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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② 김택화 작가론_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그린 제주작가

이나연



2020 ②
김택화 작가론_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그린 제주작가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사라진 제주풍경 품은 미술관, 김택화 미술관의 탄생



제주 김택화미술관(2019.12.16.)


2019년 12월,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신흥로에 김택화 미술관이 개관했다. 김택화는 제주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에 진학, 졸업 후엔 제주로 다시 돌아와 제주풍경에 천착했던 작가다. 추상표현주의 그룹인 오리진의 창립멤버였을 정도로 추상에 천착하던 작가였다. 미술대학의 데생수업에서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고 기록되던 그가 고향인 제주의 풍경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후반은 제주의 풍경을 캔버스에 잘 담아보고자 끊임없이 연습한 시기다. 우리가 아는 표준형 프레임에 제주의 풍경이 담겨 있다. 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제주풍경은 급변한다. 해안도로가 개설되고 아파트나 테마파크 등이 생기면서, 김택화가 그리던 제주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좀 더 넓은 제주풍경의 원형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는 스케치북을 가로로 길게 잘라 사용했다.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야외스케치를 즐기며 그린 4,000여 점이 넘는 스케치가 남았다. 유화 역시 가로로 길죽한 파노라마 타입의 캔버스에 주로 그렸다. 


2003년에 암진단을 받고 2006년에 사망하기까지 작가는 프레임의 변화는 물론 작업도 일변한다. 더 이상 보고 그릴 풍경이 없기도 했거니와 병약해진 체력 탓도 있었다.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지 않는 대신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제주풍경을 그렸다. 화백의 상상 속 풍경은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 들어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다. 눈 내린 초가지붕들 사이의 올레길을 할머니가 지나간다. 정겨운 풍경이다. 정사각형의 틀 안에 탄탄히 자리 잡은 색채들이 만들어낸 형상들이 작품 한 점 한 점을 완벽해 보이게 한다. 죽기 직전까지 제주의료원 병상에서도 스케치를 멈추지 않던 그가 사망 이틀 전에 남긴 7점의 스케치가 흥미롭다. 화백의 20대 시절 작품성향처럼 추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진통제를 맞아 부분적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린 서 있는 인물과 자화상, 조랑말 스케치가 있다. 


작가의 작업실도 미술관에 재현돼 있다. 제주풍경을 평생 그린 화가였지만, 제주도에서 관심을 두고 지원해준 바는 없었다. 정직하게 작품들을, 한 작가와 지역을 제대로 보여주는 민간미술관의 개관이 반가웠다.  




제주풍광_53x53_캔버스에_유채_2000_김택화미술관



김택화 다시 보기 

김택화는 1940년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간 곳이 용담 2동 정드르다. 10살에 제주 북초등학교에 3학년으로 입학한 시절부터 이미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선생님은 물론, 동료며 동네 사람 모두 김택화라면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태어난 제주의 시절은 4.3의 어수선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에 잠식된 상태였다. 제주엔 피난민이 밀려들었다. 오현중학교 야간부에서 그림을 그리던 김택화는 제주의 또 다른 화가 고영만을 만나 막역지우가 된다. 모든 생활을 거의 같이 하다시피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스케치북을 들고 삼성혈 주변(오현중 인근)과 내창이나 바닷가를 찾아다니며 야외스케치를 즐겼다. 중학생 두 명이 그들만의 제주식 인상주의 화파를 결성해 스케치 여행을 다닌 셈이다. 어려운 시기에 이 둘은 극장의 광고판을 그리는 일도 함께 했다. 고영만은 그림을 그리고 김택화는 ‘성길사한’이라는 글자를 쓰고 받은 돈으로 중국 찐빵을 잔뜩 먹은 일화가 전해진다. 1) 이 두 명의 청년 작가에게 그림을 가르쳐주던 것은 홍종명이었다. 1952년 9월부터 1954년 5월까지 홍종명은 오현중학교 1학년의 미술을 담당했다. 칠성통에 작은 화실을 열어 ‘미술사’라 이름 붙이고 “그림을 무료로 가르쳐 드립니다”라고 홍보했다. 홍종명 밑에서 간판도 그리고 그림을 배우며 김택화와 고영만은 시대상황에 아랑곳없이 그림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었다. 서울이 수복된 1954년 5월, 홍종명도 상경하고, 이후엔 구대일도 서울로 떠난다. 스승을 잃은 슬픔에 안타까워하는 것도 잠시, 김택화도 서울로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하러 떠난다. 마침 서울에서 큰 형 김택신이 국제전신전화국에 다녔던 까닭에 김택화는 서울 동복고등학교 야간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낮에는 전보를 배달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니는 일상이었다. 



김택화_1990년대 한라일보에 연재했던 4.3항쟁 소설 ‘한라산’삽화중 일부_김택화미술관소장



1959년도에 홍익대학교와 서울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전국 고교생 미술대회에서 입상한 이후 김택화는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홍익대학교에서도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인정받는 학생이었다는 정황은 다양한 방식으로 포착된다. 김택화가 미대에 재학중이던 1962년, 국전 서양화 부분에서 <NO. 7>으로 특선을 탄 일화가 대표적이다. 국전을 수상한 같은 해인 1962년, 제 1, 2회 신상회전에서 Y씨상과 특선을 받았다. 오월신인예술상전에서도 수상했다. 1960년대만 해도 미술학교에선 데생의 절대 평가가 이뤄지던 시절이었고, 김택화는 늘 유례없는 최고점수를 얻곤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홍익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김환기의 애제자로도 유명했다.    


김택화는 1962년에 결성된 오리진(ORIGIN)의 창립멤버-김택화, 서승원, 최명영, 이승조, 김수익, 권영우, 신기옥, 이상락 등-이기도 했다. 오리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60학번 동기생 9명이 모여 “모든 질서는 근원적인 데 있고 이에 환원된다. 그러나 과거의 그것은 역사의 유전에서 이루어진 자연적 유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타성과 시대적인 혼돈, 빈곤에 대한 반발, 이는 우주적인 시점에서 응시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절실한 필연성으로 부딪치게 했다. 이에 우리는 일체의 인간사적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자의 순수성과 삶을 구출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고 심화된 평범을 추구한다.”라는 창립 취지문을 발표하면서 설립됐다. 첫 결성 뒤 1963년 9월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1회전을 열었다. 당연히 김택화가 포함돼 있었다. 이 전시에선 어두운 추상주의를 지향하며 전 회원이 기하학적인 추상화를 전시했다. 오리진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두 그룹 중 하나로 기록되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2005년 기준으로 회원이 205명이 되었을 정도로 40년의 세월을 지나며 오히려 왕성히 활동을 이어나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단체가 됐다. 2006년에는 창립멤버와 1970년대와 1980년대 활동한 동인들의 작품전시와 도록, 기사, 포스터 등을 진열하여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현대미술의 환원과 확산-오리진회화협회 1962~2006>전을 개최했을 정도다.


미술평론가 김원민의 회고에 따르면 “김택화는 1960년대 초 국전에 특선을 했을 당시엔 말밥굽에 박는 징과 마차를 주제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창립멤버가 됐던 오리진 그룹에서 활동하던 때는 비구상에 심취했었고, 한때 뷔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선과 극도로 변형된 마른 인물상을 통해 불안하고 초조한 현대인의 고뇌를 표출하기도 했다.” 3)

 


김택화_신흥리에서_38X53cm_종이에 연필_1993_김택화미술관소장



김택화_신흥리_53x257_캔버스에 유채_1997_김택화미술관소장




제주로, 제주 풍경으로 다시 

그렇게 활발히 홍익대학교를 중심으로 서울에서 명성을 떨치며 활동하던 1964년 김택화는 비공식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등록금을 제때 납부하지 못한 탓에 수업을 모두 이수하고 졸업식에도 갔지만, 졸업증서는 받지 못했다. 공식적으로 김택화는 홍익대학교 중퇴로 기록된다. 졸업을 하던 해 겨울 1964년 12월, 제주시의 일번지 다방에서 제 5회 미협전으로 <강태석 김택화 2인전>을 개최했다. 


1965년, 25살의 김택화는 잠시 머물러 왔던 고향에 남기로 결정했다. 제주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로 제주의 풍경이었다. 생계를 위해 신성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4-5년간 제주에 지내며 제주풍경을 관찰하며 그는 제주의 풍경이 신비롭게도 계속 새롭게 보이는 지점을 발견했다. 미련없이 추상화를 버리고 구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오현중학교 시절 고영만과 제주 시내 일대를 다니며 현장스케치를 했던 것처럼, 제주의 풍광을 그리는 데 있어 현장스케치를 기본원칙으로 삼아 왕성하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작가가 한 신문 인터뷰에서 30대에 갑자기 화풍이 바뀐 이유에 대해 직접 남긴 말을 남겨 둔다. 


“당시 잘 나가던 추상화가그룹 ‘오리진’의 창립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그땐 추상 외에 구상은 눈에 보이지 않더군요. 제주 초가가 눈에 들어오면서 작품 경향을 바꿨어요. 그동안 허송세월했죠. 눈 뜨는 기간이 길었다고 할까요. 제주도가 고향인 덕분에 (화풍을) 바꾸지 않았나 생각해요. 눈앞에 보이는 제주의 자연이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죠.” 4)


제주에서 첫 개인전을 준비하며 그는 말 그대로 섬 전체를 다녔다. 그렇게 고향 제주는, 정확히는 늘 새롭게 보이는 제주의 자연은 추상화가를 다시 구상화가, 그것도 풍경에 천착하는 화가로 만들었다. 김택화는 말했다. “이토록 좋은 제주의 풍광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가장 제주도적인 작품, 제주풍광다운 그림이 제 손에서 탄생되기를 바란다”고. 


김택화는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작업을 이어나갈 때와 제주대학교 미술학과 강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전업화가로 살았다. 활동지역과 작품성향이 완전히 바뀌었지만, 작가로서의 열정과 작업을 이어나가는 동력이 되는 동료들과의 교류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1년에는 강용택, 양창보, 조석춘, 강광, 강영호, 김원민, 김택화를 멤버로 ‘화실동인’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고, 1995년에는 제주지역 미술발전과 친목도모를 위한 ‘삼무동인’-고민철, 고보형, 고순철, 김성오, 김창하, 김택화, 이경은, 이옥문, 채기선-을 결성하기도 했다. 화실동인은 창립과 함께 소라다방에서 전시를 시작하며 매달 새로운 작품을 소개하면서 제주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삼무동인은 3회의 전시를 끝으로 활동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제주미술문화 토대의 중심에서 

김택화의 활동을 다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주미술계의 전시와 함께 읽어 볼 수도 있다. 서울에서 제주로 온 김택화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와 겹치면서 대부분의 다방에서 김택화의 개인전이나 단체전, 2인전 등이 열린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오승익은 다방전시의 시작점을 1954년 9월, 조용호의 개인전과 고영만, 김택화의 2인전을 열었던 칠성통 오아시스 다방으로 기록한다. 5) 다방문화의 시작을 김택화가 연 셈이고, 1960년대에 지어진 다방에서는 손수 인테리어를 담당하기도 한다. 20대 후반이던 김택화는 원다방을 전시에 적합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디자인한다. 2층 건물의 창문을 모두 막아서 간접조명을 이용하고, 한쪽 벽면엔 말과 마차의 모습을 부조로 처리했다. 1970년도에 지어진 소라다방의 인테리어도 김택화가 맡았다. 일본어로 소라는 하늘색을 뜻했지만, 건물 외형은 바닷가의 소라(구쟁기)로 표현하는 재치를 발휘했다. 실내엔 작은 여신상을 부조기법으로 처리했다. 또 다른 1970년대 후반의 대표 문화공간을 자랑하던 산호다방 역시 김택화의 인테리어였다. 산호다방은 지하에 있던 공간이라 창문이 없어 전시를 열기에는 맞춤이었다. 수석을 전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반영해, 2-30개에 달하는 전시 선반을 놓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선반은 옆 테이블과의 거리를 확보해주게 되면서, 전시 관람객들의 동선도 고려, 전시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길다방에서 열린 최초의 <그라픽 디자인>전을 1965년에 김택화가 마련한 지점도 흥미롭다. 제주 지역소주인 ‘한라산’의 라벨에 그려진 로고와 한라산 이미지는 김택화의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유통되는 한라산의 파란색 병의 라벨과 대표이미지는 김택화의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바뀌면 제주도민들에게 민원 6) 이 들어오는 통에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뉴욕다방에서 1963년, 일번지다방에서 강태석과 2인전을 미협전으로 가진 1964년, 춘홍다방에서 1964년, 이어도다방에서 1966년, 소라다방에서 1970년, 1971년, 산호다방에서 1978년에 연 개인전의 이력을 살피면, 제주 다방의 역사와 다방 전시의 역사가 김택화의 미술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다방을 중심으로 제주의 미술사가 쓰였으니, 제주미술사의 궤적이 고스란히 김택화와 함께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겠다. 전시와 인테리어 등 미술 현장에서 많은 활동을 한 이력은 제주도미술대전 운영위원이나 심사위원장을 맡는 일, 제 15대, 21대 한국미술협회 제주도지부장도 맡는 일로 이어졌다. 신천지미술관장도 역임했고, 회장이나 관장의 직책 없이도 제주미협의 감사나 이사 등으로 미술계의 발전에 손을 보태는 일에 게으름이 없었다. 지역에서 문화활동에 앞장서며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시에 꾸준히 작업세계를 발전시키며 제주예술을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업실과 미술관, 이룬 꿈과 못 이룬 꿈  

현재 남성마을이라 불리는 제주시 남문로에 오랜간 김택화의 작업실이 있었다. 집과 작업실이 분리되어있긴 했지만, 김택화의 왕성한 작업량을 소화하기엔 작은 공간이었다. 2002년에 숙원하던, 작가의 표현을 빌면 “꿈의 공간”을 애월읍 광령리에 마련했는데, 집을 짓느라 과로한 탓인지 같은 해에 암선고도 함께 받았다. 회복기운이 돌 즈음 바로 붓을 들어 2003년 3월 27일 제주도문예회관 전시실에서 <제주풍광>이라는 개인전을 열었다. 3년 만의 개인전이었다. 2003년 병상에서 작업한 정사각의 제주풍경의 조합들을 캔버스에 옮겨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전시회였다. 초가 그림이 많았던 전시에 대해 김택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젠 제주 풍경을 조립한다고 할까요. 제주 초가들이 거의 사라져버렸고 슬레이트집으로 변모했어요. 그래서 실제 초가를 보고 그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단지 ‘거기에 있었다’는 것만 기억해서 그리는 것이지요. 걸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모델은 이젠 교외에서도 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빌딩이나 타일 집을 맹목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제게 의미가 없어요.” 7)



제주풍광_96x300_캔버스에 유채_1993_김택화미술관


이 시기에 그린 초가들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용담 2동 정드르에서 실제 살던 곳이었다. 상상 속에만 남아 더 아련하고 더 생생한 제주의 예전 기록이 된 셈이다. 둥근 초가지붕에 눈이 쌓이기도 하고 빛이 내려앉기도 하고, 허벅도 보이고 물팡돌도 보인다. 제주 풍경의 한 요소가 되는 초가집의 의미에 대해 작가는 말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지만 제주의 자연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조형화된 구조물입니다. 제주풍광, 바람, 오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조형이어서 초가에 애착이 가요. 그저 사라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그래서 남다른 연민이 있어요. 그리는 사람이어서 다른 방향으로 애착이 가는 게 아닐까요...아쉬운 것은 국적 상실의 집들이 제주 주택문화를 점령하는 것이죠. 어느 나라의 것인지, 어정쩡한 저 건물들... 오래 보기 괴롭고, 자연과 어울리지도 않아요. 향토를 사랑하는 이는 다 같은 마음일걸요.” 8) 

 


제주풍광_65x65_캔버스에_유채_2000_김택화미술관소장



2002년부터 2006년 사망할 당시까지도 김택화는 제주도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장이었다. 제주도립미술관 부지를 알아보고, 회의를 주재하며 제주에 번듯한 미술관 하나가 생기길 바란다는 꿈을 구체화하던 중이었다. 2003년도부터 암치료를 받고 있었으니 건강한 몸이 아니었을텐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도립미술관 건립에 힘을 쓰고 있었다. 한 신문 인터뷰에서 김택화는 “미술관 건립운동으로 미술인들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겠다”며 “미술관 건립 운동은 갈라진 미술인들을 규합하는데 힘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미술인의 힘으로 불충분한 부문은 건축인이나 제주를 떠나 타 시,도 인력과 연계해 제주도립미술관이 ‘가장 바람직한 미술관’으로 건립될 수 있도록 최대치를 이끌어내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도 전했다.  


2006년 6월 25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김택화는 세상을, 정확히는 제주를 떠났다.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중 진통제로 밤을 지새면서도 김택화는 수천 점의 스케치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의 죽마고우였던 전 제주도립병원장 이용희의 증언에 따르면 아픈 친구를 위해 일찍 들른 회진 중에 그의 병실에는 “밤새 고통의 뒤척임과 맞바꾼 스케치북이 몇 권씩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이용희는 수많은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 봤지만 친구인 김택화만큼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제주미협장을 치르면서, 6월 29일 발인 전에 한국미술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장 김현숙이 추모사를 읽었다. 일부 옮겨본다. 


“당신의 건강은 언제나 뒷전이셨고 바른 자세로 누워계시지도 못하는 고통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면서도 제주도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소집을 서두르시던 선생님. 우여곡절 끝에 선정된 부지와 설계현상공모로 진척되는 도립미술관 추진상황을 지켜보시며 제주미술인의 소망이었던 도립미술관에 돌아가시는 날까지 남은 애정을 마저 쏟아 부으셨지요...개발의 명분으로 사라져가는 제주의 풍광이 아쉬워 캔버스에 한 점 한 점 담아내시던 선생님의 열정은 아름다운 제주를 위한 절규였습니다. 당신이 그려놓은 작품을 보시며 지금은 매립이 돼버리거나 길이 뚫리거나 번듯한 양옥으로 들어서 버린 모습에 무슨 보물이라도 도둑맞은 듯 몇 번이고 안타까워하시던 선생님. 빠른 개발의 속도에 속이 터지고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우셨는지 제자들까지 대동하여 한라산과 오름으로, 바다포구와 마을로 다니시며, 더이상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록하듯 화폭에 담으셨습니다.” 9)  



김택화 성산일출봉에서 그림 그리는 모습


2007년 제주특별자치도문화예술진흥원에서는 그의 서거 1주기를 맞아 김택화 유작전을 열었다. 급하게 치른 전시에 관련자료가 충분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여 제대로 된 유작전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13년에는 KBS 제주방송총국이 개국 63주년을 맞아 김택화 초대전을 제주도립미술관 2층 상설전시실에서 마련한 바도 있다. <김택화-바람섬, 빛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풍경화 67점을 선보였다. 2019년에 김택화미술관이 생기긴 했지만, 김택화를 제대로 조명하고 총체적으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기획된 유작전이나 회고전이 아직 마련된 바 없다. 제주를 대표하는 작가는 과연 누구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를 그리며 평생 제주의 미술계를 위해 헌신한 이에 대한 적합한 대우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그가 꿈꾸고 직접 만들었던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제대로 조망하는 날이 와야 하지 않을까. 오승익의 회고는 김택화의 제주미술에 대한 애정을 들여다볼 수 있어 의미있다. 


“성산포 주변에 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은 선생의 모습, 제주의 구석진 시골마을 초가 옆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를 이제는 만나 볼 수가 없다. 무분별하게 개발되면서 제주의 모습이 지워져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던 그의 모습과 제주도에 번듯한 미술관 하나가 있어야 한다며 그것이 마지막 바람이라며 노력하시던 모습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제주의 곳곳에 남겨진 그림과 손길은 제주미술의 한 기둥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10) 




ㅡㅡㅡㅡㅡ




1) 『나현 고영만_생명, 자연사랑』, <고영만 선생님과 김유정 평론가의 인터뷰>, (사)한국미술협회 제주특별자치도지회, 2019, 242p


2) 필자와의 인터뷰, 2020. 6. 11. 제주도 제주시 저지리 생각하는 집  


3) 『제주미술인조사자료집_작고작가』, <서양화가 김택화_소박한 제주의 아름다움, 그 찬란한 빛>, 87p 


4) 『제주일보』, [문화 데이트] <제주풍광> 개인전 김택화 화백, 2003년 3월 26일


5) 오승익, 『삶과 문화』 제11호, <제주의 전시문화_60,70년대 다방전시문화 중심으로>, 2004


6) 실제로 몇 번이나 다른 디자인으로 변형을 시도하던 라벨은 한두달이면 제자리(김택화의 한라산 디자인)로 돌아와 있다. 


7) 『제주일보』, [문화 데이트] <제주풍광> 개인전 김택화 화백, 2003년 3월 26일


8) 『제주일보』, [문화 데이트] <제주풍광> 개인전 김택화 화백, 2003년 3월 26일


9) 『제주미술인조사자료집_작고작가』, <서양화가 김택화_소박한 제주의 아름다움, 그 찬란한 빛>, 89p 


10) 『제주미술인조사자료집_작고작가』, <서양화가 김택화_소박한 제주의 아름다움, 그 찬란한 빛>, 90p

 





필자: 이나연 quelpartpress@gmail.com

82년생 이나연은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인기의 대부분은 서울과 뉴욕에서 보냈다. 전공은 회화와 미술평론. 2015년, 제주에서 글로벌 컨텐츠를 생산해내는 퀠파트프레스를 차려 <뉴욕지금미술>과 <뉴욕생활예술유람기>를 발행했다. 2017년 한영판으로 별도 발행되는 문화예술신문 <씨위드>를 창간했다. 현대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하고, 강연을 한다. 2020년 제주도립미술관장에 선임되었다.


이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20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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