는 것’과 연계하는 것이라면, 지표로서의 인덱스는 ‘의미 찾기를 미루거나 의미를 지우는 것’과 연동된다. 그렇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바위의 표면에서 찾고 있는 ‘물무늬 혹은 물의 흔적’은 “의미 찾기를 미루거나 의미를 지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데리다(J. Derrida)식의 ‘차연(差延, Différance)의 지표이자 무의미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전자는 의미 생성을 무한히 연장하는 지표를 말하고, 후자는 무의미와 의미 과잉 사이를 오가는 지표이다. 즉 금원섭이 실천하는 지표로서의 인덱스는 무엇인지 ‘의미 짓기를 미루고’, 비어 있는 의미 속에서 ‘하나의 의미가 아닌 여러 의미가 포진해 있는’ 지표 즉 ‘무의미와 의미 과잉 사이를 오가는’ 지표라 할 것이다. 




III 순환(循環) - 자연의 비가역적 시간 운동과 비가시성의 깊이  
작가 금원섭은 왜 의미 짓기를 미루거나 의미를 지우는 지표를 피사체로 삼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것일까? 왜? 작가의 말을 들어 보자: “물은 공기 중에 미세한 이물질과 섞여 다양한 모습으로 흐르고 흘러 마침내 바위의 표면에 안착하여 마침내 새로운 원형을 생성한다. 수세기 동안 풍화와 침식을 반복하며 마침내 경이로운 새로운 원형들을 탄생시켜 왔다. 그동안 각양각색의 많은 형상에 대하여 정의하지 않고, 다만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새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이와 같은 원형 탄생 작업을 해 왔다.” 그의 진술처럼 이러한 물무늬(새로운 원형들)에 대해 정의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또 다른 해석(새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 작가 금원섭은 오늘도 카메라를 매고 ‘물무늬의 포획’을 위해 계곡을 찾아 나선다. 
그의 ‘물무늬 포획’은 ‘물무늬 결’에 남겨진 층을 따라 과거의 시간을 추적하는 일이기보다 물무늬 결이 남긴 ‘지금, 여기의 시간 운동’을 찾는 일이다. 그것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집중하지 않고 현재를 둘러본다는 점에서 비가역적이다. 시간의 고유한 속성인 비가역성(非可逆性, irreversibility)은 순환(循環)의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안다. 자연의 순환이란 ‘수증기-구름-비-냇물-바닷물-수증기’의 변화나, ‘봄-여름-가을-겨울-봄’의 연쇄가 결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과정이 아님을 말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미래로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 운동이다. 그것은 동양적 사유로, 12괘(卦)와 60갑자를 주기로 하는 음양오행의 기(氣)가 생장하고 소모되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이치를 통해 끊임없이 미래로 변화하는 현재적 과정을 의미한다. 
자연의 순환성은 비가역적이다. 주지하듯이, 비가역성이란 “변화의 조건을 거꾸로 하여도 그 변화가 다시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성질”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간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과거는 도달할 수 없는 시제일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고 했던 물리학자 프리고진(I. Prigogine)의 언급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안다. 과거는 한때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현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존재하는 현재는 운동하는 시간이다. 철학자 베르그송(H. Bergson)도 시간이란 철저하게 과거로 돌이킬 수 없고 끝없이 미래로만 흘러가는 ‘비가역적 지속(durée irréversible)’으로 고찰한다. 여기에는 이질적인 새로움(nouveauté hétérogène)과 변화(évolution)가 일어나는 역동적(élan vital)인 현재적 운동이 지속된다.  
작가 금원섭이 ‘바위 표면 위의 물무늬’를 사진으로 포획하는 작업을 통해서 탐구하는 ‘순환의 역린’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의 흑백 사진은 스티글리츠(A. Stieglitz)의 경우처럼, 스트레이트 포토의 형식으로 진지하게 피사체를 앵글에 담을 뿐이다. 해석이 전제된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자의 입장으로 물러서서 피사체에 담긴 지난한 시간의 현재적 과정을 떨리는 손으로 담는다. 그는 긴 노출로 빛의 움직임을 배반시키거나, 촬영할 때 카메라를 움직이는 패닝(Panning), 주밍(Zoomig), 틸팅(Tilting)의 기술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사건의 목격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대상을 기록할 뿐, 촬영 후 후속 작업으로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간단한 마술조차 부리지 않는다. 
작가 금원섭은 ‘바위 표면의 물무늬’를 사진으로 포획하는 작업을 통해서 과거를 현재에 잇고 현재를 성찰하면서 “나름대로의 또 다른 새 생명을 부여하는” 일에 골몰한다. 그의 작업이 어떻게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 새 생명을 부여하는 일과 관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시성의 세계에서 비가시성의 지표를 찾는 일과 연동된다.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에 따르면, 가시성의 세계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가시성이 하나의 특정한 부재로 현존하게 하는 비가시성의 층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없듯이, 가시성이란 언제나 비가시성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 비가시성은 가시성이 배제시킨 잔여물이기보다 원초적인 것이다. 여기에 금원섭의 작업이 지향하는 종국의 목표가 담겨 있다. 즉 ‘보이는 자연(바위 표면의 물무늬)에서 보이지 않는 무엇(물무늬를 둘러싼 비가시적 지표)’를 찾는 일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퐁티에게서 비가시적인 것의 본질은 ‘깊이(profondeur)’로 언급된다. ‘가장 안쪽’, ‘깊숙한 곳’인 이 ‘깊이’는 “사물들이 순수하게 머물 수 있는, 즉 사물들이 사물들로 머물 수 있는 수단이다. 깊이가 없다면 하나의 세계 혹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결국, 깊이란 ‘작품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닌 추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퐁티에 따르면, 주체가 ‘깊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야 하고,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기해야 하며, 자신을 동시에 도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보는 것에 대한 관성적 인식’을 탈주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라 하겠다.


IV. 날것의 사진이 남기는 진실 - 대상과의 대화 
스트레이트 포토가 가지는 미덕을 혹자는 “결정적인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피사체와의 교류, 즉 대상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회화가 일반적으로 성취하기 어려운 스트레이트 포토만의 특장점이라고 하겠다. 한 주체가 또 다른 주체와 대화를 나눌 때,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란 주체의 열린 사고와 마음이 전제될 때 성취된다. 은폐나 한 점의 의혹 없이 ‘날것의 모습’ 그대로 대화에 나설 때, 또 다른 주체가 ‘나’라는 주체와 동화될 수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트 사진이 당면하는 대상과의 소통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트릭이나 장치 없이 대상 앞에 카메라 앵글을 내밀 때 비로소 ‘날것의 사진’이 시도하는 ‘날것의 소통’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과인 진실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금원섭의 사진이 지니는 미덕이다. 
필자는 금원섭의 이러한 사진에 담긴 미학을 ‘피아(彼我)의 사진 행위’라 정의해 본다. ‘피아’란 사전적 의미로 “그와 나 또는 저편과 이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금원섭의 작업에서 ‘피아’란 피사체인 풍경을 끝없이 대상화하는 모더니즘의 관조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또 다른 주체이다. 달리 말하면 퐁티(M. Merleau-Ponty)의 견해 식으로 그것은 더 이상 보이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주체로서의 풍경이 된다. 즉 ‘인간/예술/자연’ 사이에서 자신의 몸을 서로 나눠받는 ‘탈대상화된 주체로서의 풍경’이다. 그야말로 ‘날것의 주체’와 ‘날것의 대상’이 만나는 ‘날것의 사진 미학’인 셈이다. 
작가 금원섭은 오늘도 하나의 눈, 즉 카메라의 앵글로 계곡이란 장소에서 세상을 기록한다. 그 세상은 거대한 자연이 남긴 작은 흔적을 찾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존버거(John Berger)의 ‘보기의 방식’에서 고찰하고 있듯이, 본다는 것은 대상의 선택이고 그 선택은 결국 한 주체의 사물을 지각하는 태도를 구체화하는 일이다. 스트레이트 포토의 형식으로 미미한 자연의 한 대상인 ‘바위 표면의 물무늬’에 대한 ‘날것의 대화’를 시도하는 그의 작업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그것과 교감한다. ‘하나의 카메라의 눈’으로 기록하는 풍경(landscape) 외에 기억과 마음이라는 ‘또 다른 눈’, 즉 ‘마음의 눈’으로 대상과 교감하는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의 진실’을 만들어 나가면서 말이다.●


출전/
김성호,  「순환의 역린」,  서문, 전시 카탈로그, 2019
(금원섭 - 순환의 역린展, 2019. 12. 11 ~ 12. 17. 조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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