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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홍종명, 그림과 신앙을 함께 지켜온 화가

김정

1972년 광화문에서, 우측부터 홍종명, 박고석, 김정



1975년 가을 홍종명 선생과 박고석 선생의 도봉산 산행에 나도 동참한 적이 있다. 박고석 선생은늘 혼자 다니셨는데 이례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홍종명 선생이 새로 산 등산화를 처음 신고 왔다며 자랑하는 걸 조용히 듣고 있던 박선생은 홍선생의 모자를 벗기며 산 아래쪽에 던졌다, 그리곤“야 종명이, 내려가서 얼마나 빨리 올라오나 시험좀 하야 갔어, 빨리 모자 개져와보소!” 새로 산 신발이 얼마나 더 좋은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왜냐하면, 내가 대신 내려가려니까 박선생 왈 “아,이건 종명이가 가야 해, 빨리 갔다 오라우” 하셨다.홍선생은 내려갔으나 쉽게 돌아오질 못했다. “종명이 빨리 오라우~”하고 소릴 질러봐도 빨리 못 올라왔다. 약간 가파른 언덕이었다. 잠시 후 박고석 선생이 끌어주며 올라왔다. 홍선생은 등산을 못 했다. 박선생은 “야, 종명이는 내일 미아리고개부터 다시 다니라, 다리 훈련 멀었다 알았디! 다리 힘이 없으니까는 그런 거야.” 새 신발 샀다고 자랑하다가 잔소리만 들었다. 박선생이 늘 아끼는 후배가 바로 홍선생이고, 이번 쇼는 다리 건강 좀 챙기라는 자극이었다.


홍종명(1922-2004) 선생은 신앙 깊으신 화가였다. 그림이냐 교회냐 둘 중 하나 선택하라면 고민에 빠지실 것이다. 서예가 김기승 선생 등 몇몇이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쟁 때 월남한 화가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 홍선생도 직업 없이 힘들 때, 안암동에 있는 D중학교에 나가게되었는데, 그 사연을 C교수가 내게 들려줬다. “얌전한데 직업이 없어서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는 걸 보다 못해 내가 잘 아는 일본 교장에게 취직을 부탁했지. 학교 교장은 나의 말을 믿고 미술강사로 홍종명을 썼다가 나중에 교사로 취직시켜준 것이지” 그 뒤 일본 교장은 떠났고, 홍선생은 D중고교에 계속 근무하시다가 S여 사대로 옮기셨다. 홍선생은 신앙적 내용 그림을 그려서 잘 알려졌고, 결국은 1974년 기독교 재단인 S여대로 스카우트되었다.그 후 정년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였고, 학장까지 하셨다. 그의 학장 시절 학교에 분쟁이 있었다. 노조 직원들과 운영자 간 대립이 심해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총 간부가 대학노조를방문하면서 더욱 격렬한 대립으로 치달을 때, 노조 측이 불법을 자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 당시 홍학장은 인감도장과 직인 등을 가방에 넣고 출퇴근했다. 아마도 직인이나 인감을 몸으로 지키려는 배짱인듯했다. 한편으론 성격이 고와서 노조 농성 요구에 대처 방법을 찾는덴 애를 먹기도 했었다.


김정, 홍종명 드로잉


필자와 같은 대학에서 늘 지내셨고, 국제기독교아티스트 서울전 때도 애를 쓴 분이다. 인격이나 신앙은 우등생이었으나 식초는 우수 장학생급이다. 1980년 중구청 민방공 훈련 때 대학 전 직원이 새벽 5시 비상 출근해서, 훈련이 끝난 6시 인근 해장국집에 갔다. 아침 식사 중 홍선생은 주인장을 부르더니, 식초를 달라고 했다. 갖고 온 식초를 해장국 밥에 들어부었다. 모두 이상해서 시선을 집중해 물어보니 “난 고깃국이나 고기를 먹을 땐 반드시 식초를 발라야 먹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북에서부터 버릇이라서….” 어느 여름날 학교 앞 냉면집에서 교수들과 식사를 할 때도 아예 식초를 냉면에 쏟아부었다. 냉면 국물이냐 식초 물이냐가구분 안 될 정도로 신맛을 즐기셨다. 교수들과 회식자리엔 늘 식초병을 준비하는 모습이 그분의 식사 풍경이며 일상이었다. 평소 짜장면에도 식초는 마찬가지. 그래서 농담으로 별명이 홍식초 짜장이었다. 그 홍식초 짜장을 먹어보니 시큼한 짜장맛도 괜찮다는 중론이다.


홍종명 선생의 그림 바탕이 늘 황토색으로 깔리는데, 그 소문중 O씨의 말인즉 “어려웠던 시절 뜯어놓은 장판지를 길에서 주워 다가 그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빚보증을 잘못 서 어려움 겪던 세월이 몸에 밴 거라는 증언이었다. 그 후 나는 홍교수님에게 직접 확인했더니 “허허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황토 빛깔을 워낙좋아해서요”라고 과거 피난생활을 겪으며 긍정도 부정도 없이 지난 세월의 아픔을 포용하시는 듯이 조용히 얼버무리셨다.


정년퇴임 후 작업에 열중하셨다. 그런 어느 날 작업실에 강도가 침입해 물질적, 신체적 아픔을 겪으셨다. 그 고통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쁘셨고, 끝내 82세에 조용히 천국으로 떠나셔 주변을 슬프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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