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을 그린 ‘신여성’ 백남순
한국 최초의 파리 유학 여성화가 해농 백남순(海儂 白南舜, 1904~1994). 부유한 집안 출신의 그는 경성과 도쿄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20대 중반에 홀로 당당히 도불해 파리 현지의 살롱전에 수차례 입선한 엘리트 미술인이다. 작가는 파리에서 만난 미국 유학파 미술인 임파 임용련(任波 任用璉, 1901~?)과 연애 결혼한 끝에 동반 귀국, 이후 중앙 화단의 남성 화가들과 함께 ‘조선적 유화’의 모델을 모색할 만큼 근대 양화계를 견인한 대표적인 여성화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특출난 행보에 비해 현전하는 당시 작품은 <낙원>(1937) 단 하나뿐, 백남순은 6·25전쟁을 겪으며 전문 미술인으로서는 절필했다. 작가는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겁니까”라는 섭섭한 말을 남긴 채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종적을 감췄다. 1) 때문에 나혜석(羅蕙錫, 1896~1948)과 함께 근대 여성 미술인의 기틀을 마련한 개척자지만 그에 대한 심층 연구는 미비한 실정이다. 그럼에도 근대라는 새로운 사회 문화적 환경에서 교육과 직업, 자유와 모던, 우정적 연애와 결혼을 맛본 백남순은 그야말로 근대적 ‘신여성’의 전형이다. 신세대의 여성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그 이상을 좇은 백남순에게서 어떤 신여성적인 면모가 있을까?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남긴 낙원경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신여성’ 백남순
신여성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 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서의 발명품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이 1910년대 일본과 중국으로 이식되었고, 식민지 조선은 1920년대 들어 ‘신여성’ 용어와 그 개념을 수용 및 변용했다. 1923년 개벽사는 『신여성』지를 창간해 이 시대의 새 여성상을 글과 그림으로 전파했으며, 곧이어 경성 거리에는 잡지 이미지와 똑닮은 신여성-모던 걸들이 활보하기 시작했다. 양장과 여우 목도리를 걸쳐 입고 거리를 쏘다니는 단발의 여성, 낭만적인 만남과 신가정을 꿈꾸는 여성, 남성 못지않은 정식 교육으로 소비의 당사자가 되려는 여성 등이 등장했다. 각종 지면은 이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며 신여성상을 유포, 갱신, 비난, 제지했다.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화파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난 백남순은 자신의 길을 주체적으로 설정하는 조타수로서의 신여성상을 적극 수용한다. 그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京城第一公立高等女學校, 경기여고 전신)를 나와 1924년부터 약현성당 부설 가명보통학교의 도화 교사로 교편을 잡다, 1928년 도불 후에는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 스칸디나브 아카데미(Académie Scandinave)를 거쳐 튈르리 살롱전과 프랑스 예술가 협회전에 입선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 과정에서 가명보통학교 교사로 4년간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마련했다든가, 미국에 거주하던 친오빠의 제안을 뿌리치고 프랑스 유학을 택했다는 점, 서툰 프랑스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겁 없이 파리를 종횡한 일화 등은 주체적인 신여성을 정체성 삼은 백남순의 자기 인식을 드러낸다. 특히 그는 파리를 방문한 나혜석의 가이드 역할을 하며, 함께 ‘조선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인물’로 남기를 다짐했는데, 이는 전무후무한 엘리트 여성 미술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려는 자매간의 연대와 약속의 장면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해외 유학을 감행한 백남순은 조선 사회의 구습 타파와 문명 개조의 열차를 이끌 지식인 ‘신여성’ 주체로 자아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임용련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자유로운 여성상을 향하던 백남순의 항로가 미묘하게 변경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예일대를 졸업해 윈체스터 장학 기금으로 유럽 여행을 온 임용련과 연을 맺은 그는 1930년 3월 파리 주재 중국영사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내 함께 경성으로 귀국한다. 같은 해 11월 동아일보 홀에서 국내 최초로 《부부양화전》을 열어 세간의 주목을 산다. 이때 백남순은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기대주 화가가 아니라 ‘부부’의 하나, 임용련의 아내로 근대 미술계에 재등장한 것이다. 당시 전시와 출품작에 관한 평 역시 프랑스 유학파라는 연장선에서 그의 내재적인 화풍 전개를 논하기보다 임용련과의 관계에 기대어 묘사한다. 요컨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는 이 부부전에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긴다. “임파가 주관적·상징적 기분이 농후한 점에 대하여 해농은 사실적이고, 임파의 濃染에 대하여 해농의 그것은 淡하고 경쾌한 것이다. 혹시 해농의 藝風이 라틴적·南歐적임에 대하여 임파의 그것에는 東洋적, 그중에서도 印度적인 점이 많은 것이 아닐까. ······ 자유·경쾌한 점으로는 부인인 해농이 도리어 부군인 임파를 능가할지도 모르지마는, 심각·신비한 점으로는 역시 부군인 임파를 해농으로는 追隨치 못할 것이다” 2) 이처럼 백남순의 파리 유학기는 부부간의 정다운 필치 비교로 축소됐다.
또한 백남순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게 된 임용련을 따라 1945년 해방 때까지 약 15년간 중앙 화단과 떨어진 곳에서 생활한다. 남편에 뒤지지 않는 경력을 지녔지만 정식 교사로 직업을 얻지 못하고 이따금 학생을 야외 스케치에 데리고 나가는 ‘내조’를 하며 지낸 것이다. 실제 1935년 『신가정』에 실린 백남순의 인터뷰에 따르면 “여기 온 지는 벌써 4년이고, 오기 전에도 서울서 연구소 같은 것을 내볼까 하였더니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됩니까”라고 하며 타계할 수 없는 상황에 아쉬움을 전한다. 지식인을 흠모하던 그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 위주의 가정을 돌보는 현모양처로 전환된 것이다. 사실 이 현모양처 역시 근대 신여성 담론의 한 줄기와 맞닿아 있다. 자랑스러운 국민(아들)을 양성하는 현모, 신가정의 안주인 양처로 ‘격상’된 여성 또한 신여성의 한 모습으로 포섭돼 있었다. 이렇게 백남순은 신여성의 이면, 즉 가부장제가 허용한 ‘명석한’ 보조자를 행위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남순은 신지식인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접지 않았으며, 6·25전쟁 동안 교육 활동을 실천해 계몽 주체로 다시 서고자 했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의 일을 돕던 임용련이 전쟁 발발 직후 피살되자 백남순은 3남 4녀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송도에 마련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임시 교사로 1년간 강의했고, 1953년에는 직접 전쟁고아를 위한 성심공민학교(聖心公民學校)를 설립해 1962년까지 운영했다. 그는 인텔리 미술인, 현모양처, 교육자로 거듭나며 신여성의 길을 걸은 것이다. 한편 1981년 한국 미술계에 백남순의 육성을 전한 『계간미술』에 의하면 작가는 ‘파리에서 나혜석과 헤어진 것’, ‘초지를 굽히고 결혼한 것’, ‘6·25전쟁으로 남편과 자신의 작품을 모두 유실한 것’을 가장 후회하는 3가지 일로 꼽았다. 이는 노년의 백남순이 자매로서의 여성화가와 동행하지 못하고, 가부장적 구조에 매몰돼 미술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으며, 그럼에도 꾸준히 제작해온 작품을 상실하여 미술가로 살아갈 지표를 잃었음을 증언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근대적 여성 미술인으로서 완주하지 못한 자아를 강조한 것이다.
남겨진 낙원
백남순은 1945년 해방 이후 급히 월남하는 긴박한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그간 제작해온 작품을 전부 잃는다.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 도록(1925~1927)에 실린 작품 이미지를 제외하면, 현재 실물로 전해지는 근대기 작품은 <낙원>(1936) 하나다. <낙원>은 가명보통학교 교사 시절 친하게 지내던 동료 교사 민영순에게 백남순이 보낸 결혼 축하 선물로 전소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낙원>은 형식, 화풍, 구성, 내용, 도상 면에서 모두 식민지 조선 당시 제작되던 보편적인 서양화 그림과 차이가 있다. 동양식 병풍용 나무 화판에 캔버스를 붙여 유채로 그린 8폭 병풍 <낙원>은 ‘유화 병풍’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다. 이는 실제 병풍처럼 서게 되어 칸막이인 동시에 거대한 그림으로 회화 작품과 공예 공예품 사이를 넘나든다. 화풍에 있어서는 서양 풍경화와 동양 산수화가 절충되어 있다. 근경, 중경, 원경으로 나뉘어 화면을 구성하는 산수화의 삼원법 시점을 적용했지만, 우람한 산세와 자연 요소들은 동양식 준법이 아니라 서양식 명암법으로 표현됐다. 내용과 도상에서도 동서양의 이질적인 풍물이 혼합됐다. 절벽에 초가 오두막이 있는가 하면, 물가에는 서양의 저택이 있고, 아담과 이브, 어머니와 아이, 선유와 낚시를 즐기는 인물, 밀회를 나누는 연인 등 각각의 의미와 서로의 연관이 명확하지 않은 요소가 한 화면에 즐비해 있다.
상징·종교·신비적 분위기가 묻어나는 <낙원>의 제작 배경에는 백남순의 ‘목일회(牧日會)’ 활동이 있다. 목일회는 1934년 김용준(金瑢俊, 1904~1968), 구본웅(具本雄, 1906~1953), 황술조(黃述祚, 1904~1939), 길진섭(吉鎭燮, 1907~?) 등 조선미전을 거부한 양화가들이 조직한 미술 단체로, 이들은 동양주의 미술론을 이념 삼아 ‘조선적 유화’를 형성하려는 목표를 공유했다. 목일회의 유일한 여성 회원이었던 백남순은 현재 확인 가능한 목일회전에 제1회 초대전을 제외하고 모두 참여했다. 3) 그가 이 단체에 가담한 경위나, 구체적인 목적의식은 분명하지 않지만, 집단 활동을 통해 미술계에 존속하려는 의지, 조선과 프랑스를 모두 경험한 데서 발로한 관심 등이 복합된 선택일 것이다. 이렇듯 백남순은 동서양의 매체와 내용, 화풍을 대담하게 끌어와 ‘조선적 유화’라는 기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보여 당대 동년배 주요 남성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한국 근대 미술사의 독보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한편 백남순은 <낙원>에 어떤 이상을 담았을까? 낙원은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이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를 제작했을 1937년 당시, 백남순은 진취적 미술인에서 현모양처로 그 입지가 굳어지고 있을 시점이다. 이때 백남순은 동양과 서양, 무릉도원과 아르카디아, 종교와 풍류, 모성과 성애가 중첩된 하나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이 낙원은 이쪽과 저쪽, 남성과 여성, 원시와 현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 낭만적 근대의 총체이다. 또한 이러한 낙원을 열망한 여성 미술인 백남순의 지식인, 예술가, 어머니, 안사람으로서의 다중 정체성이 투영되고 무화된 장소이다. 결국 백남순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실제 세계가 아니라 모든 권력 구조가 옅어진 조화와 화합의 즐거운 낙원, 영원할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다.
김해리(1993∼),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현재 아트인컬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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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망각 속의 여류화가 백남순의 생생한 증언 - “그게 어디 뜻대로 되는 겁니까”」, 『계간미술』, 8월호, 1984.
2) 윤범모, 「근대기 여성미술의 형성, 나혜석과 백남순의 경우」, 『나혜석연구』, 제2집, 2013.
3) 김운지, 『근대 목일회 회화 연구』,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백남순, <낙원>, 1937, 캔버스에 유채, 166×366cm, 삼성미술관 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