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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 Flying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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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는 회화 

글: 김보라

박재영의 그림은 '연결하는 회화'다. 이 개념은 구마 겐고(隈硏悟, Kengo Kuma)의 책 『연결하는 건축(つなぐ建築)』에서 착안한 것이다. 3.11 대지진이라는 재난 이후 출간된 이 책에서 건축가 구마 겐고는 부수는 것보다 연결하는 것,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연결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정치사학자, 도시계획가, 소설가 등 여러 분야의 인물과 대담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역사,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논한다. 이처럼 근래에 박재영 역시 회화를 통해 다양한 층위의 연결을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은 도시와 자연, 과거와 미래, 인간과 비인간을 연결한다.

박재영의 회화는 도시 공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인천공항과 목포항만 등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이자 건설사 임원으로 활약한 그의 과거 경력과 연결된다. 건축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그림을 동경해오던 그는 2012년 즈음 본격적으로 회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가 본래 화가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Charles-Edouard Jeanneret)였으며,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건축의 본질을 줄곧 회화에서 찾았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르 꼬르뷔지에가 화가에서 건축가로 변신했다면, 그는 건축에서 출발하여 화가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동안 전시 『Urban Fantasy』 등을 통해 회화 예술의 결실을 꾸준히 발표해왔으며 이번 제3회 개인전 『Flowing City』에서는 2018년 이후 작업한 3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예술 창작의 규범이 나의 외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현대미술의 핵심 명제를 일찍이 체감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초기부터 '나만의 새로운 표현'에 대해 고민하면서 다양한 회화적 실험을 모색했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오랜 세월 건설업에 종사했던 인생 경험이 자연스럽게 회화에 녹아들었다. 평소 건물을 바라볼 때 특정 형태가 지닌 선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는 그의 예민하고 원숙한 감각으로 도시 공간 속 건축의 면과 선이 포착되고 화면 위에서 해체, 재구성되었다. 2017년에서 2018년 사이 그려진 회화를 보면 건축물 외관과 내부, 조감도와 입면도의 시점이 혼재되어 캔버스 평면에 펼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사장 크레인, 골조, 창문이 그려지기도 하고, 전기 배선과 회로 등 설계 도면의 기호와 요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종종 인물 형상이나 실루엣이 나타나지만 대개 도시 공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드물게는 화면 속 형태가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롯데타워 같은 구체적 건축물을 암시하기도 하나, 특정 장소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화가 개인의 삶에 대한 반추 속에서 끌어올린 기억의 이미지인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성실하게 전개해온 회화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이렇듯 도시 공간이라는 커다란 주제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몇 가지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추상 작업이 강화되고 있는 점이다. 더불어 화면 안의 조형적 요소가 더욱 풍부해지고, 반면 색조는 단순해졌다. 한때 노랑, 빨강, 파랑 등 밝고 선명한 색감이 지배했던 화폭은 단색조에 가까운, 저채도의 화면으로 변화해간다. 도시 공간의 형식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던 회화 작업이 관념적 도시 풍경 또는 도시의 이면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 에 등장하는 구절을 가져와 얘기하자면, 전시 『Flowing City』의 근작 속에서 "도시는 형태를 찾는,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들의 망"을 제시하고 있다.

전시 작품 중 하나인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2019)를 보자.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 이 그림은 이상향을 주제로 한다. 가로 폭이 긴 화면 형식과 제목 자체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15세기 안견의 그림이 안평대군의 꿈에 나왔다는 무릉도원을 그렸던 반면, 21세기 박재영의 회화는 제목과는 역설적이게도 단순 유토피아적 이미지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주조색이 회색인데다, 기암절벽과 높은 건축물, 모더니즘의 대표적 상징이기도 한 그리드, 여러가지 기호가 혼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작품 이외에도 이번 전시 출품작을 살펴볼 때 전반적으로 회색과 흑백조 화면이 두드러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종의 그리자이유(Grisaille) 작업인 것이다. 그리자이유란 중세 이래 이어져 온, 회색으로 그리는 회화 기법을 칭하는 미술사 용어다. 현대의 대표적 사례로는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가 1967년에 시작한 「Gray Paintings」 시리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리히터의 회색 화면이 중립 상태와 거리 두기의 태도를 연상시켰듯이 박재영의 회색 회화도 그렇다. 그리자이유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회색 화면은 형태에 대한 집중감을 높이며 회화에 대한 개념적 접근과 연결된다. 회색 회화는 그만큼 화가가 그리기의 문제와 회화 자체에 천착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지만 리히터의 회색이 흑백 사진으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되는 데 비해, 박재영의 회색 혹은 흑백 화면은 작가 인터뷰에서 확인된 것처럼 우리 전통 산수화나 수묵 전통에 닿아 있다는 차이점 또한 짚어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Brave New World」나 「Moby Dick」 시리즈처럼 소설에서 온 작품 제목이 눈에 띈다. 이러한 회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문학과의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들고 이야기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대를 앞선 놀라운 통찰로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올 위기를 경고했던 헉슬리나 자연과 인간의 끈질긴 투쟁을 그려낸 멜빌의 소설을 떠올리며 그림을 읽게 되는 것이다. 두 문학 작품이 추상 회화를 통해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살피는 일도 흥미로운 감상법이 된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바이러스로 변화한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전 세계적 위기를 겪으면서 인간 문명이 초래한 문제점들을 되돌아보고 생산과 소비에 가치를 두었던 지난 삶을 반성하게 하는 현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새 화면은 점차 회색조에서 벗어나고, 생동감 넘치는 표현의 변주와 밝은 색채가 가미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불안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고자 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전 그림에서 두드러졌던 철제 구조나 건물을 연상시키는 패턴, 그리드 구조가 여전히 출현하긴 하나 부분적으로 발견될 뿐이며 가장 최근에 그려진 작품에서는 오히려 유기적 형상이나 곡선이 돋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최근 회화는 작가 개인의 감성적 레이어가 겹겹이 쌓인 일종의 내면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전 회화에서 건축물의 패턴이나 도면의 기호 등 형식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화면을 보여주었던 작가는, 근래의 그림을 통해 도시 공간에서 펼쳐지는 여러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이와 함께 화면의 깊이감은 더해지고 회화적 표현의 스펙트럼이 더욱 폭넓어졌다. 대나무, 장독대, 기와, 도자기 등을 연상시키는 전통적 조형 요소나 부호, 문자가 도입되는가 하면, 동양 산수화의 필치가 엿보이기도 한다. 또한 붓이나 나이프를 활용하여 물감을 두텁게 바른 후 긁어내거나 지우는 방식으로 다채로운 화면 재질감을 자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났는가? 어쩌면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귀결이라 판단된다. 다시 말해 추상의 세계가 그 깊이를 더해가면서 화가의 붓이, 그리고 팔레트가 지향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자신의 기억과 감수성이 침잠된 화면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연결한다. 회화는 현상적 분석에서 내면의 종합적 사유로 전환되고, 도시에 내재된 생명성을 불러내는 작업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도시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성장하고 변화하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앞으로 그의 회화 예술도 계속적으로 확장하고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연결하는 회화'라는 개념은 회화를 주어로 상정함으로써 그 행위 능력(agency)에 주목하고자 하는 관점을 투영한 것이었다. 그림은 화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 채 감상자와 만나는 하나의 행위 주체다.

우리는 전시 『Flowing City』를 통해 오랜 세월 3차원 공간에 엄밀하게 형태를 구축했던 건축가가 이제 화가로서 2차원 캔버스 위에서 보다 풍성한 표현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회화에서 보이는 자유로운 이미지와 환상적 분위기는 그가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붓을 드는 이유를 헤아릴 수 있게 만든다. 아마도 화가 박재영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고개를 깊이 끄덕이지 않을까. 그림 작업에 매료되었던 시인 헤세는 말했다. "그림은 당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하고, 보다 인내심 있게 만드는 경이로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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