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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변경수 / 내밀한 덩어리 - 응축을 계승하는 함몰의 배반

김성호


내밀한 덩어리 - 응축을 계승하는 함몰의 배반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프롤로그
인체 조각을 통해서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그것을 함유한 ‘인간 존재의 원형(原型)과 인간의 원형상(原形像)’을 탐구해 온 작가 변경수가 신작 개인전을 연다. 그의 이번 개인전 주제는 ‘내밀한 덩어리(Inner Mass)’다. 이 주제는 그가 그동안 인체 형상의 세부적 재현을 버리고 인간의 원형상을 탐구해 온 그간의 실험 의식이 천착해 온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조형 미학은 무엇이고 그것은 전시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II. 내밀한 덩어리로부터 
변경수의 작업은 손 안에서, 더 정확하게는 손가락 사이에서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가장 미시적인 상황 속에서 잉태하는 ‘미미한 무엇’이다. 점토 대신 취한 스컬피(sculpey)라는 연성의 재료와 그것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 만들어 나가는 작은 덩어리는 작품에 이르는 최소한의 필수 조건이다. 우리가 스컬피를 흔히 ‘중합체 찰흙’이라고 부르기도 하듯이, 이 재료는 작업자의 손에 질퍽하게 묻어나는 점토처럼 불편하지도 않고 금세 굳어지는 석고처럼 고지식하지도 않다. 게다가 정과 망치 그리고 톱과 그라인더를 사용해서 형상을 만드는 돌이나 나무처럼 번거롭지도 않다. 작가에게 스컬피는 손가락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면서 매끈한 피부를 입은 동글동글한 형상으로 태어나는 ‘태생부터 산뜻한 질료 혹은 무엇’으로 간주된다. 
둥글둥글한 형태는 변경수에게 작품을 출발시키는 근원적 형상이자 바탕이다.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원형상(原形像)과 같은 모상(母像)처럼 작동한다. 마치 들뢰즈(F. Deluze)의 철학적 비유에서 나온 알(œuf)과 같은 것으로 이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s)’로서의 형상은 생명체의 원형상이자, 모든 존재의 원형(原型)으로 자리한다. 
보라! 이 ‘알’과 같은 구체(球體)는 때로는 스스로 분화하거나 다른 개체와 만나 스멀스멀 성장한다. 그러한 까닭에 변경수가 만든 이 조각들은 그저 쾌(快)를 동반하는 유희의 산물처럼 산뜻한 것만은 아니다. 이 형상에는 피조물을 대면하는 창조자의 환희와 쾌가 동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창작자의 벽면수행과 같은 침잠의 명상이 깃들기도 하고, 때로는 다사다난한 인생사 속 희로애락을 체감하는 심적 고통이 한데 자리하기도 한다. 마치 하나의 씨알이 썩어가면서 지표면 위로 새로운 생명을 피어 올리는 것처럼 창작물의 잉태에는 소멸과 주검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어른거린다. 마치 하나의 수정란이 배낭(胚囊) 속에서 함몰을 거듭하면서 세포가 분열, 증식해 가는 배아(胚芽)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체의 형상이 만들어지듯이, 그의 생명체 또한 구체의 상으로부터 응축과 함몰의 과정을 거치며 태어난다. 이리저리 굴려진 스컬피에 머리, 팔, 다리와 같은 기관들을 분화시키는 것은 함몰이 낳은 결과이다. 그는 이러한 창작 과정을 관람자에게 소개하려는 듯이, ‘구-직육면체-불가사리-사람’의 형태로 순차적으로 변모하는 일련의 과정을 전시 속에 포함하고 있다. 그가 빚은 사람의 형태 또한 세밀한 재현을 생략한 채, 그저 몸통에 팔다리가 붙어 있는 불완전한 형상일 따름이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자신의 몸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함몰’의 과정이 ‘둥그렇게 자신의 몸을 말아 만든 응축’의 과정을 계승하면서 벌이는 ‘배반’이라는 점 말이다. 다른 곳으로부터 새로운 살점을 뺏어와 구체 위에 붙여 가면서 팔과 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체의 덩어리가 자신의 속살을 한쪽으로 밀쳐내고 속으로 함몰하면서 그 살점을 끄집어내어 팔과 다리의 형상을 만드는 까닭이다. 가히 ‘내밀한 덩어리’ 안으로 잠입해서 벌이는 ‘창조를 위한 배반 혹은 자해 또는 자살’인 셈이다. 






III. 납작한 지점에서 만나는 불안과 사랑 
그의 작품이 ‘생성을 위한 희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그가 만든 사람들은 대개 몸통에 대략적인 형태의 팔다리가 붙어 있고 눈코입이 없는 밋밋한 얼굴을 한 익명의 존재로 소개된다. 대부분 직립하거나 어디엔가 앉아있는 형상이지만, 특별한 세부 형상의 특징은 의도적으로 탈각되어 있다. 특정한 칭호로 호명(呼名)되지 않는 그저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사람들을 만든 셈이다.  
한편, 특별한 도구도 없이 엄지와 검지 사이의 기술로만, 작은 구 덩어리에 팔다리와 같은 기관을 올려놓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것도 ‘함몰’의 과정으로 질료의 덩어리에서 팔다리를 끄집어내는 일이란 매우 세밀한 동작을 필요로 한다. 미세한 손놀림으로 반복하는 지난한 노동으로 인해 손목 저림이나 손가락 관절의 통증은 수시로 동반된다. 작가는 왜 이러한 세밀하고도 지난한 노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익명성을 내세운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인체상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내밀한 덩어리’ 안에 무엇을 구현하려는 것일까?  
한 작가에게 창작이 늘 세계를 대면하는 자신의 발언이듯이, 변경수에게도 이러한 ‘내밀한 덩어리’ 만들기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대면하고 그 세계에 대해 발언하는 일이 된다. 예술가로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찾는 일이자, 삶의 의미를 되묻는 성찰인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불안’과 ‘사랑’이라는 양가적 개념을 성찰하는 일에 골몰한다. 
작가 변경수에게 ‘불안’은 자신의 체험적 삶으로부터 인식했던 존재의 양태이자, 선학들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일깨워 준 ‘현존재에 대한 이성적 인식’이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고찰한 ‘자유의 가능성으로서 불안’ 개념이나 하이데거(M. Heidegger)가 언급하고 있는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인간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원초적인 불안’ 개념은 ‘죽음 앞에 선 인간 주체의 근원적인 성찰’이다. 이러한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프로이트(S. Freud)나 라캉(J. Lacan)이 바라보고 있는 ‘욕망의 결핍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달리 타자가 개입할 틈이 없는 ‘내가 대면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촉구한다. 그래서 지극히 실존적 고민을 우선적으로 담는다. 많은 이가 인간 주체를 ‘사회적 인간’이라는 범주 속에서 살펴보고 있듯이, 인간은 홀로 세계를 인식하지만 타자와 함께 세계를 사는 존재다. 
 





이러한 차원에서 변경수의 또 다른 주제 의식인 ‘사랑’은 ‘세계를 대면한, 한 인간 주체의 불안’을 이기는 ‘타자를 끌어안는 세계 인식’으로 귀결된다. 지독한 자기애가 아닌 누군가라는 타자를 사랑하고 보편인 타자와 함께 서식하는 현실계를 체득하는 일, 그것이 예술을 통해서 그가 탐구하려는 것이다.  
작품을 보자. 그가 만든 인간상은 명상하듯이 앉거나 직립한 채 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개 군상으로 재조합된다. 좌대로부터 뻗어 나온 가느다란 철 지지대 위에 있는 인간 형상은 자신의 모체인 둥근 구 형상 여럿이 표면에 빨간색을 입은 채 뭉쳐 있는 ‘기묘한 군집체’ 위에 올라서 있다. 그 구체 군집은 마치 ‘어떤 악성 종양의 형상’처럼 보이면서 작품 제목인 ‘빨간 불안’처럼 관객의 불안한 심리를 자극하기에 족하다. 우리는 이러한 빨간색 구체의 군집 위에 인간 형상을 올린 또 다른 작품들에서, 검은색 등장인물이 자신의 몸 안에서 연신 빨간색 구체들을 쏟아내고 있거나 손 안에 창자처럼 이어진 구체의 군집체를 들고 있는 장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일견 징그러워 보이면서도 무섭기까지 한 인간 군상은 그의 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편, 핑크빛이나 형광 빛의 각종 색상을 지닌 스컬피들을 크고 작은 구체로 굴려 모은 군집체 꼭대기 위에 파묻혀 있는 살색의 인간 형상이나 그 위에 걸터앉아 있는 빨간색 인간 형상은 ‘나/너/우리’와 같은 공동체 속 인간 주체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자연스럽게 이 작품들은, 작가가 스컬피 조각을 통해서 모색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또 다른 주제 의식에 관한 조형 실험의 결과처럼 보인다. 때로는 사탕처럼 달콤하고 때로는 따스해 보이는 감성마저 안고 있는 이 작품들에는 어떻게 보면 과도한 인간 욕망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달콤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스럽고 괴기하기까지 하다. 살색이 주조를 이룬 구체 군집체 위에 인간 형상이 여러 색상의 구체를 끌어안고 서 있는 작품은 또 어떠한가? 이 작품 속에서도 ‘쾌/불쾌’, ‘따스함/괴기스러움’은 어렵지 않게 동반한다.    
작가는 이처럼 그의 작품 속 주제 의식인 ‘불안’과 ‘사랑’을 유사한 형상 속에 납작하게 맞물린다. 때로는 색상으로 때로는 형상으로 드러나는 이 둘 사이의 변별성과 맞물림은 ‘불안’과 ‘사랑’의 감성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하게 만든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신학이 우리에게 알려준 바와 같이, 빛이 끝내 다다르지 못하는 곳에 어둠이 자리하듯이 선과 악은 흑백 논리 속에서 같은 힘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과 ‘사랑’ 역시 같은 몸과 마음 어디에서 서로를 밀고 서로에게 밀리면서 함께 서식하는 ‘공존의 감정’이리라. 





IV. 에필로그 
자신의 손 안에서 응축과 함몰의 조형 언어를 한꺼번에 구사하면서 특수한 조형 언어를 탐구하는 있는 작가 변경수의 스컬피 조각 작업은 ‘큰 규모의 작업을 하기 위한 에스키스(esquisse)’로서 존재하길 거부한다. 간혹 폴리코드나 브론즈로 덩치를 키워 제작되기도 하지만, 작은 크기의 스컬피 조각은 그에게 있어 ‘내밀한 덩어리’ 그것 자체로 자신의 작업 안에 주요한 조형 언어로 자리한다. 특히 개별체가 아니라 군집의 인간 형상을 통해서, 세계를 대면하고 있는 한 ‘개별적 인간 주체’와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인간 공동체에 대한 관계를 탐구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에서 그의 군상 조각은 ‘불안’과 ‘사랑’이라는 주제 의식을 탐구하는데 있어 효능감 있는 ‘조형적 힘’을 발휘한다. 특히 ‘응축을 계승하는 함몰’이라는 조형 언어는 이 두 주제를 한꺼번에 탐구하기에 제격이다. 특히 ‘함몰이라는 조형 언어가 야기하는 배반’은 관객이 미처 기대하지 못하던 ‘낯설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마치 ‘희생을 선택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Agape)적 사랑이 전하는 메시지처럼 말이다. 상세한 재현의 언어를 제거한 채 익명성이 강화된 작은 개별체 인체 조각과 더불어 덩어리들의 군집체 혹은 인간 군상을 통해서 그가 찾는 ‘불안’과 ‘사랑’이라는 주제 탐구가 또 어떤 흥미로운 지점에서 진척되어 나갈지 자못 기대된다.●



출전/
김성호, 「내밀한 덩어리 - 응축을 계승하는 함몰의 배반」, 『변경수』 , 전시 카탈로그, 2022. 
(변경수, 2022. 0000 김세중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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