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1935- )은 1959년에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 원로작가다. 그는 한국 미술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로 한국여류조각가회를 창립하는 데 앞장선 장본인이기도 하며, 여성 작가가 드문 화단 상황에서 작가의 권익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
“1950년대 후반 당시, 미국에서 철조를 공부하고 돌아오신 김정숙 선생에게서 용접을 배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1960년대 초반, 당시의 미술계는 모든 것이 척박했다.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한 여러 국제전의 참가와 국전 수상의 수혜는 거의 모두 남성 작가들에게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재능과 야망이 있는 여성 작가가 취할 수 있는 길은 해외로 유학을 가는 일이었다.
천경자(1924-2015)를 비롯하여 이성자(1918-2009), 박래현(1920-76), 김정숙(1917-91) 등등 국내외에 거주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여성 미술인들을 제외하면 남성에 비해 여성 작가의 존재감이 훨씬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런 척박한 문화풍토에서 김윤신이 선택한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그 당시만 해도 미술인들은 뉴욕보다 파리를 미술의 메카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파리는 최고로 각광을 받는 미술의 메카였다. 김윤신은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수학한 뒤(1964-69) 귀국, 홍익대를 비롯하여 성신여대, 경희대, 목원대 등등 국내외 여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 상명대 미술대학 교수(1980-84)가 되었다.
197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의 참가는 김윤신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중후반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남미 아르헨티나 거주(1984-현재)의 꿈이 이 전시를 계기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김윤신미술관 개관식은 예상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특히 개관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당시 아르헨티나의 꼬보스(Julio Cleto COBOS) 부통령 내외가 깜짝 방문해 격려해주셨다.” 김윤신의 제자이자 아르헨티나에 있는 김윤신미술관의 관장인 조각가 김란의 회고다. 김윤신은 작가로서 각고의 노력 끝에 점차 아르헨티나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필두로 올라바리아 시(市) 야외조각전, 다마소 아르쎄시립미술관 초대전(1987), 멕시코 국립예술의궁전미술관 초대전(1989) 등이 이민 초기에 김윤신이 올린 예술적 성과들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윤신은 한국을 잊지 않고 찾았다. 1990년, 현대갤러리 초대전을 비롯하여 동아갤러리 초대전(1995), 박여숙화랑 초대전(2003), 국민일보갤러리 초대전(2007)을 가졌으며, 수많은 국내외 단체전에 참가하였다.
한국·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 기념 겸 갤러리 반디트라소 이전 기념 특별 초대전으로 열린 김윤신의 ‘지금 이 순간’(7.8-8.7)은 김윤신의 조각과 회화 작품을 감상할 좋은 기회이다. 작업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윤신 조각의 저변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우주적 기념비(Axis Mundi)’로서의 모던한 추상 조각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의 철조에서 시작하여 석조를 거쳐 목조에 이르는 긴 조각적 도정은 마침내 열대 나무의 고장인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정착함으로써 숙성의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TV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을 보니 어느덧 80대 후반의 노경에 이른 작가 김윤신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모습이 나타난다. 노익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형국이다. 전시장에는 오랜 남미의 생활에서 길러진 화려한 색상의 조각 작품과 그림들이 전시돼있다. 회화는 선과 점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색채 추상적 경향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많은 관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