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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사진작가 민병헌의 〈잡초〉시리즈 두 점

조우석

미술사학자 근원(近園) 김용준(1904-67)의 산문집 『근원 수필』을 간혹 들춰본다. 구수하면서도 격이 높기 때문인데, 초판이 나온건 48년도이다. 해방 직후 탄생한 출판사 1호 을유문화사가 그걸 펴냈다. 일제시대에 썼던 수필의 맛이 요즘 글과는 또 다르다. 당시의 글이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인데도 역시 근원은 근원이다. 근원이란 아호(雅號)에 얽힌 일화만도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데, 다 아시듯 그는 본래 ‘近猿’이라 썼다. 본인의 말로 “평생 원숭이처럼 남 흉내나 내다 죽을 인간”이란 겸손인데, 실은 서구 미술ㆍ중국풍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리라. 남들이 “점잖은 체면에 어찌 아호에 원숭이?”라며 말리자 그제서야 겨우 ‘近園’으로 고쳤다. 어쨌거나 그가 쓴 글 중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못생긴 두꺼비 연적에 필이 꽂혀 사들인 다음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툭 튀어나온 눈깔과 떡 버티고 앉은 사지(四肢)며, 아무런 굴곡이없는 몸뚱어리. 그리고 입은 바보처럼 헤 하는 표정으로 벌린데다가 입속으론 파리도 아니요 벌레도 아닌, 무언지 알지 못할 구멍 뚫린 물건을 물었다. 요즘 골동가들이 본다면 거저 준대도 안 가져갈 민속품이다. 그러나 나는 값도 물을 것도 없이 덮어놓고 사기로 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근원은 못난이 두꺼비 연적을 끼고 산다. 문갑 위에 올려놓았는데, 가끔은 자다 말고 일어나 불을 켰다. 멀쩡하게 잘 있는가를 살피고 요모조모 감상을 한 다음에 다시 눈을 붙이고 한다는데, 그 마음을 나는 조금은 알 듯하다. 새로 사들인 스피커나 앰프 등 오디오가 너무 사랑스럽고 신기해 내가 간혹 밤에 그 짓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주일이면 시들해지는 게 사람 마음인데, 세상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있다. 내게 그 물리지 않는 작품이 사진작가 민병헌의 작품 두 점이다.



구입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좋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눈길을 준 채 씩 웃곤 하는 게 그의 사진작품이다. 봉급쟁이 주제에 기꺼이 지갑을 열어 챙겨둔 나의 콜렉션은 그의 초기 작업인 <잡초> 시리즈 두 점. 기회에 확인하니 1996년에 제작됐다. 한 작품은 22개 에디션 중의 18번째이고, 다른 하나는 AP 10개 중 다섯 번째이다. 사이즈가 크지 않기 때문에 두 작품은 나란히 벽에 붙여 놓아야 제맛이다. 아파트의 회색 벽면에 눈에 두드러지지 않은 채 심심한 듯 붙어있으 면서도 항상 그 맛이 유지된다는 걸 나는 지난 10년 새 확인한 셈이다. 


아무리 보아도 콩깍지 낀 눈에는 내 콜렉션이 민병헌의 <잡초> 시리즈 중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쓸쓸하면서도 격조가 있고, 심심할듯하면서도 스타일이 살아있다. 시골의 농사용 비닐하우스에 기대어 자라다가, 말라비틀어진 말 그대로 잡초가 이렇듯 모던할 수 있다니 그게 신기하다. 발표 초기부터 그런 평가를 들었다지만, 20세기 사군자로도 손색없다. 작은 작품들을 꽤 여럿 사 모은 내가 좀 알지만, 1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질리지 않는다면 실로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서 들은 말대로 현대사진을 포함한 미술은 아직도 대중에게 멀지만, 그것과 사귀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갑을 열어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에 투자해보는 것이다. 그게 미대에서 몇 학점짜리 강의 듣는것보다 값진 경험이 될 수 있다. 지갑을 열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하겠는가? 작가의 장래성, 나중의 환금성도 따져보면서 숱한 그림을 그려볼 것이다. 그게 공부가 아니면 뭐가 공부일까? 어쨌거나 나의 경우 오래전 지갑을 약간 열어 챙겨둔 민병헌의 작품은 지금도 가장 친근한 사진, 질리지 않은 내 마음속의 미술이다.



조우석(1956- ) 서강대 철학과 졸업. 『서울신문』, 『중앙일보』 등에서 2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해왔으며, 2010년 서울언론인클럽 신문칼럼상. 2008년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고, 저서로는 『박정희, 한국의 탄생』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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