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성’ 기반의 공공미술집단 《리슨투더시티》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는 실용주의를 내걸고 경제적 성장을 추구하였던 이명박 정부시기에 벌어진 용산 재개발사업 참사를 계기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와 역할을 고민한 박은선의 주도로 2009년에 결성한 행동주의 미술집단이다. 박은선은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을 행동주의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는 행동주의가 예술의 자율성 혹은 고유성을 포기한 채, 사회변화의 도구로만 이해되는 점에 대한 불편함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예술이 사회 변화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예술의 고유함을 잃고 다른 영역에 포섭되거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있다. 그는 특히 행동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예술 활동들이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는 일부 한국적 상황을 비판한다.
이런 한국적 상황에서 박은선은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이 행동주의라는 범주로 일반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나는 박은선의 거부감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미술의 도구화라는 부정적인 개념을 제거한다는 조건 아래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을 행동주의의 맥락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첫째, 행동주의라는 용어를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그것이 미술의 역사적 맥락에서 통용되는 행동주의라는 용어를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에 붙이지 못할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을 행동주의의 역사적 맥락에 포함하려는 의도(행동주의의 맥락에서 벗어났을 때 오는 역사적 상실에 대한 우려이기도 한)가 깔려있다. 둘째, 미술이 사회변화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변화의 원동력이라기보다는 정치적(사회의 모든 분야가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보완하는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미술의 전위적 힘은 물론 그 관계맺음의 방법이 문제가 되겠지만, 사회 각 분야와 관계했을 때만 정치적 변화라는 실제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미술의 주변은 언제나 원칙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행동주의는 사실 이런 세속적인 주변(대중, 행정, 단체, 권력 등)과 조율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정치적 변화를 일궈왔다. 나는 2009년 이후 10년 동안 이어져온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이 그러한 과정, 즉 다른 분야와 연대하면서도 예술을 도구화하거나 다른 분야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분투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박은선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행동주의 옆에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을 놓는다.
《리슨투더시티》는 자본주의 권력이 주도하는 비인간적인 개발을 반대하는 도시생태주의의 입장에서 청계천 을지로 등 도심 재개발 사업에 부정적이다. 또한 자연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4대강 사업, 청계천, 영주 내성천 프로젝트 등 환경보존에 개입한다. 도시, 건축 그리고 자연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리슨투더시티》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수행한다. 이로써 개발의 이름으로 사회의 공동재산인 강, 자연, 도시공간과 같은 ‘공통재’(the commons)에 가해지는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인 권력행사에 전방위적으로 저항한다.
또한 《리슨투더시티》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을 바탕으로 분명한 사회 계층적 정치성을 가지고 현장 중심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는 한국공공미술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명한 사회정치적 발언은 수잔 레이시가 ‘새 장르 공공미술’의 시발점으로 보는 1960년대 미국 행동주의 미술과 새 장르 공공미술의 특징으로서 ‘정치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공공미술을 랑시에르의 식별 체제에 비추어, ‘치안의 공공미술,’ ‘계쟁의 공공미술,’ ‘정치의 공공미술’로 분류한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들은 각기 지배 권력에 의해 구성된 상태로서 치안, 이런 상태의 불화를 발견하고 일으키는 계쟁, 그 결과로 나타나는 피지배 세력의 몫의 회복으로 상징되는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미술을 가리킨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심현섭, 「랑시에르의 정치예술론과 낭시의 공동체론을 통해 본 ‘정치의 공공미술’」 참고). 이 분류에 따르면 ‘새 장르 공공미술’은 정치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의 미술’에 해당하며 《리슨투더시티》 또한 이에 속한다. 따라서 《리슨투더시티》의 예술 활동은 지배 권력에 의해 잘못 분할된 몫의 상황, 즉 치안의 상태에 계쟁을 일으키고 이를 재분배하려는 행위로서 ‘정치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새 장르 공공미술’이 1960년대 행동주의 미술에서 그 기원을 찾듯이 한국의 ‘새 장르 공공미술’의 기원은 1970년대 말 민중미술에 있을 것이다. 이들 미술의 공통점은 사회·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는 정치적 당파성이다. 2009년 이래, 《리슨투더시티》는 <내성천 프로젝트>, <옥바라지 골목 프로젝트>, <청계천을지로 프로젝트>와 성폭력문제, 재난과 장애인 대피문제 등 한국 사회의 이슈에 대한 관심과 개입을 보여 왔다. 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새 장르 공공미술’의 일환으로서 사회적 쟁점을 중심으로 한 공공미술의 실천이다.
오늘날 한국의 공공미술은 오브제 중심으로 지나치게 편중해있다. 이러한 때 중요한 것은 오브제 공공미술과 비-오브제 혹은 비-물질적 공공미술의 균형이다. 한국의 공공미술이 오브제 중심으로 치우친 이유로 국가 제도와 이를 운용하는 관료시스템의 문제, 공공미술의 지나친 국가 주도성을 들 수 있지만 미술인 내부의 입장에서는 공공미술 특히 ‘새 장르 공공미술’ 혹은 ‘정치의 미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와 접근이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비-물질적 공공미술을 새롭게 발견하는 해석행위로서 정치적 선택 즉, ‘사회 계층적 정치성’을 공공미술의 근본적인 성질로 파악하는 관점으로 《리슨투더시티》의 실천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리슨투더시티》는 민중미술 이후 탈역사화 과정을 걸어온 한국미술로서는 의미 있는 미술집단의 출현이다. 특히 미적·사회적으로 특별한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 오브제 중심의 공공미술이 도심의 거리를 채우고 있는 한국 공공미술의 현실에서 《리슨투더시티》가 보여준 정치성을 기반으로 한 ‘정치의 공공미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 이래 《리슨투더시티》가 보여준, 정치적 당파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수행한 지속적인 활동은 한국 공공미술의 자극으로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 이 글은 2023. 09. 23(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리슨투더시티》 미학실천’에서 발표한 내용의 일부로 전문은 박은선 외, 『미학실천: 리슨투더시티 비평집』, 리슨투더시티, 2023.에서 볼 수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I. 서론
II. 쟁점 중심의 공공미술집단 《리슨투더시티》
1. 예술행위로서 담론 생성
2. 쟁점 중심 공공미술의 실천
III. 《리슨투더시티》의 실천에 나타난 특징
1. '사회 계층적 정치성'과 ‘강한 객관성’
2. 《리슨투더시티》의 지속성과 대안역사
3. 자본과 지배권력 문제의 쟁점화
4. 《리슨투더시티》의 연대의식
IV.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