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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지금

  • 전시분류

    순회

  • 전시기간

    2021-08-20 ~ 2021-09-18

  • 전시 장소

    d/p

  • 유/무료

    무료

  • 문의처

    dslashp@gmail.com

  • 홈페이지

    http://dslash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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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어지고 일어나는 일들이 시시각각 타임라인에 중계된다. ‘지금, 여기'를 향한 추동은 유행이나 트렌드보다 빠르고 일시적인 문화 개념을 고안해냈고, 문화 전반으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좇아가야 한다는 압박이 잇따른다. 계속해서 유행하는 '지금, 여기'라는 말은 마치 전체 지도를 정확히 파악한 것만 같은 착각과 동시에 얼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장 유행하는 기획과 논의에 맞추어 작업과 전시가 만들어진다. 시의성이라는 명목하에 달리기 경주를 하는 모습이다. 먼저 해야 하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며 중요도를 판가름한다. 다만 시간이 지나, 과거에는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던 일들이 흔적도 없이 잊혀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이 경주의 이유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만약 일련의 것들이 단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라면, 실시간으로 느끼는 시의성의 부담이 일종의 환상이자 허구일 뿐이라면 한 방향으로 바삐 달려가고 있는 타임라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따름이다.



영국의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는 오늘날 문화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말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거주하던 런던에서 뉴욕으로 잠시 출장을 떠났을 때, 모두가 유행처럼 사용하는 해당 개념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다. 이노는 이 점에 착안해 ‘지금’이라는 말을 좀 더 연장하고 확장함으로써 그것이 유행을 좇는 압박이 아니라 역사를 꿰뚫는 개념이 되기를 제안했다. ‘긴 지금'은 당장 중요하다고 여겨지거나 쓸모없다고 폄하하는 판단 기준을 뒤바꾼다. 



이 전시는 ‘지금’이라는 개념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는 작품을 선보인다. 이현종, 전혜주, 정재경, 전혜주 네 명의 작가들은 논의하는 시간의 범위를 달리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활동하는 미술계라는 세상 역시 다양한 영토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지금’이라는 말 만큼이나 미술계 역시 모두 판이한 배경과 맥락에 놓여있으며 그에 따라 각자가 추구하는 시의적 담론들 또한 다르다. 작가마다 다른 배경과 ‘긴 지금’을 다루는 태도의 다양성은 전시 주제에 어울리는 동시에 이를 확장한다. 



이현종 작가는 시간과 장소에 대한 믿음의 허위성을 지적한다. 전시장 d/p가 위치한 건물은 1세대 주상복합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악기상가인 낙원상가로, <잼앤쿡 [DSL-JNC21]>은 정말 당시에 울려 퍼졌을 법한 사운드를 제작해 과거의 증거품으로 기능한다. 마찬가지로 그때 유행했던 음악과 패션, 과거를 증명하는 듯한 소품인 <파고다 고-고!>는 우리가 으레 믿는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는 과거를 알리바이로 할 뿐 이제 막 새롭게 만든 가공된 역사다. 이렇듯 긴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하릴없이 다뤄질 수 있다면, 현재 열심히 만들고 따라가는 일들이 얼마 뒤에는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허무한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아직 한 세기 남짓한 현대미술이, 추후 한 세기 뒤에는 어떻게 취급될지를 함께 고민했다. 지금 이렇게 열심히 만들고 감상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돼버리는 상상 말이다. 



다음으로 전혜주 작가는 개인이 감각하는 세상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을 두 점 선보인다. <Matter of Paradise>는 현미경이라는 다른 기관을 빌어야만 감각할 수 있는 미립자를 전시한다. 전시장 주변의 공간,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에서 수집하고 채취한 표본을 진열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타임라인을 제시한다. 자신의 세상에 빠져있다가 잠시 하늘을 올려보고 나면 기존 세상이 달리 보이듯, 전혜주 작가는 ‘지금’을 대하는 상대적 관점을 극단적으로 일러준다. 다른 작품인 <Tourist Gaze>은 실제 장소를 정보적으로 전달하는 서비스인 ‘구글 맵스’를 변용해 일부러 오류를 만들어낸다. 표준이나 상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정보와 사실 간의 괴리를 인지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감각은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재경 작가는 15년째 재개발 예정지인 내곡동 헌인마을에 사는 유기견들을 다룬 <어느 마을>을 선보인다. 눈앞에서 떠돌아다니는 강아지에 대한 기록은 이윽고 다른 시간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 등 상상치 못한 논의로 연결된다. 당장은 하찮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확장되고 거대한 서사로 연관될 때 과연 우리가 지칭하는 ‘지금’ ‘여기’의 범주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버려진 강아지와 슬럼의 강아지를 일부러 죽여야 하는 사연들은 마을을 서둘러 개발해야 하는 사업자의 시의성, 하루 살기가 바쁜 유기견의 시의성처럼 다양하고 상충하는 가치들과 맞물린다. 다른 작품인 <기록>은 각종 물건을 모아 편집한 약 1만 2천 페이지 가량의 10권 연작이다. 책에 수록된 건 이른바 기념품이라 불리는 물건들로, 공동 역사와 개인적 허구가 상호 교차함으로써 거대한 타임라인이 상품화되고 일상에 유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소한 흔적이 곧 기나긴 역사와 동일시될 때 과연 우리가 현재를 판단하는 방식이 결코 순간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마지막으로 허수연 작가는 다양한 시간, 장소를 증명하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반죽한 다음 하나의 조각으로 만들어낸다. 여전히 작업의 재료들은 수많은 시간대를 가시적으로 가리키고 있지만, 도상학에 기반한 형상은 일방적인 의미를 제안하여 과정과 결과의 대조성을 강조한다. <기념비>는 시대를 증명하는 상징물을 도상으로 사용하여 여러 시간대에서 만들어진 재료를 단일 반죽으로 제작한 조각으로, 지탱하는 좌대를 박스로 감추어 작품과 공간, 인식과 상징 간의 알레고리를 만든다. 지금 당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의적 문제가 어떻게 합쳐지고 무엇을 남기는지, 그리고 단일하게 정리되는 의미의 간극이 작지 않다는 사실이 작업을 관통한다. 이렇듯 네 명의 작가가 서로 다른 태도로 상이한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는 이 모두는 ‘긴 지금’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나아가 전시 내에서 작품 사이에 형성된 관계는 지금 우리가 미술을 구분하는 기준, 그리고 각각의 미술계마다 언급하고 뒤쫓는 시의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기획자 최나욱은 신생 미술 공간 d/p의 기획지원프로그램 전시로서 시의적 주제를 제시해야 할 때, 역설적으로 시의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 주제가 오늘날 시의적절한 기획이 되기를 바랐다. 이는 지금 시대를 톺아보는 문제의식인 동시에 전시장이 위치한 종로구 낙원동 일대의 도시적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전시장을 출입하는 주요 동선인 낙원빌딩이 내부 공간 이용과 무관하게 50년 이상 자리를 지키며 형성한 맥락이란 상당히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문화의 거점이자, 지금은 다종다기한 인구 구성이 모인 이곳은 전시의 맥락을 안팎으로 확장시킨다. 그로 인해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찾아 미술의 어떤 논의를 떠올리고 있을 때, 정반대로 바로 주변에서는 이곳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이질적 특징이 전시 관람에 개입할 것이다. ‘전시’라는 제한된 시공간의 형식은 일련의 맥락과 함께 한층 더 풍부해진다.



전시 디자인에 있어서 이러한 맥락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장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는 송화색 커튼은 봄에 날아드는 송화가루처럼 익숙함과 낯섦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커튼은 전시장의 새로운 벽으로 기능함으로써 외부 맥락을 단절시키는 동시에 기존 벽과는 달리 전시장과 마주한 실버 영화관과 주변의 맥락을 환기시킨다. 또한 커튼은 기존 공간이 근대 건축물로서 강한 그리드를 띠는 기둥을 가림으로써 그들을 지칭하는 동시에 기존 규칙에 균열을 낸다. 



그렇게 조성된 공간 안에서는 좌대가 주요한 전시디자인 개념으로 활용된다. ‘긴 지금’이라는 시의성을 고려하는 주제를 제시할 때, 앞서 말했듯 한 세기 역사가 채 안 되는 지금의 미술 전시와 작품들에 대해 물음을 부쳐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에 미술이 아닌 것이 후대의 의도에 따라 좌대에 올라 미술로 기능하듯, 지금은 현대미술의 논의에 따라 당연히 좌대 바깥에서 제작되고 감상되는 작품들을 일부러 다시 좌대 위에 올림으로써, 현재의 미술이 다른 맥락에서 다뤄지는 가능성에 대해 미리 상상해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좌대는 서로 다른 관점과 매체로 제작된 작품들을 아우르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현대조각 담론과 함께 잠시 논의를 마무리했던 좌대는 그 위에 올라가는 다양한 매체들의 특징을 고려하고 제각각 설계됨으로써 새로운 논의로 연장된다. 



게다가 좌대라는 강한 상징물은 기존의 미술사적 논의를 함의하는 동시에, 그것을 발전시키는 한편 전시 자체에도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오늘날 너무 많은 타임라인이 수반하는 유동성과 다양성을 상기시키는 관점에서 좌대를 지대로부터 들어올림으로써 전시장에서 작품들이 표류하는 풍경을 설계한 것이다. 작가들이 ‘긴 지금’을 주제로 선보이는 책, 사운드박스, 수집한 표본, 영화 등 여러 작품들은 좌대에 올라 매우 중요하게 전시되는 동시에, 정박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며 동시대의 표류하는 문화를 연출한다.



전시는 <긴 지금>이라는 대조되는 말마따나 상이하게 여겨지는 개념을 오간다. 각자가 시의성을 따라 신경 쓰고 관심 갖는 타임라인을 다른 종류의 타임라인과 오래된 역사를 환기함으로써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고, 관람하는 공간 역시 독립된 전시장이 아닌 주변의 맥락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전시되는 작품들은 좌대와 함께 미술사 전반과 여러 가지 인식틀에 의심을 가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막연히 바라보고 따라가는 ‘지금 여기’에 대해 거리를 두는 자기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모두가 실시간으로 지금 일어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신경 쓰고, 나아가 피로함을 느끼고 있을 때, 여기에서 빗겨나가는 방식이 역설적으로 지금에 적합한 시의성이자 지금을 다루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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