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문장으로 말해요 A Language of our own>
김진, 전희경
2022. 8. 13 (Sat) – 2022. 9. 30 (Fri)
기획: 정재연
뮤즈세움에서는 2022년 8월 13일부터 9월 30일까지 김진, 전희경 2인전 <당신의 문장으로 말해요>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온전히 회화를 다루는 두 작가가 전하는 그들만의 고유의 색과 붓질로 관람객들에게 전하는 그들의 언어를 각자의 방법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보인다. 붓질을 통한 작가의 표현은 특별한 그들만의 언어이자 서사이다. 붓질은 마치 말투와 비슷하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의 버릇을 보고 성격을 예측하 듯 말투엔 서로의 품격이 있다. 사실 말투는 어떤 하나의 고정된 버릇이지 본성은 아니다. 두 작가에게도 같은 붓은 도구로서 같은 존재이지만 서로 다른 세상의 언어를 탐색하고 그들만의 말투로 그들만의 문장을 만들어낸다. 붓을 잡고 움직이는 그들의 언어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 몸을 움직이고 표정을 통해 ‘하나의 문장’이 완벽하게 만들어진다. 이 문장은 다시 다른 사람들의 눈과 입을 통해 전달된다. 전달되는 과정 중에선 때론 오해의 가능성이 있지만, 작가들이 말하는 그들의 언어(도구로 그리는 언어)와 상대의 언어(보고 느끼는 언어)의 적절한 불협화음 속에서 작품은 완성되고 타협한다.
김진과 전희경의 작업 방식과 성격은 상이하게 다르지만 이 둘의 결과물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캔버스 위에 붓질이 뿌리를 내리고, 그곳에서 시작하는 두 작가의 이야기는 참으로 정직하다. 작가는 작품과 서로 대화하고 붓질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한다. 그러면 관람객은 이 두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눈으로 담으면 된다. 김진과 전희경은 서로 다른 소통의 방식을 선택했지만 결국 이들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재현이 목표가 아닌 이 둘의 치열한 고민이 이 전시에 또 다른 주제가 아닐까 싶다.
김진은 말한다. 물감 얼룩이 말을 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페인팅을 한다고. 캔버스를 피부의 표면이라고 치면 천천히 붓질을 밀어서 물성을 뭉개는 물감은 외부 자극을 막아주는 방패역할을 해주는 방패막이다. 프랑스 정신분석가인 디디 앙지외(Didier Anziue)는 그의 저서 <피부 자아(Le Moi-peau)>에서 전체로서의 자기를 가리키며 ‘자아는 피부이다’ 라고 말한다. 즉, 김진 작가의 캔버스는 그녀의 대체 피부이고 여러 물감의 색은 서로 다른 구조의 조직들이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작가 스스로의 ‘나’라고 할 수 있는 물질적 형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기를 전체적으로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 붓질은 굉장히 빠르지만 살아남은 붓질만 화면에 남아있다. 작업의 속도는 빠르지만 뭉개면서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위에 다시 덧붙여 작업을 이어나가기 때문에 살아남은 붓질만 표면에 보이게 된다. 작가는 붓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는데 충분히 물감과 물을 머금고 있는지에 따라 붓을 선택한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는 곳에서 나오는 붓질의 의외성과 자신의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들을 오히려 작품에 적극 활용한다.
물감의 얼룩은 하나하나의 언어다. 서로 다른 색이 쓰여질 땐 행간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또한 그녀의 주된 작업의 주제는 ‘빛’이다. 빛에 가리워진 세계는 그녀에게 어떤 곳일까? 태양이 사라져가는 늦은 오후, 찬란하게 아름답지만 사라져가는 색이 망실된 상태로, 붉은 기미만 남겨지는 절반쯤 어두운 세계일까? 자연과 생태의 파괴된 자본주의 시대에서 변형된 인공 자연물인 표면의 살들로 우리시대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시대의 회화이다.
전희경의 작품에서 회화적인 붓질의 속도감은 가볍지만 빠르게 느껴지지만, 아주 견고하고 각기 개별적인 물질감을 가진다. 그녀의 작품에서 카오스같은 성격을 부여하는 물감의 얼룩은 모든 가능한 형태를 이끌어내는 잠재태를 말한다. 굉장히 돌발적이지만 계산된 붓질과 안료의 발산은 캔버스 안에 이미지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숨쉬는 듯한 묵직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붓의 미세한 관성은 작가의 손끝에서부터 붓끝까지 이어져 독특한 떨림이 있다. 그녀가 온몸으로 그린 회화는 빽빽한 긴장감속에서 이리저리 유영하 듯 흐르다 그 속에서 숨을 쉰다. 사실 작가는 정확한 목적이 있는 굉장히 정교한 붓과 망가진 붓을 고루 사용한다. 작품을 그릴 때, 정교하고 정확하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오히려 어긋나버리는 두 지점에서 화면에 맞닿아 있을 때, 우연적인 요소를 채택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붓은 그녀에게 그림의 방해요소이자 굉장히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붓 터치가 굉장히 속도감이 느껴지지만, 반대로 느린 속도로 작업을 진행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푸른빛 도는 색감은 유년시절 수영선수로 있던 때 물속에서의 에메랄드 빛깔을 지닌 하늘을 넘나드는 환상같은 존재일까? 작가에게 풍경이란, 이행 대립되는 극지점에 있는 '무언가'가 그 대립-상관관계의 긴장상태를 팽팽하게 느낄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한다. 어떤 장면과 장면의 교차, 나와 세상 사이의 틈, 빛과 어둠 사이의 공존과 같은 이중적 사고는 자기 자신을 기억하기 위한 혹은 어떤 공간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화면을 채우고, 포기하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그녀의 스스로를 위해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전희경 만이 펼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은 그녀가 만지는 색과 터치, 물성, 역동적이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그리거나 닦아내는 즉각성을 화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림을 택했고 오롯이 자신만의 언어로 말한다. 허공에 떠다니 듯 흘러 다니는 물감과 터치는 소멸하지 않는 그녀만의 궤적이고 자신의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