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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지금 당장 간판을 내려라

탁계석

故이경성 前국립현대미술관장의 국립현대미술관 빈소 설치 좌절은 실로 안타깝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반을 닦고, 두 번씩이나 관장을 역임한, 그야말로 기둥을 세우신 미술계 큰 어른에 대한 대접이 고작 이뿐이란 말인가. ‘공식 절차(?)’ 아무리 절차가 중요하다 하더라도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절차 말고 또 무슨 절차가 그리도 중요하단 말인가. 미술관의 존재 이유가 그런 절차나 내세워 귀찮은 일 만났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면 이 땅의 예술은 가는 곳마다 벽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런 케케묵은 의식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예술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국립현대미술관 간판이라도 내려 그 궁색한 변명을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실로 개탄스럽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안 되는 일도 되게 하는 사람과, 되는 일도 안 되게 하는 사람. 어느 쪽인가. 그런데 이번 사건은 실수가 아니란 점에서 간단히 덮을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예술가에 대한 대접이, 예술에 대한 존중이 돈으로 지원하고, 훈장을 주고 하는 형식에 있지 않다. 이런 것에 앞서 기본적인 양식이 바로 서야 하는데 예술기관들이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자세에 젖어있다 보니 모든 게 소극적이고 타성에 길들여진 것이라 본다. 그러고 버젓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직장을 두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자동차 사고(事故)만 사고가 아니다. 이것도 대형 사고다. 예술을 바라보는 눈,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이처럼 경직되고 미온적이라면 어찌 국민 세금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곳이란 믿음이 가겠는가. 정상인이라면 서둘러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장례절차를 논의해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생각이 있는 집단이라면 저들이 먼저 유족들을 찾아가 위로해야 인간으로서 온당한 처사가 아니던가.<이런 닫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의 녹을 먹고 있다니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겠는가. 문화를 아무리 입으로 외친다고 문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 분야에 바친 예술가라면,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대접을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한 줌의 흙을 쥐고 프랑스로 갔던 폴란드의 쇼팽이나, 사후에 남의 나라인 독일 사람들이 러시아 작곡가 루빈 시 타인의 명성을 빌어 콩쿠르를 연 일도 있지만 우리는 그려질 못했다. 안익태 선생이 그러했고, 그토록 조국이 그리워 일본까지 와서 현해탄만 바라볼 뿐 땅을 밟지 못한 윤이상 선생이나 모두 예술가를 억압하고, 짓누르고 탄압한 결과다. 광화문 광장을 조성하고, 지금 예술가를 지원하겠다고 이곳저곳에서 이벤트를 벌인다고 문화가 되는 건 아니다.

그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 사람 마음 한가운데 문화가 심어져 있어야 한다. 예술 사랑의 정신이 스며들어있지 않고, 예술인에 대한 존경심이 살아나지 않는 강퍅한 땅에서 어찌 문화의 꽃이 필 수 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시민의 접근이 먼 국립현대미술관이 오히려 이런 기회를 빌어서라도 높은 분들과 시민이 다녀가게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이보다 더 미술의 접근이 좋을 수 있겠는가. 왜, 국립현대미술관이 늘 문제가 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느 나라에서 보다 더 예술가의 위치가 낮은 대한민국, 경제는 세계에 중심으로 가고 있지만 문화인식은 특히 미술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이토록 낮은 나라에서 공기관 스스로 중요한 사안에 이처럼 미온적이라면 개혁이 필요하다.

현대미술관의 몰지각한 행동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삼가 故이경성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고히 잠드소서.

기사입력: 2009/12/08 [10:13] 최종편집: ⓒ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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