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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 인간 이전 혹은 이후의 풍경

이선영

인간 이전 혹은 이후의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1.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역설의 논리

  

틸란시아(Tillandsia)라는 이국적인 식물을 활용한 작품들은 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하고 아래로 축축 늘어지며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촉각적 표면으로 풍부하다. 김유정의 식물설치 작품들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 그로테스크는 부정적이거나 희극적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 선명한 역설적 측면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로테스크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과 동물의 잡종 형태와 소용돌이치는 덩굴과 꽃을 합쳐놓은 프레스코나 조각장식’을 가리켰다. 볼프강 카이저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에서 그로테스크의 어원을 추적하면서, 그 용어가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 동굴)에서 유래한 라 그로테스카(La grottesca)와 그로테스코(grottesco)에 두고 있다면서, 15세기 말 로마를 위시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굴된 특정한 고대 장식미술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풀이한다. 지금은 널리 쓰이는 그로테스크라는 용어의 식물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은 김유정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정서진 아트큐브에서의 전시전경, 2020년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 장식화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성과와 영향력을 떨친 것은 라파엘로가 1515년에 그린 교황청의 기둥 장식화라고 평가한다. 이 작품에서 덩굴의 잎사귀에서 자라난 듯한 미지의 형상은 종의 구별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 장식화를 직접 감상한 괴테는 ‘도저히 풀어헤칠 수 없을 것처럼 얽힌 넝쿨의 섬뜩한 생명력은 그 자체로도 더이상 과장이 필요 없을 만큼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며, 이미 동물과 식물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전방위적으로 스멀스멀 확장하면서 무엇으로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무화시킬 수 있는 식물의 그로테스크한 속성을 김유정 또한 활용한다. 그것은 정처없이 시작된 드로잉이 그리는 변화무쌍한 이미지와 동형적이다. 살아있는 식물의 설치는 3차원 드로잉을 가능하게 했다. 관상용 식물을 넘어서 대량 등장하는 전시장은 잡초가 무성한 이름 없는 무덤같이, 밤새 소복이 내린 눈 풍경같이 신비로운 정적에 감싸여 있곤 한다. 


칸트 미학적 구별에 의하자면, 아름다움에서 숭고로의 이동이다. 자연이 많이 파헤쳐져 왔기에 이러한 풍경은 신선하다. 문명은 자연을 비롯한 미지의 것들을 자본의 회로에 진입시키려 한다. 불투명했던 자연은 선별과 강화를 거쳐 투명하게 변화한다. 한 시대, 또는 시기를 점령하는 대상의 대열에 자연 또한 직간접적인 자원으로 끼어든다. 예술 또한 과학기술이나 자본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기는 해도 자연의 불투명성을 활용한다. 김유정은 위치전환, 양질전화를 통해 불투명성이 강조된다. 작가는 쓸모의 기준을 변화시키며, 지나친 투명성, 가령 가능주의나 생산지상주의와 역방향을 취한다. 여러 대상에 늘어 뜨려진 식물은 인간이 그어놓은 많은 경계를 가로지른다.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모호한 이 두툼한 덮개는 수많은 경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삶/죽음 사이에 있다. 식물이 가득한 공간의 눅눅한 공기는 미시적인 생명의 활동을 떠올리지만, 인간의 흔적은 오래전에 지워진 모습이다. 



L.A.D에서의 전시전경, 2021년(이하 동일)


뿌리를 내리지 않기에 가능한 이 유목적 존재는 원시와 현대를 넘나들며, 풍부한 비유로 거듭난다. 그것은 인간 이전, 혹은 이후의 풍경, 즉 원초와 종말을 오고 간다. 누군가에게는 원초가 미개발이고 누군가에게는 신성함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종말이 인과응보이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일 것이다. 역설은 김유정의 여러 작품에 내재한다. 그것은 틸란시아에 잠재한, 그렇지만 작품으로 현실화된 것이다.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인위의 산물인 경계는 양면적이다. 경계가 한계로 작동할 때 경계의 위반은 희열로, 질서일 때는 불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문명과 자연의 구별은 금기의 유무에 있다. 금기란 경계를 말한다. 경계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변화는 불가능하다. 경계 밖에만 있다면 삶을 안전하게 영위 할 수 없다. 예술적 표현도 불가능하다. 광기와 예술에 관한 신화적 이미지가 있지만, 예술이 소통인 한, 그것도 언어임은 분명하다. 


물론 경계를 넘어서는 타자, 광기, 바깥 등등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표현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고 한정된 표현을 변화시킨다는 점은 무의식의 발견 이래로 널리 인정되는 바이다. 경계 안팎을 넘나드는 존재태는 표현 불가능할 것을 표현하려는 과제를 수행하는 예술 및 예술가의 방식과 조응한다. 경계는 인간사회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만큼 확실한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분류의 원리에서 미리 결정된 공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체계는 양면성을 가진다. 내적 통일성과 확장성이 그것이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깨끗함(성스러움)과 더러움(불경함)이라는 종교적인 관념을 주제로 해서 분류의 원리라 할만한 것을 연구한다. 그에 의하면 상반되는 범주를 나누는 기준은 철저히 상대적이다. 메리 더글러스는 [순수와 위험]에서 성스러움은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하는 문제에 속한다고 말한다.  




각기 다른 범주의 사물이 뒤섞이는 것은 불경하다. 하지만 인류학의 주장에서 예술이 참고할만한 사항은 ‘모든 분류체계는 반드시 비이례적인 것을 낳기 마련이며, 모든 문화도 자신의 존재조건에 반항하는 사건들에 직면한다’(메리 더글라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애매 모호함은 불쾌한 경험이 아니며, 예술의 풍요로움은 애매함을 이용하는데 있다. 메리 더글러스는 경계선이 불확실한 곳에서는 언제든지 오염의 관념이 출현한다고 보지만, 경계선 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과 접촉하는 것이고 능력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명확한 분류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는 기괴하다. 그것은 괴물처럼 숭배되거나 배척될 뿐 일상적 삶과 조응하지 않는다. 김유정이 작품에 끌어들이는 대상이나 수집물 등은 대부분 일상적 삶의 산물이다. 이국적 식물도 그것이 관상의 대상으로 머무르는 한 그 자체로서는 평범하다. 작가는 평범한 삶에서 찾아지는 것들을 선호한다. 


그렇지만 평범함은 약간의 중심이동을 거치고 그로테스크나 기괴한 분위기를 낳는다. 그로테스크가 문예사조적인 배경을 가진다면, 기괴함은 보다 심리학적이다. 기괴함의 근원이 초월이 아닌 일상에 있다는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기괴한(uncanny)이란 단어는 1785년까지 ‘위험하고 불안전한’이란 의미로 쓰였다고 지적한다. 기괴함에 대한 현대적 분석은 프로이트에 의한 것인데, 프로이트에 의하면 기괴함은 ‘오랫동안 잘 알고 있고 친숙했던 것에 대한 섬뜩한 느낌’을 의미한다. 기괴한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친숙한 것, 정상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적 규정이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면 관계성에 의해 규정된다함은 어떤 단일화된 리얼리티에 대한 모든 재현을 전복한다한 의미다. 로즈메리 잭슨은 엘렌 식수스의 분석을 인용한다. ‘기괴함은 관계적 기표이다. 왜냐하면 기괴한 것이란 합성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물들 사이의 틈새에 스며들고 우리가 단일성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그 지점에서 하나의 간극을 강력히 주장한다’(식수스) 




식수스는 기괴한 것이 주는 낯설음을 ‘단순히 전치된 성적 불안이 아니라, 순수한 부재, 죽음과 대면하는 시연’으로 제시한다. 죽음은 직접적으로 묘사될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을 상징하는(memento mori) 형상이라는 것이다. 로즈메리 잭슨의 해석은 일상 뿐 아니라 종교같은 초월적인 영역도 해당된다. 그에 의하면 불가사의한 신비에 대한 종교적 감각은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괴함의 감각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둘의 심리적 기원은 동일하다. 로즈메리 잭슨은 기괴함이 불온하고 공허한 영역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그는 기괴함을 ‘신성한 이미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함으로써 야기되는 텅 빈 공간’이라고 보는 하이데거를 인용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신의 공간 안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에 비례해서 기괴한 무언가가 발생할지도 모른다’(하이데거) 김유정이 부엌과 욕실, 침실, 거실 등에서 흔히 발견되는 가장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정반대의 것으로 뒤집는 방식은 심리학부터 미학, 인류학부터 종교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석의 그물망에 걸쳐 있다. 


그것은 우연찮게 발견한 이 식물이 단순한 소재를 넘어서 작업 전면을 차지하며 확장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랫동안 해왔던 프레스코 작업으로 먼지가 많이 날리는 작업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선택된 이 반려식물의 비중은 점차 커졌으며, 이제 작가는 건물 전체를 뒤덮을 프로젝트까지 상상한다. 전시가 끝나도 작가의 머릿속에서 이 식물은 계속 자라나고 있다. 작가에게 작품이나 전시는 그 너머를 기약하는 하나의 경계일 수 있다. 경계가 없다면 그 너머도 없다. 인간의 삶에 의식(儀式)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의식은 형식화되어 실질적으로는 사라지고 있다. 근대 이래로 예술이 종교의 계승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 또한 예술에서 상징적으로 보존되어왔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문화로 경량화되거나 사라지는 것은 의식의 쇠퇴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는 코드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주의가 공동체에게 상징적 우주를 제공해 주었던 의식을 대체한다. 




금기도 위반도 그 힘을 잃었다. 김유정의 작품에서 식물은 설치는 물론, 평면 작품에서도 호시탐탐 제 영역을 넓히려 한다. 앨런 와이즈먼의 저서 [인간 없는 세상]과 김영하의 식물 세력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영감을 받은 [식물에도 세력이 있다](소피스갤러리, 2018)는 식물성에 내재한 수동성이나 정지의 관념을 걷어낸다. 식물이 생명에너지의 기원이 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인류의 상상력 속에서 식물 자체가 부활과 재생의 모델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마이클 조던은 [초록덮개]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함께 발견된 수많은 꽃가루 유적의 예를 든다. 즉 그것은 시신이 꽃으로 둘러싸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의 영혼에게 회복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식물은 동물만큼의 활동성이 없는 대신에 정신적인 면, 즉 신비를 내포한다. 부활과 재생이라는 끝없는 변화는 생/사를 초극하는 신비의 차원이다. 마이클 조던은 빙하기의 원시인들에게 봄은 정신적인 부활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화는 고대인들이 겨울과 긴 가뭄이 이어지는 시기에 일어나는 자연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이클 조던은 죽었다가 소생하는 신이라는 고대의 전통은 기독교 시대에도 살아남았다고 기술한다. 김유정에게 이 특이한 식물은 처음에 환경 정화의 목적으로 선택되었지만, 곧 표현으로, 의미를 넘어 존재 그 자체로 변모했다. 대상이나 사물과 다르게 생명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낳는다. 대부분 전시되는 장소성에 충실한 연극적 연출은 그 내부로 들어온 관객을 참여시킨다. 여기저기 걸쳐 있는 식물이 오감에 호소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수분을 필요로 하는 식물의 생태에 맞춰 관객은 일종의 돌봄 행위에 참여하게 된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잠식항](정서진 아트큐브, 2020) 전에서 관객들은 비치된 분무기로 전시장에 가득한 식물에 물을 뿌려 주었다. 




식물은 전시 기간 동안 조금씩 자라거나 시들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은 예술 또한 삶처럼 끊임없이 변화함을 말한다. 단선적 사고를 벗어나 무엇이 ‘발전’인지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변화 또한 경계처럼 양면적이다. 변화는 좋은 것이든 아닌 것이든 일단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변화이다. 첫 개인전 [Reading Walls and Shadows](관훈 갤러리, 2003)을 시작으로, 요즘 작업을 ‘잠식’하고 있는 틸란시아는 2015년에 인천 아트플랫폼에 입주하면서 발견했고, 개인전에서는 [조각난 숲 Carving the Grove](인천아트플랫폼, 2016)에 처음 등장했다. 2021년 동일한 장소에서 진행된 기획전에서도 다시금 선보였다. 최근 작품에서 설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인류에게 치명적 상처를 안겨준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중반기와 2021년 초, 그리고 올해 중반에 세 번의 개인전과 기획전을 연이어 열면서 자신에게 치유와 돌파구가 되었던 식물의 무대는 또다른 의미로 확장되고 있다. 


식물은 공간 전체를 잠식하곤 하는 대규모 설치뿐 아니라 사진과 프레스코 등을 통해 다양한 서사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형식의 작품들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의미를 보충한다. 뿌리 없는 존재는 본질과 중심 또한 부재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될 수 있다. 틸란시아는 관엽식물로 하얗게 꽃도 피우는 등 나름대로 성장이라는 것을 하지만,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모호한 형태는 원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대 철학에서 리좀과 수목구조의 비유가 설득력을 얻은 이래,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해체된 리좀적 방식의 긍정성이 부각 되어왔다. 이 뿌리 없는 존재는 극한의 조건에서 살 수 있는 비유로 인해 인간 이후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느 순간 강화된 인간과 자연의 적대적 관계를 생각할 때, 문명에게는 종말론적 이미지가 자연에게는 원래 상태로의 복귀가 될 수 있다. 상처와 치유의 관계 또한 어느 입장에 서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김유정은 명확히 어느 편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단지 예술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외에 어떤 편도 들지 않는다. 작가는 중성적인 입장에서 여러 상황을 연출하고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 실제로 이 남국의 식물은 큰 나무를 뒤덮으며 공생하는 종으로 알려져 있다. 도시의 주조색인 회색빛 콘크리트 벽에 기묘하게 어울리는 틸란시아는 프레스코화로 표현한 식물원처럼 인간의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는 자연이다. 프레스코 작업의 특징인 표면을 긁어낸 상처를 식물이 덮는다는 서사는 문명의 주변부로 밀려난 자연 복귀를 긍정적 측면을 암시한다. 그러나 복귀된 자연이 과거에 인간이 그러했던 것처럼 선을 넘는다면 긍정은 부정으로도 전환될 수 있다. 작가는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 대신에 어디에도 갈 수 있는 그 식물의 독특한 생태적 조건을 활용하여 재현되지 않는, 또는 재현될 수 없는 무엇을 생성과 소멸의 과정으로 제시한다.

  


2. 식물의 제국

 

2020년 인천 정서진 아트큐브에서 열린 [잠식 항(航) Submerged Vessel] 전은 바다에 인공적 물길을 낸 아라뱃길의 시작점이 있는 장소성을 살린 식물 설치작업이다. 활짝 열린 입구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전시장에서 수명을 다한 오래된 배와 항구에서 쓰였던 물건들이 활용되었다. 살아있는 식물을 푹 뒤집어 쓴 채 일부를 노출한 오래된 사물들은 이 뜻밖의 만남에 의해 재생되는 듯하다. 사물과 자연이 만나 예술이 되었다. 작가가 활용했던 ‘무동력 배, 물류창고의 운반 상자들, 구명, 부환, 조타장치, 핸들 조타기, 향해등, 통발 어구’ 등은 일반인들에게는 그자체로도 낯선 물건들이며, 이국적 식물과의 만남으로 더욱 신기하다. 그로테스크나 기괴함이라는 관념이 무지와도 관련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배와 식물은 밀접해 보이기도 한다. 이 전시에 쓰인 회색빛 수염 틸란시아 또한 자생이 아니라 수입 식물이니 배를 타고 오지 않았겠는가. 




전시공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항해와 관련 물건들은 바닥과 벽을 모두 활용하여 가변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어떤 대상도 융통성 있게 감싸 안을 수 있는 식물은 복슬복슬한 실루엣을 남긴다. 기능을 가진 물건의 여러 면과 각은 둥글려 있다. 날것이었으면 을씨년스러울 수 있는 풍경이지만,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처럼 포근하다. 2021년 1월에 열린, 서교동에 위치한 복합 문화공간 L.A.D의 개관전 [공유지]는 항구와 마찬가지로 물과 연결되어 식물이 호출된다. 원래 주방이 자리했던 장소에 다시 세팅된 주방과 욕실 물품은 보다 일상적인 공간과 관련된다. 식물은 심미적 효과를 자아낼 거리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도 식물은 변모와 재생의 상징이다. 김유정의 작품에 내재된 양면성은 파괴와 건설이 동일한 과정의 양면인 것과 같다. 사람들이 모이는 일상공간 아래에 자리한 지하 전시장은 프로이드식으로 구별하자면 무의식의 영역에 해당된다.

 

관객은 동굴처럼 어둑한 전시장으로 내려가면서 의식(意識) 아래로도 내려가는 것이다.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보게 된다. 작가는 이를 위하여 거울이라는 대상을 특별히 비워놓기도했다. 이전에 가정집 지하실로, 욕실이나 주방도 갖춰져 있던 장소는 또 다른 사물/작품으로 채워진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문명)과 창조할 수 없는 것(자연)이 만나 미지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현대미술은 예술과 일상 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의 영역에 주목했다. 미술사나 작가의 의도로부터 출발한 의미로 과포화된 예술, 그리고 명확한 기능과 쓸모와 가격을 가진 일상이 아닌 곳에 사물이 있다. 특히 시간의 더께를 쓴 오래된 사물은 더 시적이다. 이러한 사물은 실제로 수집되거나 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집된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일상 속에서 발견된 익숙한 대상에서 낯설게 다가오는 기억의 편린이나 이미지들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전시에서 구석구석에 걸려있거나 놓인 사진들은 큰 규모는 아니어도 메인 설치 작품과 대화적 관계를 가진다. 사진이 회화의 경쟁자로 미술사에 처음 등장했을 때 세상의 구석구석을 이미지로 수집하는 사진의 능력은 탁월했다. 시각 예술의 역사에서 사진이 더 오래된 매체인 회화를 흉내내려 했다면 회화는 사진의 수집 능력을 활용했다. 사진은 영감의 근원으로 기억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또는 그 자체로 활용되었다. 김유정은 수집된 사물을 식물과 함께 연출한 설치작품 사이사이에 사진으로 수집한 식물을 배치했다. 배수구 옆의 수분이 잠시 모이는 틈 사이에 자리한 식물 사진들은 문명이 밀어낼 때까지 밀어낸 극단적인 시공간 속에서도 비집고 나와 있는 존재의 생명력이다. 설치작품의 맥락에서 보자면, 식물이 고군분투하는 초창기 모습일 수 있다. 흔히 잡초라고 말해지는 식물들은 결국 이러한 틈새들을 넘어서 전체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김유정이 선호하는 소재는 오래된 물건으로 전시장에 가보면 버려진 물건을 수집해서 활용한 것들이 많다. 실내화부터 어선까지 그 규모와 종류도 다양하다. 원래 평면 작업을 주로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만난 틸란시아는 기존의 작품을 실제 공간에 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오래된 집의 벽을 잠식하는 담쟁이 식물 같은 이미지는 이미 작가의 이전 그림 속에 있었던 것이다.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식물은 형태로든 그림자로든 공간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LAD의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작품 [반그늘 잠식지_물의 시원1](2021)의 골조를 이루는 사물은 씽크대, 가스렌지, 냉장고, 전자렌지, 밥통, 주전자 등 각종 주방 기기들이며, 선반이나 줄 같은 구조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작가가 직접 사용했던 것이거나 수집한 것들이다. 요즘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주방 기기들이 매물로도 많이 나와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시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이 화분 안에 있었다면, 주방 기기들 위에 식물이 없었다면 극히 자연스러웠을 풍경이지만 모두 자기 자리를 벗어나 있거나 은폐되어있음으로 인해 낯설게 된다. 태양의 방향을 향하는 대부분의 식물과 달리, 반그늘 속에서 아래로 축축 처지면서 중력에 반응하는 이 식물은 멜랑콜리한 느낌을 준다. 특히 방과 방사이로 늘어진 줄까지 잠식한 식물은 오래된 정지의 시간을 증거 한다. 매일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고 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했을 개수대는 우묵한 지형처럼 드러난다. 인간적인 삶은 또다른 삶에 의해 잠식된다. 작품 [반그늘 잠식지_물의 시원2](2021) 또한 부엌처럼 물이 있었던 공간을 전제로 한 설치물이다. 머리가 닿을 듯한 나지막한 공간에 자리 잡은 욕조, 변기, 선반, 거울, 세면대 등 또한 부엌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직접 사용하거나 수집한 물건들이다. 세면대와 변기, 욕조 등이 기능에 충실한 맨들맨들한 표면을 감추고 있다. 


덥수룩한 식물 사이로 스테인레스 스틸 재질의 부속품 일부가 날카로운 빛을 발한다. 식물은 욕실의 거의 모든 사물을 덮었지만, 위로 비스듬하게 걸린 거울과 작은 수납장의 거울 표면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다른 욕실 물건에서 조금씩만 드러나는 빛나는 표면은 여기서 온몸을 드러낸다. 거울은 복제에 근거한 문명의 총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할만 하다. 또한 그것은 마주한 이의 자아를 상상하게 하는 작은 무대가 된다. 일종의 무대 속의 무대인 셈이다. 광물질적인 날카로움이 복슬복슬한 식물의 피막과 비교된다. 기능주의를 위해 벌거벗었던 사물의 피부를 따스하게 덮는 식물은 치유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둑한 조명 때문에 그림자도 강조되는데, 사물과 식물의 일체화가 강한 경우에 번진 선 같은 느낌으로 벽과 바닥에 ‘그려진다’. 슬리퍼 위에도 덮여있는 식물은 부재감을 강조한다. 김유정의 작품은 부재감을 환상성과 연결시킨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환상적인 것의 핵심을 기표와 기의 간의 분리라고 말한다. 무엇인가 숨긴 듯 엉뚱한 외피를 걸치고 있는 선, 면, 그리고 덩어리들은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킨다. 표면 아래에는 무엇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표면과 연속성을 가질 것이라 믿어지지는 않는다. 핵심과의 연결이 끝없이 유예되는 과정은 초현실주의적이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은 현존을 부재로 대체시킴으로써 비의미의 영역, 즉 죽음을 끌어들인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괴한 것은 문화적 연속성을 위해 억압되어야 하는 충동을 표현한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귀환하기 마련이다. 프로이트는 기괴하거나 죽음을 환기시키는 모든 것을 문화적 금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로즈메리 잭슨은 애드가 앨런 포의 환상적인 작품들의 예를 들면서 심리적 공포와 원시적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봉쇄된 곳, 황무지, 지하실, 어두운 장소라는 고딕 지형학을 도입한다고 본다. 


하지만 현대의 작가에게 고딕적 지형학은 악마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부재로 이해된다. 김유정의 작품은 고딕적이기 보다는 ‘적당한 재현물을 가질 수 없으며, 그리하여 모든 것이 좀 더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로즈메리 잭슨)만을 암시할 따름이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면 그것은 이름과 형태가 없는 어떤 것이다. 이름이 붙여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추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이나 악으로 명명되는 것에 앞서 존재한다. 익명의 존재, 형태 없고 형식 없고 이름이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공포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김유정의 작품은 분류와 명명이 가능하기 위한 경계가 끊임없이 해체되는 상황을 은유한다. 부엌과 욕실을 잇는 중앙 공간 벽에 설치된 선반 위의 화분이 있는 작품 [풍경이 된 정물_보여지기 위한 Ornamental](2021)은 다른 식물처럼 화분 안에 갇혀있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지 않는 이 존재는 전시공간 여기저기를 연결하는 선을 따라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듯하다. 




화이트 큐브와 달리 작은 칸막이 공간이 많은 장소에서 식물을 끊어질 듯 이어지며 사진, 회화, 설치 등 여러 장르에 포진해 있다. 식물설치 작업은 화이트 큐브보다는 삶의 공간, 중성적이기보다는 흔적이 있는 공간과 잘 어울린다. 전시공간이 화이트 큐브라면 그자체가 하나의 방처럼 연출될 수도 있다. 2018년 개인전 [식물에게도 세력이 있다](소피스 갤러리)의 작품 [세력도원](2018)은 한 공간을 침실로 가정하고 식물로 뒤덮었다. 포근함과 부재감이라는 상반된 감성이 공존하는 작품이었다. 선적 요소 때문에 선호하게 되었다는 틸란시아의 선은 이전의 선을 지우는 또다른 선, 그렇지만 고정됨 없이 생멸하는 선, 느릿하지만 변화의 와중에 있는 살아있는 조형적 요소가 된다. 2021년 인천아트플랫폼의 기획전에 출품된 [야생전도]는 건물 두 개 층을 횡단하는 풍경이다. 산수화를 볼 때 그 안으로 들어가서 소요하고 싶은 생각을 실제 공간에서의 설치작품으로 구현한다. 


전시공간 전체는 틸란시아의 촘촘한 선들이 펼쳐지고 접혀지는 동양화의 여백같은 모습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식물로 그림을 그린 듯해 틸란시아 산수화로 부르기도 하며, 야생 풍경으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작품 [야생전도]는 2016년 [조각난 숲](인천아트플랫폼)에서도 실험적으로 시도된 바 있다. 이전의 가변설치 작품 [틸란시아](2016)가 식물을 하얀 벽에 산수화처럼 걸쳐놓았다면, 2021년 같은 장소에서 다시 설치한 작품에서는 규모를 더욱 크게 하여 보여지는 산수를 넘어서고자 한다. 작품 상단부는 산의 뼈인 광물질의 실루엣을 따라 흐르는 식물이지만, 아래는 쑥 빠져버린 모습이다. 유토피아적인 산수화라기 보다는 홍수로 떠밀려 내려온 부유물같은 느낌도 있다. 중력의 작용은 받지만 뿌리 없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바닥은 없다. 심연도 없다. 전시공간이라는 한계 외에는 틀이 없는 생물 설치작업과 달리 라이트박스를 활용한 작품에서 식물은 내부에 들어가 있다. 




진짜 식물이 사용되지 않아 규모를 환경적 차원으로도 확장하는데 더 용이할 수 있다. 2020년 광교아트스페이스의 기획전 [뜻밖의 초록을 만나다] 전에서는 한참을 걸어도 계속되는 벽같은 스케일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LAD에서는 관객 동선의 맨 마지막에 위치 한 공간에 설치되어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상념에 감기게 한다. 작품 [재생 숨](2021)은 수집된 책장을 라이트 박스로 삼고 그 내부에 센서를 통해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조식물인 자리한다. 나지막한 천정 모서리에 마주 보고 설치한 라이트 박스 안의 식물은 관객이 다가가면 반응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다. 작가가 직접 우즈베키스탄에서 녹음해온 새소리도 들린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음영의 농담으로 보여지는 그림자의 톤들이 새벽 안개 사이로 바람에 흔들리는 살아있는 듯한 자연풍경을 체험하게 하며’...‘공간에서 강하게 투과되는 빛 사이로 서정성이 짙은 새벽 숲과도 같은. 치유의 정원’을 의도했다고 밝힌다. 


문풍지에 비친 식물같은 입체설치물은 현대 광고판의 형식과 동양적 정원의 느낌을 결합시킨다. 보통 라이트 박스는 광고판으로 많이 이용한다. 나무틀에 덧씌운 천도 간판에 많이 활용되는 천이다. 라이트 박스 안의 식물은 모조 식물이지만 흐릿해서 진짜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다. 빛나는 하얀 바탕에 비치는 푸릇한 기운은 그것이 그림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하얀 여백 위에 그려진 동양화 같은 모습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전면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한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의 필요에 종속되었다. 관상용 또한 자연에서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생산’한다. 만약 인간이 정글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결코 식물은 저렇게 얌전한 모습이지 않을 것이다. 현대 도시에서 식물은 인간에게 길을 비켜준다. 인간의 계획에 따라 심어지고 뽑힌다. 그것도 유행을 타서 주기적인 폐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품은 한 겹 가려진 모습이기에 특이한 형태의 틸란시아가 아니라 보다 전형적인 식물의 잎이 선택된 듯하다.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전경, 2020년(이하동일)


작가가 주로 활용하는 틸란시아는 남쪽 지방의 식물로 공기정화나 관상용 등으로 개발, 또는 쓸모가 발견되어 원래의 서식지를 벗어나 또다른 소비의 회로에 진입한 것이다. 그것은 김유정의 작품에서 큰 나무를 뒤덮고 사는 원래의 생태를 복구하려는 방향성을 가진다. 자연은 인간이 건드리기 이전의 모습으로 흐트러트린다. 그것은 인간적 삶의 흔적들을 잠식한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회복이다. 김유정이 자신의 작품 속 식물의 모습에서 그로테스크의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것은 인간보다는 자연의 편에 설 때 가능한 관점이다. 볼프강 카이저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에서 그로테스크의 양가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유물로부터 영감을 받은 특정 양식의 장식미술을 가리키는 단어 ‘그로테스코grottesco’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희적인 명랑함이나 자유로운 환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와 대면할 때의 긴장감과 섬뜩함 또한 의미했다. 


여기서는 사물, 식물, 동물, 인간의 영역에 대한 정확한 구분, 정역학의 질서, 대칭의 질서, 자연스러운 크기의 질서도 사라지고 없다. 김유정의 경우 구불거리는 식물문양이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식은 아니지만, 대상을 덮는 것만으로도 극적인 변형이 가능하다. 어떤 형식의 변형이든 그 결과는 생경해진 세계이다. 볼프강 카이저에 의하면 그로테스크, 즉 생경해진 세계란 우리가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이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변해버린 세계에 머물 수 없음을 감지한다. 말하자면 그로테스크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공포이다. 생경한 세계는 꿈꾸는 자의 눈 앞에서나 공상 속에서 혹은 잠과 깨어남의 중간쯤에 보이는 어스름한 환상으로부터 탄생한다. 볼프강 카이저는 ‘화가의 꿈’으로도 말해지는 그로테스크의 창작이란 곧 불합리한 것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인조식물을 사용한 라이트 박스 작품 또한 그것이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 경계가 모호하게 다가온다. 라이트 박스로 사용되는 사각 틀은 책장 뿐 아니라 보다 고풍스러운 사물인 자개장 등인데, 그 또한 자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짧은 유행을 마치고 폐기 수순으로 돌아선 것들이 작품을 통해 재생된다. [잠식 항(航)] 전에 출품된 [재생_숨Recycle_Breath](2020)은 자개장 서랍이 활용된다. 버려진 물건은 작품으로 되살려졌고, 이때 식물의 재생이라는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무엇인가 담았던 오래된 가구는 이제 심미화된다. 그렇지만 김유정의 작품에서 서랍은 계속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가로로도 담고 세로로도 담는다. 이제 그것은 자연을 품고 그 스스로도 자연화 된다. 물론 그 안의 식물은 인조지만, 그것은 사물이 작품을 통해 또다른 시간성으로, 즉 완전한 정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더딘 시간 안으로 봉인됨을 말한다. 


라이트 박스를 건축적 규모로 키운 이전 전시 작품 [숨](2016)에서 관객은 장면을 본다기 보다 그 내부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받는다. 식물/이미지가 밖으로 나와 있든 안에 들어가 있든 김유정의 작품은 규모를 키워도 밀도가 흐려지지 않는다. 김유정의 또다른 작품군인 프레스코화는 석회벽이라는 무기물적 재질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는 듯한 재료라는 점은 비슷하다. 상처와 치유라는 은유 또한 연속적이다. 프레스코는 회벽이 마르기 전에 수성안료로 고착하여 칼슘막을 형성하는데, 김유정은 마르기 전에 뾰족한 것으로 표면에 상처를 내면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석회벽이 마르기 전에 긁기의 외상적 행위’를 통해 ‘현재 우리 삶의 기본적인 상처 치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왔다’고 말한다. LAD의 벽에 걸린 작품 [Incubator](2014)는 신식 건물의 눈구멍처럼 뚫린 창문에서는 식물이 삐져 나와있다. 그 안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작가의 눈에 띄었던 파주의 어린이집은 삶의 온기나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위에서 억누르는 듯한 어두운 공간 또한 그런 느낌을 강조한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개체에 죽은 지식을 이식하는 교육과정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있다. 그것은 그로테스크를 환상적인 것과 풍자적인 것으로 나누는 볼프강 카이저의 구별에서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환상이든 풍자든 현실이라는 중심과의 관련 속에서 생겨난다. 새겨진 풍경은 평생을 계속될 교육이란 몸에 무엇인가를 새겨넣는 것과 같음을 암시한다. 작품 표면은 여러 시기에 새겨진 듯한 생채기들로 가득하다. 같은 제목의 시기가 다른 작품에서도 창문마다 식물이 삐져 나와 있는 스크래치로 뒤덮인 건물은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작품 [온기](2016)는 식물원 풍경이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국적 장소라기 보다는 낯선 모습이다. 실내에 있기에는 다소간 큰 개체들은 어디선가 이식되어온 존재들이다. 식물원은 분류하고 명명되는 자연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자연의 질서는 인간의 질서로 환원된다. 인간의 규칙은 자연의 법칙에 비해 훨씬 상대적이다. 작가는 식물원의 구경꾼들을 삭제한다. 식물원 이미지 또한 설치작품에서처럼 인간 없는 세상의 고즈넉함, 또는 평화로움이 있다. 인간 이전 혹은 이후의 비전은 인간 바깥에 존재해온 타자를 호명한다. 줄리언 페파니스가 [이질성의 철학]에서 말하듯이,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성찰은 오래된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전(前)현대적이면서 탈(脫)현대적이다. 줄리언 페파니스는 대표적인 ‘이질성의 철학’자인 미셀 푸코를 인용한다. 푸코는 인간의 죽음을 말한 철학자이다. 그는 [사물의 질서]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은 오그라든 자연이나 계층화된 역사처럼 인간 속에 박혀있지 않는다. 인간과 관련하여 그것은 타자이다. 인간으로부터 태어나지 않고 인간 옆에서 동일한 새로움으로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타자이다’라고 말한다. 



타자들을 끌어내려는 새로운 움직임에 예술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예술 자체가 타자적이기 때문이다. 프레스코화는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퇴색된 모습이지만, 자연의 풍부한 질감이 가득하다. 원래 벽과 일체화된 회화인 프레스코는 유화처럼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벽의 속성이 강조된다. 마치 벽을 수집한 것처럼 말이다. 스크래치 기법은 유적지처럼 오래된 사물의 표현에 적합하다. 그것은 문명의 자연화를 말한다. 프레스코화들이 걸린 공간에 같이 있는 사진작품 [콘크리트 정글 Urban kingdom](2021)은 자연에 철벽을 친듯한 회색 도시에서 가까스로 자리한 풀들이 있다. 주로 버려진 것, 오래된 것을 수집하는 작가의 경향을 볼 때 문명의 빈틈에 서식하는 식물들 또한 (사진적)수집의 대상이다. 설치작품들과 함께 수집된 식물 사진을 보면 식물들은 틈새들을 벌리고 채우며 때가 되면 전체를 차지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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