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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김영기, 샛별같은 기억력에 나이를 초월한 작가

김정

김정, 김영기 드로잉

청강(晴江) 김영기(1911-2003) 선생은 해강 김규진(조선시대 화가 1868-1933)의 장남으로 총명하셨다. 필자가 대학원 재학시절 그분의 동양미술사강의를 들었는데, 중국미술사를 마치 백과사전 보듯 연대와 인물을 줄줄 외우셨다. 대단한 기억력에 놀랐다. 아마 건망증 대가이신 P선생이 보면 까무러쳐 쓰러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환갑 지나면 이름이나 숫자는 20-30% 정도 기억상실 되는데,63세의 청강 선생 기억력은 샛별청년이었다.

청강은 1932년 21세 때 중국 베이징 보인대학으로 가서 제백석(齊白石, 1864-1957)에 사사하고 34년 일본미술대전에 <석죽>으로 입선, 39년 이화여대 교수 제1호로 임명된 그 당시 천재로 통했던 분이다. 그렇게 총명했던 분이지만,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던 것이다.

1974년 4월 어느 날, 대학원 수업 들어오시는 김영기 선생은 멋쩍게 웃는 얼굴이셨다. 수강생은 당시 3명이었고, 필자가 좀 늙은 학생이었다. 평소 똑똑하신 청강 선생은 헛기침을 반복하며 한숨을 쉬는 등 행동이 좀 이상해서 나는 부드럽게 여쭤봤다.

“오늘 교수님 무슨 좋으신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아하, 그게 요즘 내가 나이를 먹는지 이상하게 자꾸 잊어버리는 건망증이 많아졌다오. 오늘 여기 강의하는 걸 알았지만 깜빡 잊고 다른 약속을 한 거지요. 뒤늦게 생각나 헐레벌떡 오느라 아슬아슬하게 맞춰와 웃음이 나는 거요. 허허허.”

“하하하.” 모두 웃었다. 사실 누구든 웃고 넘길 내용이지만, 청강 선생에겐 1분 1초도 허용이 안 되는 사건이다. 그분은 기억력이 대단해서 아마도 그날 본인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6세 때인 1917년에 이미 서화연구회주최 서화대전에 출품할 정도인 천재로 통했던 분이다.

그의 강의 ‘동양미술사’에서 한국의 동양화를 바로 ‘한국화’라고 고쳐 국내 최초 언급한 분이다. 한국인이 그린 것이니 한국화(韓國畵)란 건 당연하다는 논리다. 본인의 저서에서는 모두 한국화란 용어로 쓰셨다. 1968년 동양미술연구소를 차리고 1970년도부터 한국화 용어주장은 더 확산되어갔다. 그 후 그의 주장과 논리는 많은 분의 호응과 공감을 얻어 결국은 한국화란 말로 고치는 계기가 됐다. 때맞춰 일본에서도 자극되어 일본화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시대였다.

한 학기 강의였지만, 수강생 3명중 사정상 필자 혼자 출석일 때도 있다 보니 자연히 개인적으로도 친밀해졌고, 학교캠퍼스 벤치에서 많은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다.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주셨다. 

“지난번 강의할 때 얘기한 실물을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으니 연구실로 한번 와보소” 나는 낙원동 연구실로 갔다. 그곳엔 진기한 조선시대 서화, 문인화가들의 인장(印章)도 있었다. 모두 진품들을 구경했다. 당시 화단을 주름잡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대원군, 강세황 등이 생전 쓰던 손때 묻은 진품명품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고 귀중한 고서들도 많았다.

학기 강의는 끝났지만, 그 후 청강 선생으로부터 필자에게 또 연락이 왔다. “김형, 내가 주도하고 있는 미술작가 단체가 있지. 작년에 창립했고 이번이 제2회전이요. 내가 추천할 테니까.” “저는 아직 40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감히 청강 선생님과 같이 전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하오나 더 공부한 다음에 뵙는 게 좋겠습니다. 또 저는 서양화이므로 한국화 그룹엔 좀 어색해서요.” “내가 자네와 지내면서 잘 알지. 그리고 이 단체는 한국화·서양화·조각 등 종합이야. 한국화만 고집하진 않지. 출품 준비나 해보소.”

그렇게 해서 쑥스럽지만 청강 선생이 이끄는 ‘제2회 대한미술원초대전’(1978.10.13-10.21 미도파화랑) 그룹전에 처음 출품했었다. 출품작가들은 예상대로 원로급이라 나는 부담되어 이후부턴 슬그머니 빠졌다. 지식과 자료가 풍부한 청강 선생의 선비같은 삶에 많은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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