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오가는 선
이선영(미술평론가)
고은정의 풍경은 블루 계열의 깊은 화면 속에 운동하는 미세한 선들이 가득하다. 느릿하지만 힘차게 꾸물거리는 선들은 마치 산, 바위, 물, 나무 등으로 이루어졌을 자연 속 에너지가 방사되는 듯하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배후의 것이 많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고은정의 작품은 사진적 시선을 빠져나가서 웬만한 사진을 통해서는 그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거기에서 방사되는 것이 오존처럼 유익한 것인지 방사능처럼 해로운 것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거기에는 명확한 경계의 이완에서 비롯되는 쾌감과 해체에서 비롯되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작가는 이 미세한 선의 흐름을 공기라고 하는데, 그 공기는 매질이 되어 어떤 냄새, 소리, 촉감 또한 전달한다. 물론 이 매질은 그것을 재현하는 붓질과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투명하지 않다. 고은정의 풍경은 나로 하여금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에서 새벽쯤에 분명하게 보았던, 앞산 전체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같은 것을 기억하게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나는 자연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어떤 기운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수없이 반복된 붓질에 의해 만들어진 밀도 높은 선의 다발들은 매순간 다르게 배열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그림이라는 정지된 평면에서, 움직임을 가시화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회화의 이러한 오묘한 차원은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영상 기기가 재현하는 실감나는 움직임을 부럽지 않게 한다. 이 꿈틀대는 에너지 뒤편에는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평형을 쟁취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에너지의 흐름들은 바탕 물질이 꽤나 높은 밀도를 가졌을 것이라 추측하게 한다. 2012년 개인전 제목 ‘the air-풍경 속에 있는 것’처럼, 고은정의 풍경 속에 있는 것은 공기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공기는 풍경과 우리의 시야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막. 또는 망이 되며, 풍경의 몸통이 되어버린다. 공기로 가정된, 이 유동하는 에너지의 막(망)은 그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할 수 없게 하는 방해 요소이지만, 배후에 있는 물질의 묵직한 실재감 또한 예시한다.
가리면서도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숲, 바다, 하늘과 그 너머를 채우고 있는 것이 뭔지를 탐색한다. 작가는 왜 이렇듯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것이 풍경이라면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노을 지는 하늘, 기암괴석, 멋진 자태를 뽐내는 나무 같은 것을 그리면 얼마나 좋은가. 만약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상상, 꿈, 신화, 종교, 역사 등등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고은정의 작품에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알아보기 좋고 거기에 딸려오는 의미도 확실한, 그래서 안도감을 주고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고은정은 20대 후반에 늦게 그림을 시작했지만, 지금 매달리고 있는 문제는 철저히 화가에 한정될 법한 질문이다. 그러한 비전이 어렵게 쟁취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림 그리는 것 외에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작가와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바로 이런 부류의 인간을 화가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만큼, 작가가 그림으로 풀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선명했다.
한편 고은정이 살아온 삶은 그림을 통해서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현실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렇게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지만, 작가는 ‘장차 뭐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한다. 삶의 계획이 없었다고나 할까. 여기에 나 같은 인간이 또 있었구나 하는 쾌재를 부르면서 작품만큼이나 흥미로운 작가의 연대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국문과에 다녔던 대학 4학년이 되서야 ‘중학생이 할 만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여, 자신에게 절실하고 세상에 맞춰 사는 스트레스 없이 할만한 것이 뭘까에 대한 질문에 우연히 걸려든 것이 그림이었을 뿐이다. 입에 붓을 물고 태어난 듯이 자신의 길을 과장하는 작가도 많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대책 없어 보이는 인간도 처음이다. 그런데 ‘대책 없음’이야 말로 가장 ‘화가적’인 삶이 아닌가. 어쨌든 자신에 대해 매우 투명한 의식을 가진 이와의 만남은 유쾌하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눈만 믿고 가는 화가로서의 치열한 선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오르게 했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의 관계에 대한 집요한 물음은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을 연상케 했다. 먼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떠올린 것은, 고은정이 중시하는 공기 때문이었다. 가하학적인 도식보다는 육안을 통한 직접적인 경험에 더 가까이 가려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플랑드르 화가들에게서 대기 원근법을 받아들였는데, 이 원근법 덕분에 그는 기하학적인 소실점 이론이 간과했던 몽상적이며 시적인 요소를 지닌 채 원거리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대상과 눈 사이에 놓여있는 대기를 중시함으로서, 미술은 현실을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을 넘어서 암시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자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오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윤곽선을 격찬하였다. 몇 백 년 후, 현대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가시성을 ‘살’이라고 명명하면서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살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 아니며, 실체(substance)가 아니다. 메를로 퐁티는 살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원소라는 옛 용어를 쓰자고 했다. 살은 이러한 의미에서 존재의 한 원소이다. 살은 사실이 아니고 사실들의 합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장소와 지금에 유착되어 있다. 현상학적 관점에 의하면, 세계와 존재 이 둘의 관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잠재성)의 관계이다. 고은정이 화가로서 궁금해 하는 것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화가의 물음은 과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이어서, 매우 엄밀하고 치열한 사고, 지각, 행위를 낳았다. 그녀의 그림은 환상적인 면이 있지만, 자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향불을 피운 듯 몽롱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무의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면이 있지만,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풍경에서 분명히 본 것을 평면이라는 형식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본 다는 것도 그렇고 평면에 옮긴다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물론 3차원적 현실을 2차원적 환영으로 옮기는 아카데미의 기법들이 있겠지만, 기존에 확립된 방법들은 작가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야생의 실재를 포획하는 극히 한정된 방식일 뿐이다.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만큼 말이다. 그리기도 전에 빈 캔버스를 이미 점령하고 있는 어법들을 거부한다고 해서, 마냥 어떤 주관적 감성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5년째 집중하고 있는 이 풍경들이 시작된 계기는 지금만큼이나 매우 객관적이었다. 학부 때 작가는 한 장소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1분 간격으로 10시간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한 화면에 올렸을 때 묘한 심상이 나타났다. 카메라 시선도 심상이 가미된 것이라면, 차라리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찍듯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진을 그대로 베끼는 식의 극사실주의가 아니라, 정확하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시작이었고,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방식이 바로 그림이었다.
매일 어떤 장소에서 뭔가를 쳐다보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내가 눈이라도 깜빡거리면 금 새 과거가 되는데, 어떻게 보면 진짜 보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 때 작가의 잠정적 대답은 공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지금도 계속 파고 있는 문제가 되었다. 고은정의 그림은 뭔가를 끝없이 바라보면서 배운 것이 있다. 그림이란 자신이 본 풍경을 잘 그리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보기만 하면 모른다. 그려야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처음에 관찰되지 않았던 것도 작업을 통해 나올 수 있다. 알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알기위해 그린다. 작업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은 이가 바로 예술가이다. 도달하고 나서야 자기가 온 길을 가늠할 수 있는 불확실한 과정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 같은 불확실한 변신을 화가 스스로에게도 요구하는 것이다. 작업을 통해서 스스로 변하고 배우고, 또 다른 문제가 계속 파생되고 해결하는 무한한 과정이 바로 그림이다.
고은정의 그림은 동양화의 일필휘지처럼 단번에 그려지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첨가와 수정의 반복이다. 반복되는 선이 축적되면서 미세한 차이가 생성된다. 반복과 차이 속에서 화면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깊이는 동시에 두 점에 대해 명료한 시각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해지려는 찰나에 생긴다’(메츠거)는 말을 인용한다. 발산하는 선의 흐름들은 처음에 잘 안보였던 것도 차츰 보이게 한다. 작가는 우선 ‘대상을 보는 시각은 단순히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만으로 나뉠 수 없다’고 말한다. ‘거기 있음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 그 대상의 시선,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과 관찰자의 심리적 시선 이 몇 개의 시선들이 한 장면 안에서 뭉그러져서 매 순간 변화하며 존재’한다. 그림은 철저히 풍경에 놓여 져 있었던 산물이다. 작가는 사물을 보지만, 사물도 작가를 본다고 생각한다.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누군가에게 보여 진다. 그것은 원시적 물활론이나 낭만주의적 감성이라기보다는, 보는 것과 보여 지는 것 간의 간극에 관한 현대 심리학의 가설을 떠오르게 하는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그림은 여러 시선이 교차하는 장이 된다. 메를로-퐁티는 위의 책에서 교차는 단지 나와 타인 사이의 교환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나와 세계 사이의 교환, 현상적 신체와 객관적 신체 사이의 교환, 지각하는 것과 지각된 것 사이의 교환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고은정에게 시각은 감정적인 주고받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통합적인 바라봄이 진정 보는 것이다. 대상이 시선이 있다함은 그것이 내 시선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계속 변화함을 의미한다. 공기에 의해서든 사람에 의해서든 대상은 계속 움직인다. 이 여러 개의 시선들의 움직임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공기이다. 공기원근법을 위해 선보다 색을 선택했던 미술사의 사례가 있지만, 고은정은 공기-선이라는 조합을 선택한다.
작가는 움직이는 공기를 평면으로 가져오기 위해 운동성을 가진 최소의 단위로 선을 파악한다. 이 선들의 움직임들은 평면 안에서 여러 개의 움직임으로 발아된다. 발산하는 선의 계열은 고은정의 작품을 회화라기보다는 드로잉으로 보게 한다. 드로잉은 변화하는 주체를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형식이기도 하다. 고은정은 ‘끊임없이 봄(seeing)을 통해 체험되는 순간순간을 평면에 옮겨 놓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움직이는 대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라 믿는다. 고은정의 풍경은 상기한 여러 시선들을 얽히게 하고 매개하는 공기,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공기가 움직이는 자취는 반드시 그것을 보는 이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회화라는 2차원 평면에서 공기의 움직임은 3차원에서 그런 것처럼 밀도의 차이를 통해서이다. 선이 많이 쌓인 곳에서 적게 쌓인 곳으로 흐름이 일어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나무와 하늘 사이와 다른 밀도의 공기를 가진다. 공기의 흐름에 주목하다 보면, 공기의 지형도를 형성했을법한 원래의 풍경은 시야에서 희미해진다. 작가는 한 장소의 공기를 그리기 위해 수없이 그곳에 있어보는데, 많이 있어 본 곳의 풍경에서는 공기의 흐름을 제시하는 선의 밀도가 더욱 커져서 오히려 풍경자체는 불명료해진다. 재현적 형태가 다소간 분명한 그림은 많이 가보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거기에는 잘 안다고 생각되는 것일수록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역설이 있다. 로마에 한두 번 가본사람은 로마에 대한 인상을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 수십년 살았던 사람은 오히려 그곳을 말하기 힘들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은정의 작품에서 공기는 바다나 대지같이 모든 것이 비롯되고 수렴되는 야생적인 바탕 같은 위상을 가진다. 색감이나 유동적 흐름은 특히 바다를 떠오르게 한다.
마침 작가가 스무살까지 살던 곳은 마당 앞으로 바다가 보이는 섬이었다. 작가는 남해 바다공기는 따뜻하고, 동해 바다공기는 무섭고, 서해 바다 공기는 슬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다에 관한한 나름의 세분화된 지표를 가지고 있다. 바다라는 원형적 시공간은 푸른 새벽이나 그보다 더 짙푸른 밤을 떠오르게 한다. 고은정의 풍경은 새벽이나 밤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작가는 블루를 털어내고 싶어도 같은 색만 가지고 씨름하는 스스로를 곤혹스러워한다. 싫은 것도 확실해서 고은경의 풍경에는 도시풍경이 없다. 작업의 특성상, 오래 반복해서 봐야하는데, 싫은 것을 오래 반복해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시끄럽고, 들려오는 말들이 공허하고 자신과는 상관없어 보인다고 한다. 그 듣기 싫고 말하기 싫은 소리(또한 공기)는 사회가 만들어낸 상징적 우주에 충실한 언어일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우주의 더 깊은 심층에는 바다와도 같은 현실계가 있고, 작가는 바로 그 현실계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출전; 휴+네트워크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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