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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너무 가까워선 안 될 예술과 정치 : 돔 광장의 귀스타브 쿠르베로부터

심상용

코로나19 사태가 세계적인 팬데믹 사태로 진전되기 직전인 2020년 2월 9일 국립현대미술관이 야심차게 기획했던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전이 막을 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했던 전시는 광장을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부딪치는” 곳이며, 그 해결이 지향하는 궁극은 “더 나은 사회”로 정의한다. 더 나은 사회라는, 진보 담론의 추상화된 타협지점인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광장’ 전은 기억, 애도, 연대 같은 묵직한 것들을 투입했다. 하지만, 정치적 예술이나 정치로서의 예술이 아니라면, 광장의 역사에서 들어야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없지 않다.


Place Vendome, Paris, France. 2011 ⓒ Giorgio Galeotti 출처: wikimedia


1702년 루이 14세에 의해 만들어진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 지금 그 중앙에는 나폴레옹의 오스텔리츠(Austerlitz)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트라야누스 석주(Trajan’s Column)를 본떠 만든 높이 44m의 석주가 서 있다. 석주의 꼭대기에 있는 나폴레옹 동상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앙리 4세의 동상으로 교체되었다가 루이 필립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1871년 파리 코뮌 시기에 코뮌의 무리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 이때 파괴의 주동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주의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가 지목되었다.

쿠르베는 정말로 잠시 현실정치에 가담했을 뿐이지만, 그 결과는 실로 비극적이었다. 쿠르베가 나폴레옹 3세에 충성하는 베르사유 군에 맞서 일어났던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에 가담했던 기간은 불과 40여 일에 지나지 않았다. 파리 코뮌에서 그의 역할이 미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코뮌 평의회의 약 90명의 의원 가운데 한 명이었고, 미술부 장관과 파리예술가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뮌의 일단의 사람들이 방돔 광장 석주를 파괴하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벌이자, 이에 놀라 5월 2일 모든 직을 사임하고 코뮌을 떠났다. 그로부터 20일 후인 5월 28일 파리 코뮌이 진압되었고, 쿠르베는 코뮌의 가담자로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 서게 되었다. 방돔 광장의 석주 파괴와 관련해 쿠르베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정작 파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이 무엇이건, 군사 재판에서는 그에게 그 책임을 물어 6개월 형을 선고했고, 쿠르베는 트펠라지 감옥에서 형을 치뤘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 공화파 화가의 비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쿠르베에 대한 처벌이 가볍다고 여긴 보나파르트 파 의원들에 의해 방돔 광장의 석주 재건 비용을 청구하는 소송이 다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재판 결과는 더 혹독해서 쿠르베의 전 재산과 모든 그림이 압류된 것과 별개로, 생전에 그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액수인 금화 50만 프랑의 벌금형까지 더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남은 일은 프랑스 영토로부터 도주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1873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조국 프랑스의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넘어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을 봉포르라는 작은 마을에 의탁하다가 58세의 길지 않은 삶을 객사로 마감했다.

사건의 전모는 이미 알려진 대로지만, 그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언젠가 쿠르베의 정치와 예술의 행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간, 그래서 행복했던 예술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공허하다. 계몽주의 교훈의 틀에 익숙해진 습성 탓에 명쾌해 보일 뿐인 환상에 호소한다. 실제 쿠르베는 자신의 신념의 끝에서 오류를 보았고,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이런 진술은 대체로 진실이 누락되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그 삶을 살았던 당사자인 쿠르베 자신이 진실을 또렷하게 깨닫게 되었다. 정치에 매몰될수록, 예술로부터는 그만큼 더 소외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셈법과 예술의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술은 문제해결을 궁극으로 삼는 정치술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자 희생자며 문제 자체인 사람에 대한 주목이자 포용이며, 광장에서 외치는 ‘더 나은 삶’과는 차원이 다른 고양된 삶에 대한 부응이기 때문이다. 쿠르베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을 “자유 외에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나라’에는 제2 제정만큼이나 파리 코뮌도 동일하게 포함된다.


- 심상용(1961- ) 서울대 미술대학, 동 대학원 졸업. 프랑스 파리1대학 미술사박사, 동덕여대 교수 역임. 현 8대 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돈과 헤게모니의 화수분 앤디워홀』(2018)『, 아트테이너: 피에로에 가려진 현대미술』(2017) 등 다수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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