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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와 내가 누구인가?

서지문

에드바르 뭉크, 절규, 1893, 판지 위에 유화, 73.5×91cm, 노르웨이오슬로국립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뭉크의 <절규>를 처음 본 것은 대학 2학년 시절, ‘미술개론’ 시간에 슬라이드를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미술에서 ‘양’을 받을 만큼 재주가 없던 나는, 어머니께서 매해 막내인 나를 동무 삼아 국전을 관람하시고 집에 명화 달력도 즐겨 거셨기 때문에 까막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체로 무지했다. 미술개론은 필수교양과목이었는데 대부분 깜깜한 강당에서 슬라이드를 비추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산만했고 스치듯 본 그림들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뭉크의 <절규>를 본 것이다. 그건 미술에 대한 나의 인식에 큰 혼란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대학을 다녔던 1960년대 후반기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뿐 아니라 문화, 예술에서도 기존 관념과 질서에 대한 저항과 전복이 활발했고 시각적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주는 ‘현대미술’도 등장했을 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미의식을 헝클어놓는 현대 미학은 아직 출현 전이었다. 그때까지의 내게 예술의 목표란 미의 창조였기 때문에 그토록 흉측한 그림이 ‘명화’의 하나라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절규>가 인간의 보편적 내면의 표출이라는 것은 미술적 안목이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태산 앞에서 그저 막막했던 젊은이의 직관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40대에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서 <절규>의 실물을 보게 되었다. 슬라이드로, 멀리서 잠시 본 환영이 아닌, 붓질까지 보이는 듯한 실물을 보게 되니 오싹하는 전율과 함께 어떤 미(美)의 충격을 느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반드시 예쁨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경험적 진실로 습득하는 순간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감상 후 특별히 끌렸는 그림은 복제 포스터를 사 오곤 했지만, <절규>의 포스터는 망설이다 사지 못했다. 아무리 대단한 명작이라 해도 그토록 불안과 좌절과 공포에 소스라치는 모습과 어떻게 매일 마주보며 산단 말인가?

나는 초등학생 때 사회시간에 전 세계인구가 30억이라고 배웠다. 지금은 78억이고, 2050년에는 100억이 될 것이라 한다. 이 지구 위에 숨 쉬는 80억의 인구는 개성이 존중받는 이 시대에 매일매일 수천, 수만 줄기의 문화의 조류에 휩쓸리며 산다. 문학도로서 문학의 다양성에 대부분 벅찬 감격을 느끼지만 때로는 역겹고 난감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다. 전통에서 벗어난 미술품 또한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고 간혹 인생이 쇄신되는 듯한 감격을 주지만 무의미한 역겨운 유희로 느껴지는 때도 적지 않다. “저런 것이 대단한 미술이라면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받은 ‘양’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안목이라기엔 쑥스럽지만, 미술에 대한 나의 취향은 상당한 속도로 확대되어왔다. 그것은 ‘안목’ 자체를 확대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그저 좋아서 찾아다니며 각 작품의 독특한 시선과 아우라에 나를 내맡긴, 사심 없는 수용의 결실이기도 하다. 미술 전시회 관람은 언제나 풍성한 배당을 안고 돌아오는 투자이다. 그 순간만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감흥이 내면의 저력으로 축적된다는 뿌듯한 느낌이 즐겁다. 마티스, 달리, 자코메티에게 관심도 없고 보아도 즐기지 못하는 지인을 보면 딱한 마음이 들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나의 취향도 어떤 사람에게는 미숙하고 편협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의식이나 내면에 호소하는 바가 없는 미술 작품도 좋아하려고 애탄고탄할 필요도 없다. 사람의 호불호는 중요한 정체성 일부이고 일견 도덕성과 상관없어 보이는 사안에라도 그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유지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19세기 영국의 미학자 존 러스킨은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주겠소.”


- 서지문(1948- ) 이화여대 영문과 학사, 웨스트조지아대학원 영문학 석사, 뉴욕주립대학교대학원 영문학과 문학박사. 1984 대한민국문학상 번역부문, 2000 한국 PEN문학상 번역부문, 2014 한국문학번역상 수상. 고려대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역임. 『인생의 기술: 브라우닝과 러스킨과 밀에 있어서 윤리적 인격훈련의 개념에 대한 고찰』(1986, 정음사),『어리석음을 탐하며』(1998, 지식산업사)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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