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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빛 - 내금강



조은정 | 미술평론가,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교수




금강산을 그려온지 15년째, 이제서야 작가는 60여년 만에 자태를 드러낸 내금강에 이르렀다. 작가는 어느 날 ‘우연히’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갈 수 없는 곳 금강산의 자태를 보고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진집을 보고, 자료 필름을 보며 직접 가보지 못한 금강산을 그려내었다. 접근 방식으로만 보자면 ‘몽유금강’이랄까.
내,외금강으로 이루어진 금강산을 사진으로만 접할 수밖에 없다가 외금강에 발을 디딘 후에는 그가 시도때도 없이 금강산에 찾아들었던 것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동해항에서 배를 타고 떠나던 금강산여행이 버스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된 최근까지 외금강을 드나들던 때로부터 다시 5년이 걸려 작가는 내금강에 이르렀다. 2007년에 북한은 비록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해야 하지만 내금강 일부를 남한의 관광객에게 공개한 것이다. 10년을 넘게 기다려온 금강산 답사 이후 내금강에 이르기까지 다시 5년이 걸렸으니 꿈에서 그리던 곳에서 외양을 돌다가 그 안에 들어가는 단계를 밟아야 했던 작가의 금강산 여행과정은 구도적 시간의 경과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금번 ‘금강산의 빛-내금강’은 크게 세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지난 해 ‘금강산의 빛’에 이은 전시임을 드러내는 것 둘째는 금강산을 통하여 북한의 세상을 향한 문열기가 어디까지 와있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인 것이다. 셋째는 하나의 소재에 천착한 작가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에서 우주의 모든 형상을 지닌 대상으로서 금강산을 탐구하고 조형적인 작업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전통적인 그림그리기의 즐거움을 놓지 않는 작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왜 금강산인가
신장식은 전통에 탐닉하는 작가이다. 88올림픽 행사의 소품을 챙기던 일을 계기로 확고한 색채, 정감있는 형태의 전통 기물의 아름다움에 눈떴던 그의 화면은 한마디로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 그래서 1993년, 그의 눈에 금강산이 들어온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전통의 색채, 형태, 조화의 원리를 찾아가는 작가에게 금강산은 옛 선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 경험을 화면에 풀어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전통 기물에서부터 금강산으로의 소재 전환은 선인들이 금강산을 즐겨 그렸기에 ‘전통’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과거를 ‘유물’로 다루는 태도에서부터 인간이 깃들 수 있는 산을 표현함으로써 완상을 경험으로 공유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과거를 하나의 유형으로 기억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전하는 것으로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한 경험으로서 금강산이 자리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활 속에 금강산이 하나의 코드로 각인된 탓이다. 누구나 가본 곳은 아니지만 가본 듯이 여기는 산, 모든 우주의 질서가 조형화된 산이라는 믿음으로 형성된 곳, 과거 뿐만 아니라 분단으로 길이 막히기 전까지 모든 이들이 유람하기를 소원하였던 곳으로 유무형의 민족 공통의 경험이 반영된 곳이 바로 금강산인 것이다.

“한 목공 아저씨가 두 손으로 움켜잡을 정도의 마른 솔잎을 뾰족한 부분을 모두 위로 향하게 한 다음 실로 묶어 바닥에 세워 놓고 목공소에서 늘 아교를 끓이던 화롯불에 납을 녹여 그 솔잎 묶음에 부으면 납이 흘러 솔잎 사이사이를 따라 굳어지면서 광채를 발해 뾰족하게 치솟는 금강산의 수정봉이나 만물상처럼 변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물론 금강산을 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광경을 구경하던 목공들이 ‘금강산이다, 금강산!’ 하고 찬탄을 발하던 기억이 일생을 두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모형 금강산은 아마도 그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 완상의 대상이되었던지, 몇 차례 똑같은 장소에서 금강산을 다시 만드는 것을 지켜 보곤 했다.”(『미술사와 나』, 열화당, 2003, 116-117쪽)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골산인 양(陽), 토산인 음(陰)의 조화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역의 원리로 우주의 모든 것을 표현하였던 성리학적 사고가 반영된 그림이란 것을 밝힌 유준영 교수의 어린 시절 경험담은 주목할만한 사실을 전한다.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모든 이들조차 금강산의 절경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금강산 모형이 거래될 정도로 완상의 대상이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정황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고려시대 불화나 조선시대 진경산수에서 또는 조선말기의 민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금강산이지만, 반세기 전만해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가보지 않고도 아는 듯이 여기는 산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민족 공통의 정서에 금강산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분단 이후 신장식의 금강산 그림은 ‘정서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있는 것이다.

금강산 유람의 경험이 있는 소정 변관식은 금강산의 절경을 여러 점 남겼다. 그의 금강산은 스스로 여행을 통해 보고 겪은, 자연의 대상을 체험한 결과 느낀 웅장함이나 바위의 울퉁불퉁함까지 배어 나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의 금강산은 자연과 맞닥뜨렸을 때의 경험이 강하게 투사되었다는 점에서 진경산수에 가깝다. 이당 김은호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금강산 그림에도 이당 자신의 자연에 대한 해석의 시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들은 모두 ‘산수’라는 하나의 장르로서 금강산을 화제로 삼았고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벗어나려는 근대 산수의 한 경향을 보여준다.
현대 화가로서 각종 <화보>를 통해 ‘산수’의 전형성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금강산을 그리는 신장식의 방식은 산수와 풍경의 경계에 있었다. 가보지 않은 장소를 그림에 있어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의 시선으로 고정된 사진자료와 영상물 그리고 조선시대 기행문화의 결실인 금강산 그림들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 금강산 그림은 개인의 체험적 시선이 강하지만 산수화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기 이전의 사진자료들은 일제강점기의 것은 조선의 땅을 대상화시킨 시각이나 이후에도 관광을 위한 정형적 시선에서 생산된 것들이 대부분인지라 작가의 경험이 들어설 곳은 적다.





이렇게 자유로울 수 없는 시각을 작가는 ‘장식적인’ 방식으로 금강산을 표현함으로써, 경험하지 않은 공간 표현에 대한 구속에서부터 벗어나려 한 듯하다. 1993년의 금강산은 내게는 일종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였는데, 아마도 굵고도 짙은 청색선으로 이루어진 형태 때문일 것이다. 1998년도의 금강산은 민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리 모나지 못하지만 반복적인 형태의 골산으로 이루어진 금강의 일면을 취하고 있어 전통에 기댄 장식성을 보여준다.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게다가 서양화가인 신장식이 금강산에 전념하는 것은 일종의 탐닉이었다. 모두가 아는 곳이지만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하였기에 표현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동경과 이의 표현에 대한 시도는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높은 산의 정상을 향하는 산사람의 욕망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산사람이 산의 높이를 알아내고, 기후를 측량하며 베이스 캠프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위로 향하는 것처럼 신장식은 금강산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금강산의 정경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화면으로 옮겼다. 마음 속의 산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흉중구학(胸中丘壑)의 정신이기에 그의 금강산 방문 이전의 그림들은 ‘산수’에 가까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한정된 기간 안에 허락된 위치에만 이를 수 있지만 금강산을 직접 답사하고 난 뒤의 금강산 그림은 이전의 것과는 다른 면을 보인다. 경험 이전의 금강산은 생명력과 연관된 이른바 ‘기운생동’의 정신을 추구했다면, 금강산을 보고 난 뒤의 그림들에서는 비록 아무리 푸른색 테두리로 둘러 있더라도 바위면에 부딪치는 햇살을, 골골에 비집고 올라오는 나무의 생생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산수에서부터 풍경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졌던 때문이다.

지난 15년간 신장식이 그려온 금강산은 관념에서부터 실경으로의 전이과정을 겪은 것이다. 먼저 옛그림을 통해 대상을 보고 그리는 법을 연습한 후에, 실지 산을 보고 관념의 산과 실지의 산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산을 그려내었던 옛 화인의 방식으로 금강산을 그려나간 것이다. 즉 현대적인 ‘풍경’으로 경험을 선두에 두지 않고 ‘산수’로서 금강산을 해석한 후에 증명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에 귀납적인 해석의 금강산이 되었다. 오랜 세월 민족의 영산으로서 금강산을 다룬 이유에 해당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시대 신장식의 금강산 그림이 예부터 존재해온 소재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전통, 북한 지역에 소재한 탓에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분단 현실, 그리고 실재 자연 대상을 오랜 세월 화가들이 끊임없이 조형적 시도를 해온 대상이라는 점에서 현대 한국 화가의 정통성에 맞닿았다는 점을 상기하니 왜 그의 금강산 화면이 이토록 눈부신지 알 듯 하다.




내금강의 빛
그동안 바닷길에서부터 육로에 이르기까지 경험한 금강산은 실은 외금강이었다. 말하자면 금강산의 외양인 것이다. 금년도에 내금강 길이 열리고 누구보다 먼저 그 소식을 먼저 듣고 준비하던 그는 당연히 그 길에 닿았다. 신계사 공사현장을 방문한 지인이 카메라에 담아온 외금강의 일부만을 보고도 작가가 그곳이 어느 위치에서 본 어느 지점인지를 정확히 말해 필자도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발빠른 그는 주지스님도 출퇴근하는 그 신계사 요사채에 머물며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궁리를 해보기도 하였으니 ‘금강산인’이라 할 만하다.

<내금강 만폭동>은 6월 1일 보았던 초하의 내금강 전경이다. 널찍한 바위절벽 사이사이에 신록이 청청하다. 표훈사에서 들어가는 초입에서 잡은 전경은 조선시대 만폭동을 그린 산수에서 흔히 등장하는 비로봉은 없다. 새가 되지 않고 땅에 안착한 작가의 시선은 앞산에 가려 비로봉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멀리 시선을 두어 금강산 전체를 조망하던 관점에서 눈앞에 드러난 사실에 충실하려는 것이 내금강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임을 알겠다. 기운생동의 사물에 대한 진실 표현이 아닌, 눈에 보인 그대로의 사실을 표현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작가는 널찍한 바위 사이사이에 무한한 큰 바위에 비하면 왜소하기 짝이없는 인간들을 그려넣었다. 그들은 가로로 무리지어 있기도 하고 줄서서 올라가기도 한다. 이들의 알록달록한 등산복은 녹색의 신록과 짙은 황토색의 바위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점점이 흩어진 다양한 색깔로 그들이 이질적 존재임이, 하지만 그곳에 작가 또한 있었음을 강하게 드러내준다. 골산과 토산 대신, 드러난 바위와 우거지기 시작한 숲을 그대로 옮겨 보여줌으로써 그곳에 돌이 있음을, 돌들 사이에도 흙이 있음을 인식시킨다. 사선으로 떨어지는 밝은 빛과 그늘은 금강산 유월의 양광 아래 그 바윗돌 사이로 관람자를 이끈다.

변관식의 <보덕굴>은 아래서 올려다본 나무로 만든 누각이 아득하다. 양쪽의 바위에 낀 목조건물 위로 산세가 뻗어나가고 있어 건물 좌우의 바위는 상하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로 여져진다. 신장식의 <보덕굴>은 우선 화면을 가로로 채택하고 있어 위아래를 생략하고 보덕굴에 집중하고 있다. 이제는 건물이 낡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건물의 모습은 변관식 기억 속의 것과 흡사한 모습이다. 하지만 실경보다는 분명 죄우가 넓게 표현되어 보덕굴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붉은 바위가, 우측에는 연둣빛의 나뭇잎이 보덕굴을 감싸고 있는 듯이 표현되었다. 따라서 실경의 재현보다는 작가의 해석이 강하게 작용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산과 숲과 집의 조화를 통해 3태극을 인식하였고 이를 천지인으로 해석하였고, 조형적으로 바위에 적색을 더하고, 집을 푸른색으로, 나무에는 노랑색을 더 넣어 황색을 구현함으로써 색상으로 3태극을 나타내 결과적으로 천지인의 조화 즉 농사를 잘 지어야 행복한 풍요를 그림으로 나타냈다고 했다. 남성적인 외금강에 비해 여성적인 내금강을 부드러움에서 행복을, 농경사회의 행복인 풍요로 해석해 낸 것이다. 남성적 세계관인 전통의 산수가 이념적인 것이라면 신장식의 풍경은 실경에 전통의 의미를 더하여 여성적인 풍요와 아우름을 표현해 내었다는 점에서 진경산수에 접근하고 있다.



고려시대 나옹화상이 거대한 부처상을 바위에 새겼다는 <묘길상>에서는 크기가 아주 큰 불상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군상을 그려넣고 있다. 열심히 절을 하는 사람과 토론하는 사람, 사진찍는 사람 등 묘길상 앞에서 포착된 인간들은 황톳빛 불상과 대조적으로 알록달록하다. 사람들의 크기는 불상에 비해 결코 작은 편은 아니지만 밑바탕색이 배어나듯 표현하고 위에 색채를 가하였기에 이들은 눈에 두드러지게 거슬리지 않는다.

울퉁불퉁하지만 가지런한 바위의 미묘한 질감을 표현해내기 위해 바탕 마련에 더 공을 들인 이 작품 앞에서 부처님 손에 떨어지는 밝은 빛과 가녀린 그림자의 뚜렷한 비교를 통해 부처님 손에 비치는 빛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하지만 이내 불상의 어깨가 비뚤어졌고 몸체에 비해 얼굴의 크기가 아주 작은 것을 발견한다. 멀리서 새가 되어 묘길상을 바라보던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불상에 비해 인간이 하염없이 작았다. 실지로 묘길상은 과장없이 표현했을 때 그만큼 크다. 그런데 조선시대 그림보다도 부처상의 크기가 작아지고 상대적으로 인간이 크게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래서 경외의 마음으로 부처님을 바라본 작가의 경험이 투사된 결과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재빠른 스케치를 하는 그의 눈앞에 다가온 것은 강한 햇살에 두드러진 부조의 부처님 가슴께에 결한 미타인이었음을, 정토를 상징하는 그 수인이 강한 인상을 결정지웠을 순간을 가늠하니 진경으로 다가선 묘길상을 만나보게 되는 것이다.

<마하연에서 바라보다>에는 작가의 구도자적 시선이 관여되어 있다. 마하연은 예부터 많은 스님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우리 시대 깨달은 분으로 알려진 성철스님이 젊은 날 정진하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마하연에서 바라본 산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을 것이므로 정진하던 수도자들이 바라보던 그 모습이다. 작가는 수도자의 눈에 비친 내금강의 모습을 드러내보인 것이다. 풍경이 수도자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하여 작가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연둣빛 화사한 나무들과 푸르른 하늘 사이에 약간 드러난 바위산. 작가는 마하연에서 바라본 산에서 연둣빛이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경험을 일러 생명력을 느꼈다고 했는데 필자 생각에 사방의 물상을 에너지로 파악하는 수행자의 길을 작가는 그림이라는 수행도구를 통해 접근해간 듯하다. ‘내금강의 빛’은 바로 그러한 생명력, 스스로 밝히거나 해를 통해 드러나는 물상의 본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금강산의 빛
외금강은 여전히 그의 탐구 대상이다. 특히 금번에 금강산의 사계를 외금강에 담았다. 스스로 경험한 외금강의 사계이기에 개골산, 풍악산 등으로도 불린 금강산의 본질에 더욱 다가가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다.
<옥류동에서 바라본 천화대>는 겨울 풍경이다. 갑자기 내린 눈에 높이 솟은 바위산의 끝부분에만 눈이 묻어 있고, 낮은 지역이나 물이 있는 계곡은 눈이 녹아 산세의 형세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골산에만 눈이 남아 있어 결과적으로 골산을 더욱 골산으로 보이게 하고 토산의 어둠이 더욱 강하게 대조되어 있다. 하지만 작가가 화면에서 시도한 것은 ‘대비’가 아닌 ‘조화’임이 분명한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청명함을 강조하는 골산의 흰색에 짙은 녹색 토산이 그대로 맞닥뜨린 것이 아니라 짙은 바위 그림자를 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와 숲의 조화, 빛과 그림자의 조화는 바로 음과 양의 조화로 이어져 부드럽게 감싼 토산의 숲과 중앙에 융기한 바위산에도 점점이 존재하는 나무를 통해 상호 함께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만물상>은 2월말, 겨울에서 일어나는 봄의 금강산 모습을 담은 것이다. 옛그림에서 보이는 만물상의 기묘함보다는 떨어진 빛의 골선과 그림자의 면을 통해 형태를 구현하려는 방식은 세잔느의 생트 빅투아르 산의 표현과 같은 구축성을 지향한다. 눈에 보이는 형태가 산의 본질로 인식하지 않는 동양적 전통은 동양화의 준과 기운생동을 바탕으로 하여 여기에 빛을 더함으로써 전통과 현대적 의미를 아우른 형태를 구현함에 이르는 원동력이 되었다. 금강산의 진면목을 작가는 과학적인 원리로 해석할 수 있는 빛과 관념적인 산의 표현인 붓의 용세로 나타낸 것이다. 가을 풍경인 <옥류동의 가을>은 우점준을 바탕으로 하여 조화로운 낙엽을 연상시키는 바탕에 점점이 알록달록한 가을의 정경을 표현하였다. 화사한 색채와 준법의 조화는 가히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한편 <삼선암의 비>는 장마철의 삼선암을 표현한 것으로 눅눅하고도 습윤한 대기를 짙은 선염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채색 계열을 택함으로써 겸재의 <인왕재색도>에서 보인 안개와 물기를 머금은 바위가 비온 전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반면 <삼선암의 비>는 하늘과 숲 사이에 바위가 위치한 상태에서 각각 비를 머금은 흔적을 자연의 본질적 성격과 연관지어 해석해가고 있다.
신장식의 화면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한국 현대미술이 추구해온 또 하나의 전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것’다운 것을 위하여 그는 한지 위에 수용성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옛 방식을 존중하여 캔버스 위에 닥종이의 원료를 종이를 뜨기 전의 상태에서 발라 건조시켜 바탕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서양과 동양의 교묘한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우리적인 느낌’을 가시화하였다. 먹을 상기시키는 짙은 청색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붓의 터치를 마치 동양화의 준(峻)처럼 짧게 끊는 방식은 바탕이 우둘투둘한 탓에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화면에 마띠에르를 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이른바 화강암 같은 바탕의 질감에 서양화의 재료를 이용하되 동양적 정신을 담는 것, 이를 일러 새로운 시도라 하기는 어렵지만 색의 더하고 덜함의 조화까지 모든 행위와 과정을 통한 중용의 실현은 새로운 시도임은 분명하다.
광화사(狂畵師)가 아닌 생활인이자 우주의 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정신세계를 수양하는 덕목으로서 예술을 대하는 태도는 전통적인 회화관에 입각하여 그의 작품이 생산되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회화관의 실현은 학생시절 함께하였던 유시민 의원의 말처럼 그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건전한 시민으로서 동시대인과의 폭넓은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바로 건전한 시민이기에 금강산에 천착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 생활인으로서 현실적인 작가의 생활상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힘이 되고 있다. 금강산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조형적 원리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정진하는 방식은 선인들이 예술을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게다가 금강산이 남과 북이 함께하는 유일한 장소가 됨으로써 통일의 상징으로 부상한 이때, 금강산이 지닌 다면적 의미를 간과할 리 없는 그의 화면에서 알록달록한 등산복의 사람들이 분주히 걸음을 떼는 것은 내금강, 그곳에 오늘도 양광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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