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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러빙 속초, 버닝 속초

박인식


김종숙, 대구(10M), 2021, Oil on Canvas, 53×33cm


속초화가 김종숙을 만난 뒤, 나는 속초를 ‘중독의 땅’이라 부른다.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는 물고기들, 여장차림 사내 광대, 멍게 같은 어물전 할머니, 허물어진 담벼락, 화가 혼자 바라본 야생화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저들이 제 가슴 속에 감춰놓고 있는 게 무엇이든, 작가는 제 분신의 아픈 배를 쓰다듬듯 붓질해 놓았다. 속초에서는 사물을 보고 부르는 방식이 이토록 남다르다. ‘속초적’이라 할 만큼 속초만의 시각과 속초만의 표현언어가 있다. 김종숙은 그 속초의 ‘속초적’ 삶을 조형언어로 쓴다.


길가 간판이 막국수 막국수 막국수 일색이면 홍천
그게 황태 황태 황태로 바뀌면 원통
미시령 뚫고 지나 동해를 내려보는 사이
물회 물회 물회 세상이 나타나면
당신은 속초라는 중독의 땅에 닿는다
거기서 당신마저 근원을 알 수 없는
법으로도 금하지 못하는
마약 같은
어떤 끌림에 중독되면 어떻할거나
나도 중독 너도 중독
우리는 이미 속초다 

- <속초행>


그의 미학적 사색은 ‘속초적’ 향수였다. 그의 미학적 메카니즘은 ‘속초적’ 인생이었다. 그의 ‘속초적’ 상상력은 기억을 예언으로 바꿔놓았다.


내 회화적 기억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 물고기들과 헤엄치고 물춤추며
속초에서 그리 멀지않은 바다를
한 백년 산 적이 있다

내 회화적 예언이 맞아떨어진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 물고기들과 헤엄치고
물춤추는 이웃사촌으로
다시 한백년 살고 있겠다
속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 그, 속초향에 취해

- <속초화가 김종숙 그림으로 만난 속초 앞바다 물고기>


매번의 속초행에서 그의 속초 그림들은 시가 되어 내게로 왔다.


산의 바닥이 바다의 천장에
수평으로 맞닿고
산의 드높은 곳이 바다의 드깊은 곳에 거꾸로 박힌
어떤날의 속초는
산을 넘어 남자는 아버지가 되고
바다를 건넌 여자가 어머니 되는 날이었다 

또 어떤 날의 속초는
남자와 여자가
높은 곳에서 깊은 곳에서 기른
산과 바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는 날이었다 

- <어떤 날의 속초>


젊은 아버지가 넘고
젊은 어머니가 건너온
푸른 산이 푸른 바다를 업은

산바람 아버지 노래에
어머니 파도 손뼉 추임새 넣는

아버지의 산이 어머니 바다에
사랑 얘기 바치고
자식 얘기 쓰고 있는

높아 좁은 곳으로
깊어 넓은 곳으로
오르내리는
층계참에 앉아
이제는 숨 고르고 있는
 
- <속초>


속초의 설악산과 동해가 다리 놓아줘 나는 그녀의 첫 개인전(2015.2.25-3.24, 아라아트센터)과 두번째 개인전(2017.6.14-6.27, 갤러리291)을 기획했다. 그리고 3회 개인전에 선보일 45점의 작품을 완성했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속초행에 나서려는 2019년 4월 초,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날 밤, 천 오백명이 넘는 속초 사람들을 이재민으로 내몬 그 속초 산불에 전시예정 작품만이 아니라 30년 화업의 모든 결실인 수백점의 작품들이 한점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절망했다. 그러나 작가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반만에 160호 대작 3점과 80-100호 6점을 비롯하여 48점의 유화작품을 제작해냈다. 그 운명의 속초산불은 그녀의 작품과 작업장을 태운 게 아니라 그녀의 예술혼을 불태운 것이다. 살아 있는 목숨은 누구든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는 명제조차 그의 예술혼을 가두지 못했다. 피안의 세계로 건너갔다가 속초사랑의 붓으로 환생한 그 작품들로 구성된 세번째 개인전(2021.3.2-3.9, 금보성아트센터)에서 나는 울부짖었었다.


- 환생한 자여 불탄 죽음을 증언하는, 잿빛 쓸쓸함으로 오히려 눈부신 이 조형언어를 들어보라
- 극한의 진정성을 온몸의 칼로 도려낸, 전생과 내생을 오가는 이 조형언어의 힘을 견뎌보라



- 박인식(1951- ) 소설, 시, 미술평론, 희곡, 드라마 극본, 시나리오 등 전방위적 글을 쓴다. 장편소설 『백두대간』, 『종이비행기』 『인사동 블루스』, 희곡집 『서문동답』, 시집 『언어물리학개론』, 『겨울모기』, 『인수봉, 바위하다』, 『러빙고흐 버닝고흐』, 미술기행에세이 『햇살 속에 발가벗은』, 『그리움은 그림이다』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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