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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운주사 석불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미

박영택

운주사 석불


얼마 전 운주사에 갔었다. 오랜만이었다. 1990년 12월 24일, 처음으로 운주사를 혼자 찾아갔었다. 홀로 가는 짧고 허정한 여행이었는데 그냥 그 절에 가고 싶었다. 추운 겨울날 시린 냉기가 동상을 앓았던 왼쪽 귓가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날이었다. 몸을 잃은 석불의 두상이 논가에 처박혀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다. 쓸쓸하고 외로웠던 시절에 더없이 쓸쓸한 그곳에 가고 싶었던가 보다. 이후 여러 번 운주사를 찾았다. 갈 때마다 신선하고 이색적인 석불들이 여전했고 일어서지 못한 와불은 누운 채 반겼다. 시간이 지나 점점 손을 많이 타면서 절의 운치는 예전 같지 않고 흩어진 석불들은 정돈되어 있었다. 처음 이 절을 찾았던 순간을 자꾸 추억하게 만들고 있었다.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몰리면, 그리고 손을 대면 댈수록 이내 절은 망가지고 괴이해진다. 나는 그렇게 망가진 여러 절을 우울하게 떠올려본다. 

초겨울에 다시 찾은 운주사는 적막했다.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익숙한 석불과 석탑을 보니 그 시간의 격차가 이내 좁혀졌다. 다시 나는 운주사에 매료되었다. 잠시 잊었던 운주사만이 가진 독자적인 미감에 마냥 황홀했던 것이다. 고요하고 투명한 겨울 한낮의 기운이 오래된 돌의 피부를 완만하게 어루만지면서 그 내부로 함몰되고 있었다. 밝고 선명한 햇살을 간절하게 끌고 들어가는 통에 나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부감 되는 석불과 탑의 전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형태는 사라지기 직전이라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자꾸 시선에서 제 모습을 지우려 하지만 아직은 그 피부에 살아있는 선들이 옷의 주름이나 손가락 마디 등을 터무니없이 지시하고 있다. 강직하고 소박한 선은 어떠한 사심이 개입될 여지를 주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가고 있다. 그것은 또한 눈과 코와 입의 형태를 만들어 보이는 선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박수근의 소박한 소묘 선을 닮기도 한 저 선들은 도식적이고 평면적이지만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선을 그어보는 이가 남긴 듯한 같은 궤적을 보여주면서 자립한다. 이 무심함과 소박성, 야성의 미가 함성같이 울려 퍼지는 석불 앞에서 보는 이들은 무방비가 된다. 그렇게 운주사의 모든 곳에 놓이고 세워진 것들은 길들여지지 않은, 정형화되지 못하고 스스로 알아서 극복한 조형의 기술로 이룬 희한한 성취들이다. 의지와 무관심 사이에서 얼추 일으켜 세워진 돌들이 탑이 되고 불상이 된 것이다. 자연과 인위가 마구 뒤섞여 곤죽이 되고 있다. 기존 사찰에서 접하는 탑과 불상과는 이력이 다르고 감각이 다르다. 나는 이 낯설지만 부드럽고 친근한 미감이 경이로워서 운주사를 찾는다.

우리 미술의 특색으로 흔히 지적되는 ‘무계획적이고 형식이 부족하며 불완전한 채로 있지만 어딘가 자연스러운 것’(그레고리 헨더슨)이라는 지적은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운주사의 석물을 제작했던 고려 시대 지방의 무명 장인들은 대부분 당시 정통 불상 조각의 제작기술과 이론 밖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배움의 길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러한 제도도 부재한 상황에서 석물제작을 맡았던 이들은 스스로, 임기응변식으로 자신이 봉착한 제작상의 문제를 극복해나갔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어떤 원칙이나 법칙을 따르기보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그것을 제작한 이들의 취향이나 자유의지, 타고난 솜씨나 눈썰미가 작품을 결정적으로 좌우했을 것이다. 기존의 규범이나 정해진 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타고난 성품과 솜씨에 기인한 자취가 운주사의 미감을 이룬 진정한 힘이다. 운주사 석불, 석탑이나 조선 시대 민화에는 그렇게 우리 미술의 전형성이 온전히 다 스며있다. 서진 시대 사상가 곽상은 하늘과 짝할 수 있는 아름다움은 바로 ‘소박미’라고 말했다. 『역대명화기』를 지은 장언원 또한 그림의 수준을 5등급으로 나눈 후 최고의 경지를 ‘자연격’이라 했다. 수수한 아름다움이 최고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나는 운주사의 이곳저곳에 흩어진 석탑과 석불을 볼 때마다 바로 저 자연격의 한 경지를 유감없이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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