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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스크린쿼터 반 토막 이후

정중헌

7월 1일부터 스크린쿼터 일수가 146일에서 73일로 절반이 줄었다. 미국의 축소요구를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다. 영화인들은 대학로에서 반대시위를 벌이며 원상회복 투쟁을 벌이고 있다.

스크린쿼터 일수가 줄면 한국영화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올 여름처럼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이 할리우드 대작들을 집중 배급하면 극장 스크린은 이에 쏠리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영화는 극장 잡기가 힘들게 된다.


일부에서는 한국영화 점유율이 40%를 넘는데 스크린쿼터가 왜 존속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하지만 자본과 배급에 밀리면 당장 위축되는 것이 한국영화의 실상이다.


스크린쿼터의 축소는 동남아에 한류바람을 일으키고 산업으로 발돋움하려는 한국영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크린쿼터가 있음으로 해서 영화인들이 마음 놓고 한국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고, 스크린을 대량 확보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는데 그런 보루가 반으로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약진은 스크린쿼터가 자극제가 된 측면도 있다. 1970년대 한국영화는 정책이 망쳤다. 우리영화 제작을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따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탓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관객이 몰리자 미국은 영화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1988년 정부가 외국영화 직배(直配)를 허용하자 영화인들은 상영관에 뱀까지 투입하며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반면 긍정적 현상도 나타났다. 시장이 열리자 메이저 배급사들은 직배망(網)을 넓히기 위해 소극장을 개조해 스크린 수를 늘렸다. 비디오 외화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영화가 살아날 조짐을 보이자 미국은 1998년 다시 스크린쿼터를 문제 삼았다.


1998년 12월 1일, 영화인들이 광화문빌딩 앞에서 벌인 스크린쿼터 사수(死守)대회는 한국영화사에 남을 상징적 이벤트였다. 현역 스타들이 상복(喪服)에 자신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한국영화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을 치렀다. 감독과 제작자들도 모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스크린쿼터 일수를 축소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다짐과 국회 결의를 얻어냈다.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영화인들이 우리영화를 잘 만드는 것만이 살 길임을 자각한 것이었다.


그 현장에 섰던 필자는 스크린쿼터 지키기는 한국영화를 살리기 위한 자주적인 문화운동이라는 논지로 책을 냈다. 사설로도 여러 차례 스크린쿼터 정책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화는 다른 상품과 달리 우리 정서와 생활이 녹아 있는 총체적 문화이기에 공산품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다.


90년대 후반 한국영화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창업투자 자본이 영화에 쏠리고 유능한 인재가 몰리면서 제작에 활기가 돌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빅히트한 것이다. 우리영화 잘 만들겠다는 열정과 늘어난 스크린 수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왕의 남자’ 등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은 소재가 독창적이고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데다 우리 정서에 맞고 완성도 역시 뛰어나 할리우드 영화를 제압했다.


그런데 요즘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예전처럼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영화 잘 만들겠다는 열정보다는 한미 FTA 협상과 연계해 반미(反美) 투쟁으로 몰아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스크린쿼터는 지켜져야 하지만 지금은 반 토막이 나버린 이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 취약 부분은 정부로부터 보상책을 얻어내면서 또 다른 자구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이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한국영화 잘 만들면 관객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일보 2006년 7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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