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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20/ 동시대 미술의 쟁점(장소 1): 장소 문제의 부상

심현섭

공공미술 20/ 동시대 미술의 쟁점(장소 1): 장소 문제의 부상

장소는 언제나 미술의 중요한 거처이자 토대였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동굴, 시장, 신전, 교회, 성당, 미술관 등의 장소 속에 거하였다. 처음부터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시작한 미술이라고 해도 본격적으로 ‘장소’라는 개념이 논의된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고찰은 미술 뿐 아니라 사회과학계 전반에서 이루어졌다. “1980년대 말 이후, 공간적 차원을 단순히 배경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모든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공간에 의해, 공간 속에서 구성된다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에 대한 학문적 중요성이 학계 전반에 퍼졌다.”(권미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유용성이 정치적·실천적 담론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20세기가 공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장소와 공간에 대한 사유의 길잡이는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다.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유는 “인간존재의 장소성 귀환”(Walter Biemel)으로 축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기술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정복하고 개발과 가공을 거쳐 인위적인 방식으로 처분하는 것이다. 사람과 대상 사이에 끼어든 기술조작으로 말미암아 서로 간의 거리가 멀어져 소외되고, 인간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는 예외 없이 자기를 상실하고 오직 기능적 연관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이로써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본성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초래한다. 인간이 존재가치를 유지하면서 서로 이웃으로 거주하고 뿌리내리는 장소인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상실의 시대는 하이데거에게 “현대인의 고향상실”을 의미한다(Brendan O’Donoghue).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정하든 안하든 창공에 꽃 피우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야 하는 식물”이다(Martin Heidegger). 

20세기 들어 일련의 학자들이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는 작업을 전개한다. 공간에 대한 건축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한 크리스찬 노버그-슐츠(Christian Norberg-Schulz)는 형이상학적인 하이데거의 참다운 장소 개념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였다. 공간에 대한 담론이 급증한 데는 공간 연구의 선구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데이비드 하비(D. Harvey)의 영향이 크다. 이후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장소와 공간, 장소감과 장소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본격화한다.

렐프는 장소경험의 본질에 대한 연구의 보완을 위하여 장소의 현상학적 탐구를 시도한다. 그는 장소를 구성하는 요소로 정적인 물리적 환경, 활동, 의미 등 세 가지를 드는데 장소의 정체성으로서 “장소의 의미는 인간의 의도와 경험을 속성으로 한다.”(Edward Relph) 장소성은 “대상으로서 장소가 개인적·집단적 장소경험을 통하여 정체화하여 인간 내면의 의미세계로 융합된”(김덕현) 장소감에서 비롯한다. 렐프는 장소성이라는 개념을 “개개인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확보해주며, 인간이 세계 내에서 뿌리내리고 실존하게 해주는 중요한 근원이라고 하면서” 장소성이 상실해가는 현 세태를 지적한다. “장소의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 즉 무장소성이 지금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들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실존의 지리적 토대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변화란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삶으로부터 뿌리 뽑힌 삶으로 변하는 변화이다.”(Edward Relph) 

장소성이 상실한 상태는 “무장소” 혹은 “무장소성(placelessness)”이다. 장소의 개성을 나타내는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장소성을 추구한다. “누구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일체감을 느끼는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 다시 말해서 인식 가능한 장소 안에 존재하려는 욕구를 타고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장소감은 어쩌다 얻은 멋있는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어떤 것이다.”(Nairn I) 르페브르나 하비는 장소성 상실의 원인을 근대성, 세계화, 정보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등 유물론적인 사회적 배경에서  찾는다. 렐프 또한 유물론적 입장을 수용하여 오늘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무장소성이 어떻게 사회의 경제체제와 연관해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장소성에서 생활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학과 지리학에서 장소를 정치, 사회, 실존이라는 총체적 현상의 맥락에서 탐구하고 인간이 살만한 공간으로서 ‘장소성’을 잃어버린 장소의 범람을 우려하듯이, 공공미술에서도 장소의 정치, 사회, 경제적 함의를 미술적 맥락으로 재구성하여 ‘장소성’을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60년대 이후 공공미술의 역사적 계보를 정리하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장소에 함의된 정치·사회적 의미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권미원의 One Place after Another: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2002)가 대표적이다. 권미원은 60년대 이후 공공미술의 역사적 계보를 인간의 역사가 스며있는 장소를 정치·사회적 기호로서 파악함으로써 장소에 함의된 정치·사회적 의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권미원에게 장소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제도 등 인간의 역사가 맞물려있는 역사의 축적물로서 의미의 함축, 즉 기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권미원의 책 제목이 가리키는 ‘또 한 장소’는 차이 없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장소이다. 이는 ‘장소 정체성’을 상실한 장소로서, 지리학 등에서 말하는 장소이론의 ‘장소상실’로서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한 현대 장소의 특징을 가리킨다. 권미원은 장소성이 살아있는 다양한 장소의 건설을 위해 미술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방법을 장소 특정적 미술을 통해 제시한다. 그가 작가의 유목이 작품의 가치들을 장소로 이동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진정한 경험과 역사적, 개인적 정체성의 소재지로서 장소(place)가 문화적으로 승인받는 결과”로 보는 관점은 장소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의 장소 특정적 미술은 공간과 장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던 동시대 타 학문과 공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공공미술에서 장소의 논의가 물리적 장소 혹은 현장으로서 의미가 비물질화하면서 추상화한 점에 있다. 이런 현상은 공공미술의 논의가 초기 장소의 물리적 요소가 강조되는 ‘공공장소의 미술’에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로 옮겨가면서 제도적 비판 등 사회적 이슈와 과정을 중시하는 비물질적인 공적관심의 미술로 전환한 것과 관계있다.

다음: 공공미술 21/ 동시대 미술의 쟁점(장소 2): 장소의 비-물질화가 낳은 작가의 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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