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1931, 움직이는 경계_Moving Boundary》
전 시 명 장항1931, 움직이는 경계_Moving Boundary
기 간 2025. 5. 13(화) ~ 12. 31(수)
장 소 도시탐험역 일원
참여작가 강홍구, 권민호, 김범수, 김태은, 박안식, 박은선, 성동훈,
엄익훈, 유은석, 이세현, 이이남, 정 현, 조신욱, 황태하
주 최 서천군
주 관 달방 크리에이티브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충청남도
문 의 달방 크리에이티브
전화: 군청 사무실 041-950-4089
도시탐험역 041-957-0755
장항 1931_움직이는 경계
경계로부터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혹은, 경계를 어떻게 재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모든 경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의 소산이다. 인간과 자연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경계는 반생태적이고, 개인과 제도적 주체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제도적 주체와 벌거벗은 인간을(조르조 아감벤은 심지어 법으로부터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벌거벗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정상과 비정상을(미셸 푸코는 제도와 권력이, 당대의 지식체계 그러므로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공모해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한다고 했다), 대중과 소수자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경계에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도 경계는 삶과 죽음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자연의 생리며 존재의 본성에 반하는 부분이 있다(조르주 바타이유는 원래 삶과 죽음은 연속돼 있었는데, 여기에 문명이 들어서 삶과 죽음이 분리되었다고 본다. 문명이 삶의 영역으로부터 죽음을 금기시하고 추방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인간에 대한 개념 규정 자체를 보더라도 이성과 감성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총체적 인간과 본원적 인간으로 나타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부분이 있다.
예술은 이처럼 인간의 관념이 만든 유형무형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드는 도구가 된다. 경계를 허물어 재편하고 재설정하고 재구조화하는 계기가 된다. 사회학과 생태학, 존재론과 예술적 담론의 경계를 넘어 총체적인 인간, 본원적인 인간을 되찾는 형식실험의 장이 된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탈)경계 담론을 매개로 인간을, 자연을, 사회를, 존재를, 장소(장소 특정성)를, 관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강력한 실천 논리의 장이 될 것이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는 방식을 제안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은 고장 난 세상을 수선하는 수리공에 예술가를 비유했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예술적 상상력이 경계로 나타난 고정관념의 틀을 어떻게 타파하는지, 기왕의 경계를 어떻게 움직여 재설정하는지 모색해보는 형식실험의 장이 될 것이다. 최소한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상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상상이 이미 예술이다.
철도 카페: 권민호, 김범수, 김태은, 박안식, 엄익훈, 유은석, 이세현
권민호. 작가는 한때 항구도시와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장항선의 종착역이자 문화적 중심지였던 충남 서천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비디오 작업을 예시해주고 있다. 항구와 기차역이 공존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번창했던 도시의 정황을 추정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연신 하얀 연기를 내뿜는 굴뚝과 같은 장항제련소의 역동적인 현장과 모텔 사우나와 우리 식당 그리고 노래연습장과 같은 네온사인으로 현란했을 당시 주변 상가 풍경을 보여준다. 그중에는 당시 상호를, 간판을, 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 역시 지역 리서치에 기반한 아카이브를 재구성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바다와 기차와 배가 하나로 어우러진 장항 풍경을 보여주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하나로 중첩된 화면을 보여준다. 지역 리서치와 아카이브에 기반한, 다큐멘터리와 르포에 기반한, 기록하는(그러므로 증언하는) 비디오에 충실하면서도, 애니메이션으로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그때의 장항과 미래의 장항이 하나로 만나는 장항의 오롯한 현재를 제안한다.
김범수. 지금은 디지털이 대세지만, 옛날에는 원래 아날로그 필름으로 영화를 찍고 만들었다. 작가는 그렇게 구시대 유물이 된, 구하기도 어려운 아날로그 영화필름을 일일이 자르고 붙여 재구성한 작업을 제안한다. 시효를 다한, 폐기된 사물이 새로운 용법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작업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유형화되는데, 창문을 소재로 한 작업이 정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라이트박스가 장착된 화면에서 나오는 은근한 빛의 기미가 성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건축 친화적이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반면, 크고 작은 동심원 형태가 어우러진 작업이 동적이고 들뜬 느낌이다. 아마도 각 내면과 외면으로 나타난 삶의 양가감정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왜 아날로그 영화필름인가. 영사기가 돌아가는 둔탁한 기계음과 캄캄한 어둠 속에 흩어지던 희뿌연 빛의 기미, 여기에 비라도 내리듯 지직거리는 화면과 관련한 헐리우드 키드의 추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대 감정이라고 해도 좋고, 작가가 향수를 불러오는 방법이라고 해도 좋다.
김태은. 실내에 들어서면 센서로 작동하는 얼굴인식 카메라를 통해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그림 속 얼굴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림 속 얼굴은 내 얼굴이 돼 웃고 찡그리는 내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거울 속에 있는가. 아니면 내 얼굴이 돼 내 표정을 흉내 내는 그림 속에 있는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거울 밖에, 그리고 그림 밖에 있는가. 그렇다면 거울 속에 있는 나는 누구이고, 그림 속에 있는 나는 또한 누구인가. 그중 진정한 나(불교에서의 진아)는 누구인가. 도대체 진정한 나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했다. 후기구조주의는 주체란 다만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타자(자기_타자)인가. 리어왕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냐고 절규했다. 정체성이 문제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와 나를 대면시키는 작가의 작업은 내가 누구인지 묻는, 존재론적인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
박안식. 균형이다. 균형이란, 움직임이 없는 안정 체제를 말한다. 그런데 정작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형상은 움직인다. 돌출된 가장자리 모서리를 세워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짧은 안정 체제로 잠시 잠깐 서 있다가도 이내 안정을 잃고 흔들린다. 안정과 불안정 체제를 오간다고 해야 할까. 짧은 안정 체제에 도달하기 위해 긴 불안정 체제를 통과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균형이라는 제목은 사실은 불안정 상태, 불균형 상태를 증언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읽힌다. 다시, 그러므로 사실은 불균형을 통한 균형이라고 해야 할까. 불균형을 통한 균형? 김지하는 기우뚱한 균형이라고 했다. 삶에, 권력에, 관계에, 그러므로 세상살이에 적용되는 말이다. 삶이란 어쩌면 이처럼 짧은 균형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긴 불균형 상태를 통과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불균형이 없으면 균형도 없다.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작가의 작업은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삶의 알레고리 같다.
엄익훈. 그림 그리는 소녀, 방울 부는 소녀, 그녀와 춤을. 그러나 정작 소녀를 그린 그림도 그녀를 빗어 만든 조각도 없다. 다만 스크린을 대신한 벽면 위에 투사된 그림자가 있을 뿐. 영상작업인가. 조각이라고 했다. 그림자 조각이라고 했다. 조각이 성립하려면 형태가 있어야 하고, 형태가 있어야 그림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림자가 아니라면, 정작 형태 자체는 그림 그리는 소녀와도 방울 부는 소녀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외관상 형태는 추상 조각처럼 보이고, 그림자는 한눈에도 그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재현적인 이미지처럼 보인다. 비록 형태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그림자이지만, 추상적인 형태가 재현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작가의 작업에서 형태와 그림자와의 자기동일성이나 상호 유기적인 관계와 같은 전통적인 관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형태와 조명의 상호작용성을 이용해 일루전 그러므로 환영을 만드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유은석. 배 위에 오두막이 있다. 크루즌가. 노아의 방주의 현대판 버전인가. 아니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각색한 것인가. 오두막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현대인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마도 현대인의 삶에 대한 알레고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이처럼 현대인이 사는 집(배)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공중에 매달린 채 천천히 움직인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기를 무한 반복하면서 움직인다.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뒤로 가는 것도 아닌 것이 한자리에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멈춰 선 것도 아닌 것이 한자리에 붙잡힌 것도 같다. 그런 엉거주춤한 상태가 무한 반복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선택과 판단 앞에 놓인다. 문명이 발달한 현대인은 더 그렇다. 자발적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이처럼 반쯤은 강요된 선택과 판단을 앞둔 현대인은 갈피를 못 잡고 중심을 못 잡는다. 왔다 갔다 하는 작가의 집(배)은 이런 현대인의 좌절을, 상실을, 번민을 표상한다.
이세현. Beyond Red. Between Red. 다만 붉은색으로만 보지 말라는 주문일 것이다. 붉은색 너머를 보아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붉은색과 붉은색 사이에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하튼 붉다. 그래서 붉은 산수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암실에서처럼 투명하게 붉다. 광학적이다. 작가의 색채감정이라고 해도 좋다. 암실에서 현상액에 담근 사진을 가만히 흔들면 잠재적인 이미지가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몽환적이다. 흐릿한 기억이 점차 또렷해지는 것처럼 기억적이다. 작가의 현실감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투명하게 붉은색을 빌려 기억을 되불러오고, 몽환적인 풍경을 열어놓는다. 한국 근현대사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상실한 고향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부재 하는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같은 우주적 비전을 열어 보인다는 점에서 우주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여기에 작가가 꿈꾸는 이상세계를 열어 보이는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플랫폼: 김태은, 성동훈, 정현
김태은. Signal Candy.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철도 부속 시설물 중에 전차대가 있다. 자동차 또는 철도 차량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라고 했다. 기차가 방향을 틀어 돌 수 있도록 바닥에 레일이 깔린 원형 구조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작가는 크고 알록달록한 알사탕 형태의 조형물을 그 원형 구조물의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했다. 원래 신호를 발신하는 경광등에 착안한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 기차가 다니던 시절 경고등이 켜졌던 것처럼, 저녁이 되면 조형물에 내장된 조명이 자동으로 점등되게 했다. 새로운 버전의 신호체계를 매개로 그때의 신호체계를, 당시 신호체계에 얽힌 서사적 기억을 되불러 온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왜 알사탕인가. 작가는 여기서 신호체계에 놀이적 요소를 끌어들이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그렇고, 뻥튀기된 크기가 그렇다. 호이징하는 놀이에서 문화의, 예술의, 그러므로 예술적 상상력의 기원을 찾는다. 아마도 작가는 놀이문화를 매개로 옛 신호체계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성동훈. 소리나무다.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 끝에 풍경이 매달려 있어서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바람이 풍경을 흔들어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모빌이라고 해도 좋다. 바람이 풍경을 흔들어 소리 나게 한다는 점에서는 소리조각이라고 해도 좋다.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풍경은 듣는 이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선한 기운을 퍼트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소리나무는 나무 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면 불나무로 변신한다. 불이 붙는데도 정작 나무는 타지 않는다. 원형 그대로다. 쇠나무이기 때문이다. 보통 철은 용광로의 열기를 통과하면서 쇳물로 변신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쇳물로도 녹지 않고 살아남은 쇠 침전물(용광로 철)로 만든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의 나무가 쇠나무에서 불나무로, 그리고 재차 소리나무로 변신하는 연금술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와 관련한 신화적 서사와 함께, 풍경소리를 매개로 널리 선한 기운을 퍼트린다.
정현. 지금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받쳐 선로를 지지하지만, 옛날에는 원래 나무로 지지했었다. 그렇게 시대가 변하면서 침목이 구시대 유물로 남았다. 작가는 오랜 세월 바닥에 누워있던 침목을 일으켜 세워 사람 형상을 빗었다. 침목 인간이다. 시효를 다해 폐기된 사물이 새로운 용법을 얻었다고 해야 할까. 평소 나무건 돌이건 석탄 덩어리건 그 속에 잠재된 형상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최소한의 손길만으로 침목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물성 그대로를 간직하면서 사람 형상을 암시하는 침목 인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작가가 빗어 만든 사람들이 철길을 따라 서 있다. 침목으로 만든 사람들이 침묵하면서 서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침묵하는가. 그들의 침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때로 침묵은 말보다도 더 적극적인 발화행위일 수 있다. 오랜 세월 철길과 함께했던, 철길을 오갔던 사람들의 삶을, 추억을, 회한을, 희망을, 사연을, 역사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시대의, 역사의 증언자라고 해야 할까.
기차: 이이남
이이남. 미디어 파사드. 벽면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으로 스크린을 확장한, 화이트큐브로 대변되는 미술관 중심의 전시관행을 바꿔놓은, 흐르는 영상으로 도시의 밤 풍경에 판타지를 더한 빛의 예술이다. 주로 건물 외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이지만, 막힌 벽이 있는 모든 곳이 스크린이 된다. 여기에 빛의 예술인 만큼 충분하게 어둡기만 한다면 허공과 수면을 포함한 사실상 모든 곳에 영상을 투사할 수 있다. 그렇게 세상 자체가 영화관이 될 수도 있다. 영화(영상)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영화(영상)가 되는,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가 예견한 스펙터클 소사이어티 그러므로 구경거리로 넘쳐나는 사회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역사에 멈춰 선 기차 내부를 이런 미디어 파사드로 꾸몄다. 바닷물결 위로, 바람길을 따라, 보기에 따라선 허공에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그 사이로 유전자 DNA와 신경망 시넵스와 같은 생체정보에서 따온 알파벳과 기호들이 흐른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태환경이 열어놓을 미래와 함께, 꽃 천지를 보고 꽃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군초소: 강홍구, 조신욱, 황태하
강홍구.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 홀로 존재한다. 자존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고독한 존재를 증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세계란 점에서 역시 고독한 존재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나는 섬이다. 너는 섬이다. 존재는 섬이다. 정작 작가는 무인도라고 했지만, 오히려 고독한 존재에 더 걸맞다. 그 섬에도 뭍에서처럼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든다. 그렇게 자존적인, 그래서 고독한 섬이지만, 때로 나는 너라는 섬이 그립다. 그래서 섬과 섬을 연필로 이었다. 현실이라면 다리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문학이 아니라면 건널 수 없는 다리다. 그렇게 나는 너라는 섬에 가고 싶다. 사실은 잃어버린, 잊힌, 전설처럼 아득한, 나라는 섬에 가고 싶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사람들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을 섬 하나를 상기시킨다.
조신욱. 작가는 책가도를 그렸다. 요새로 치자면 책장이다. 책장에는 책과 함께 새가, 연꽃이, 꽃신이, 복주머니가, 배가, 기차가, 집이, 섬이, 바다가, 하늘이, 강아지가, 선인장 화분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풍경이, 사물과 풍경의 아이콘이 전시돼 있다. 책장을 열면, 책 속에 거주하는 사물들이고 풍경들일 것이다. 작가가 꿈꾸는 또 다른 세상이고 풍경일 것이다. 분더캄머다. 호기심의 방, 혹은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한 방이라는 의미로, 이후 박물관과 미술관이 유래한 개인 컬렉션에 해당하는 말이다. 꼭 진귀한 물건이 아니더라도, 평소 작가가 꿈꾸는 일상, 여행, 추억, 그러므로 세상의 풍경을 아이콘으로 수집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당신은, 당신도 꿈을 꾸는가.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꿈을 상실한 시대에 다시, 꿈을 꾸게 만든다. 그렇게 잃어버린 꿈의 안부를 묻는다.
황태하. 가로수 아래 수북한 낙엽들, 아스팔트와 시멘트 바닥 틈새로 삐죽 고개를 내민 잎새와 풀. 보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름이 있으면서 이름도 없는 것들이다. 작가는 그런, 흔한 것들을 그린다. 의식이 간과하고 있는 것들을 그리고, 인식이 놓친 것들을 그린다. 흔해서일 것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미물이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 모두 흔한 존재들이고, 귀한 미물들이 아닌가. 당신은 언젠가 길바닥에 쪼그려 앉아 여린 풀잎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작가는 미풍에도 파르르 떠는 여린 풀잎이 열어 보이는 다른 세계를 그리고, 그 다른 세계가 주는 위안과 치유를 그린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집을 적시하는 것으로 제목을 대신했다. 존재 증명이다. 그렇게 이름조차 없는 것들에 눈을 맞추면서 의식 속에서 하나의 의미가 되게 만든다.
삼선초소: 박은선
박은선. 작가는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들어있는 이중그림에, 소설로 치자면 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이 들어있는 액자소설에, 그러므로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서사에 관심이 많다. 작가의 작업을 그림에서 랜티큘러로, 그리고 재차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이 경계를 허물어 넘나드는 설치작업으로 확장하는 핵심 개념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자체 움직이는 시간, 움직이는 시선, 그리고 틈으로 나타난 주제 의식과도 통한다는 생각인데,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이 중첩된 것은 시간이 움직이기 때문이고, 이미지 속에 또 다른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것은 시선이 움직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차원과 다른 차원 사이에 주어진 틈(그러므로 경계)에 주목한 결과일 것이다. 틈에 대한, (탈)경계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유리창에 붙인 스테인드글라스 필름을 통과한 은근한 빛의 질감을 끌어들여 안과 밖이 서로 통하게 하고, 공간에, 벽돌과 벽돌 사이 틈새에 장착한 거울을 통해서는 그때의 장항과 지금의 장항이 서로 반영하면서 하나로 만나게 한다.

김범수_Beyond Description-서술을 넘어서
영화필름, 아크릴box, LED조명, 210x120x10cm

김태은_기억의 파동 Waves of Memory
PC, programming, webcam, monitor, sound, proje~

박안식_균형 balance
figure, 30x30x30cm, 스테인리스 스틸, 우레탄 도장, 2022

박은선_Another Angle
mirror, Installation, 2025

성동훈_소리나무-희망의 바람
490x590x580(H)cm, 무게 3-4톤 용광로 금속, 세라믹~

엄익훈_그림그리는 소녀 a drawing girl
35×52×50.5(H)cm steel, LED, urethane, pai~

유은석_배 위의 오두막집
100x50x70cm, 포맥스, 아크릴릭, 2020

이세현_Beyond Red-024MAY03
Oil on Linene, 200cm x 200cm, 2024

이이남_호흡하는 플랫폼
two-channel video, color, sound, 가변설치, 2023

정현_서있는 사람 Standing Man
침목·300×75×25㎝·30개, 2001~2006

조신욱_배가 있는 책가도
Acrylic on Canvas, 60.6x60.6cm, 2025

황태하_자손들
캔버스에 유채, 90.9x65.1cm,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