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자혜 / 단절되며 연결되는 시공간

이선영

단절되며 연결되는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자혜의 작품에는 해변처럼 시야가 탁 트인 장소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서있는 야자수 바로 옆에는 노을지는 붉은 하늘이 배치되어 있곤 한다. 풍경은 장소의 가치를 알리는 중요한 지표이다. 대개 그런 풍경이 가능한 곳의 실내 또한 넉넉하다. 실내여도 넓고 환하고 깨끗하다. 인적은 없고 주변의 빛과 그림자만 살랑거린다. 푸른 하늘과 물을 반사하는 평면들이 상호 상승효과를 발휘한다. 천정까지 이어진 통가림막은 보이는 것 이상의 또 다른 절경을 약속한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의자(그리고 책상이나 조명)은 외적 풍경이 내적 심상과 연동됨을 알려준다. 다양한 계열의 푸르름으로 가득한 화면은 복닥거리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늘거리는 커튼이나 바닥부터 휴양지같은 풍경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은 도시적 시점에서 본 자연이다. 자연은 대개 구조와 구조 사이에서 부분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도시 풍경 자체가 추상에 기반하며, 순수한 추상적 요소 또한 존재한다. 




 between the curtains_91.0x91.0cm_oil on canvas_2020



그럴듯한 풍경이지만 여기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은 없다. 바닥을 발로 디딜 수 없는 반영상으로 채운 작품들은 그 점을 더욱 강조한다. 바닷가로 통하는 창문이 있는 작품에서 이편의 바닥 또한 풀장의 물 같은 느낌이다. 바닥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얕은 수면이 잔물결을 일으킨다. 식물 같은 자연물 또한 재현에 충실한 부분은 조금이며, 대부분 하얀 벽이나 푸른 물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처리되어 있다. 연못이나 분수대 등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 등은 자연의 현존을 암시한다. 직선으로 이루어진 자못 견실한 건축적 구조나 실재의 대표라고 할 만한 자연 모두 불확실하게 다가온다. 김자혜의 풍경에는 도약과 비약의 지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원래 그림은 실제로 완보할 수 없는 가상의 장이지만,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그러한 속성을 가속화시킨다.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계단은 문, 창문, 거울, 그림 등과 더불어 잠재적 이동을 약속할 따름이다. 


공간이 또한 시간이라면 이 작품에는 하루의 여러 시간대가 공존한다. 여러 시공간들은 잘린 직선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연결하기 위해 자른다. 그림의 틀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과 사선을 지지해주며, 부드러운 천 소재의 커튼이 기하학을 완화시켜 준다. 다른 장소들로부터 비롯된 다양한 반영상들이 교묘하게 짜깁기된 작품은 언뜻 단일한 푸른 풍경처럼 보이지만, 직선 또는 사선으로 세워지거나 바닥에 깔린 거울들이 각을 맞춰있다. 휴양지의, 또는 그에 준하는 풍광들이 섞여 있는 작품들은 이국적이긴 하지만, 탐험가만 도전 가능한 오지의 자연은 아니다. 그곳들은 쫙 깔린 육해공 교통 인프라를 통해 매끄럽게 도착할 수 장소들로 보인다. 풍경은 여러 근심을 자아낼 인간사가 깔끔하게 정리된 시공간들로 뚫려있다. 여기에는 불연속을 통한 연결이라는 역설 어법이 있다. 부조리한 관계로 맞붙은 경계들로 이루어진 광경에서, 거기로 갈 수 있는 시각적 징검다리는 부재하다. 




between vertical line_90.9x65.1cm_oil on canvas_2020



boundary stair; for potential movement_162.2x112.1cm_oil on canvas_2020



문, 창문, 거울, 그림, 얇은 수면 같은 반사면들은 공간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것들은 단지 풍경의 시각적 요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gate)’과 같이 작동한다. 작가에게 그림은 그자체가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문의 역할을 한다. 여기에 좌우로 접히고 상하로 늘려지고 급작스럽게 끼어드는 평면들이 가세한다. ‘순수’ 회화에서 금기시된 패턴이나 장식도 배제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금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뛰어넘고자 하는 여러 경계에는 회화와 디자인/공예도 포함된다. 이미 그러한 경계는 사라졌는데, 그것이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이전 시대에 그어진 경계에 안주하고 있는 기득권의 입장일 따름이다. 모더니즘에서 (단순한)장식과 (심오한)조형성을 구별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경계는 미학적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선명하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공간이 혼재하는 상황은 마치 압축파일과도 비교될 수 있다. 김자혜의 작품은 가상현실 또한 비중이 높아지는 현대에 그러한 또 다른 현실에도 적용될만한 시공간적 상황을 보여준다. 


요컨대 유화로 그린 그림 안에는 순간적인 시공간 이동이 편재하는 인터페이스같은 국면이 존재한다. 공간은 시간과 연동되므로 복잡한 공간은 여러 시간대를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층(Layer)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층은 순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지질학적 시간대와 달리 이 층들은 매우 얇다. 하지만 차이를 각인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 안에서 운동은 효과로서 산출된다고 본다. 차이들로 가득한 강렬한 세계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 층과 층 사이는 여백처럼 보일만큼 크기도 하고 바늘 꽂을 틈도 없이 맞닿아있기도 하지만, 그 불연속 지대가 변화의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르네 톰은 [카타스트로프의 과학과 철학]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불연속의 공간을 연구한다. 그는 이 불연속의 점을 ‘카타스트로프의 점’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의 변화는 단순한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clouded tree_130.3x80.3cm_oil on canvas_2020



Far beyond the boundary_224.2x145



르네 톰은 어떤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현상을 기하학화하는 것이라고 보지만, 한계의 전체적인 진화는 각각이 질적으로 상이한 본성을 지니는 갑작스러운 비약에 의해 일어난다. 따스한 색감의 사물이 군데군데 배치된 작품은 물을 비롯한 여러 반영 상들이 바닥에 깔려있다. 공간을 경쾌하게 가로지르는 조형 요소들은 시각적인 산책이 가능하다. 그러나 면과 면 사이에 내재한 간극은 합리적인 공간과는 거리가 있다. 간극과 균열은 보다 커져 여백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명암법이 적용된 하얀 커튼이 제쳐지고 풍경이 보이지만, 그 안쪽을 실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공간성을 보여준다. 대지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 공중에 붕 뜬 듯한 공간들의 조합이다. 순수 여백의 공간도 보인다. 실제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기저 면은 좁거나 부재하다. 노랑, 빨강, 파랑 등 발랄한 팝적인 분위기의 여러 실내의 장면들이 모인 작품은 바닥이 없다. 많은 작품에서 바닥은 반영 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공중에 붕 떠 살고 있는 현대를 반영한다. 초고층 빌딩의 거주자들은 자신의 바닥이 누군가의 천정이다. 토지 소유권은 1/n로 설정된다. 서로 다른 층들로 이루어진 다차원 공간 속에서 ‘평면으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시간은 멈추게’ 된다. 건물이나 물건으로 대변되는 인공물이 이 직선적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자연물은 변화하고 있다. 작품 속 식물, 물, 구름은 그자체가 유동적이며, 반영 상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자연은 이제 그 자체의 본질을 가지기보다는 막에 싸인 듯이 거듭되는 해석을 통해서만 자신의 몸체를 드러낼 것이다. 또는 작품에 간혹 등장하는 계단처럼 인식의 층을 통과해야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작가가 ‘퍼즐과 레고’와도 비교하는 짜 맞추기 놀이는 그리기 만큼이나 깊은 몰입을 자아낸다. 드로잉에 해당되는 단계는 꼴라주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단편들이지만 연결하는 방식은 작가만의 영역이다. 단편은 연결을 위한 단편이기에 단편들이 맞닿은 부분이 흥미롭다. 




doubt as a layer_116.8x80.3cm_oil on canvas_2020



조합은 컴퓨터를 활용하기보다는,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 결과물을 위한 직관적 매치와 배치들이다. 작가가 그런 게임, 또는 실험, 현실의 반영 및 발견에 심취했는지 난해한 장면들도 있다. 통상적으로 보기 좋은 풍경은 입구와 출구가 있고 그 사이에 시각적 산책이 가능한 통로들이 있다. 반면 김자혜의 ‘풍경’은 끝없이 열리는 창 같으면서도 막다른 길목 또한 산재한다. 고즈넉하고 넉넉한 풍경에 초대하지만, 관객은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방법을 모른다. 복잡한 공간을 미로 삼아 추리적 상상력을 발휘하든지 도약과 비약을 요구받는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 지혜에 이르는 길]에서 인간 운명에 관한 하나의 의미, 즉 세상의 질서를 추상화시킨 것이 미로라면, 현대인은 미로를 헤매는 가상 유목민, 즉 이미지와 환영을 좇는 여행자로 바뀌고 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미로는 불투명한 장소이며 그 길을 설계하는데 어떤 법칙도 없다. 오늘날 미로란 불안정하면서 위험스러운 통과지점이며 두 개의 세계 사이에 터져 있는 틈바구니와 같은 것이다. 


미로는 보편적이다. [미로]에 의하면 신화에서 소설까지, 동화에서 비디오 게임까지, 가장 신비로운 서사시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학과 오락은 절대의 추구로, 또는 미로와 같은 수많은 장애물을 통과하고 쫒고 쫒기는 과정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근대에 미로는 잊혀졌다. 직선과 투명함, 단순함을 옹호하는 근대 문명은 미로를 쫒아냈다는 것이다. 경제란 빨리 가고 똑바로 걷고 시간을 벌고 시야를 넓히고 미래에 대해 예측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합리성의 정점에서 불합리 또한 번성한다. 그에 대한 자의식이 근대 이후에 대한 비전이다. 곧고 투명한 것이 수시로 나오지만 결국 그것을 배반하는 김자혜의 작품은 미로적이다. 동시에 합리적이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다. 작품 속 시공간은 미로처럼 불투명하지만 그것이 유연한 공간임은 틀림없다.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시공간을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하는 것은 신화시대에 천지창조 행위 같은 초월과 자유로움을 줄 것이다. 한계 지어진 지금 여기에 앉아서 무한을 꿈꾸는 것이다. 




lights cross the place_90.9x72.7cm_oil on canvas_2021



passing through_90.9x65.1cm_oil on canvas_2020



접힘과 겹침으로 암시되는 잠재적 공간은 제한된 현실을 상대화 한다. 현재는 접혀 있지만 상황에 따라 펼쳐질 수도 있는 면이 세로줄로 표현된다. 수직 수평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좌표 속에 화면 저편으로 진입하려는 면은 역동적이다. 풍경은 펼쳐진 공간과 접혀진 공간이 혼재한다. 푸른색이 많은 것은 공간 실험의 장이 무한대임을 암시한다. 따뜻한 색은 푸른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동적 요소다. 지상의 구름인 식물/그림자와 천상의 식물인 구름이 나란히 배치된다. 실내 풀장같이 반영 상이 있는 바닥이 있는 풍경은 발 디딜 바닥은 없지만 끝도 없는 심연은 아니다. 창인지 문인지 거울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사각 틀들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할 수 있는 문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접혔다 펼쳤다 할 수 있은 가림막 같은 구조물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마치 원형 기둥처럼 공간을 받쳐주는 분홍 구조물은 다른 장소에서는 그냥 칠해진 선처럼 나타난다. 푸른 배경에 보름달같이 밝은 둥근 원은 광대가 돌리고 있는 접시처럼 떨어지지 않는 작품은 서커스처럼 기묘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깔리고 세워지고 가로지르는 선/면들은 기하학적 정글이라고 할만하다. 저기가 보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저기로 가기는 쉽지 않다. 화면은 압축된 시공간의 장이다. 김자혜의 작품 구성요소들은 조합의 놀이를 흥미롭게 지속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다. 기하학적 요소들이 등장하는 추상이 환원적이라면 빛, 공기, 물 같은 자연의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들은 확장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 과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원근감이나 위/아래와 중력감도 보존되어 있다. 최소한의 무게중심은 있는 것이다. 추상적 구성이 중시되지만 동시에 화면에는 빛과 공기, 때로는 바람마저도 느낄 수 있다. 서 있는 식물이 보이는 작품은 위/아래, 즉 중력의 감각은 보존된다. 따스한 색,  사물/조형 요소가 조금씩 배치되어 전반적으로 차가운 중성적 공간에 활기와 균형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불연속의 지점들은 극대화되어 있다. 어떤 대상의 음영들, 빛의 반영들이 불연속적으로 만난다. 




sing beyond the line_145.5x112.1cm_oil on canvas_2020



가로, 세로, 그리고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여백 같은 공간은 변화가 촉진된다. 고대 원자론자들이 원자로 이루어진 세계의 진공을 변화의 공간으로 여겼듯이 말이다. 추상 어법은 물론 패턴과 장식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그것만으로 화면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자기가 머무는 현실 속에 있고 싶어 한다. 이미 닥쳐있고 앞으로 더 가속화될 변화된 시공간 감각이 내재된 현실적 측면을 암시한다. 사전에 제작된 작은 꼴라주를 바탕으로 그려진 화면은 환영의 총체성을 해체 구성한다. 해체주의자들처럼 김자혜에게도 해체와 구성은 등가이다. 이미 구성되어 있는 현실은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현실을 단편화하고 재배치하면서 합리적 질서의 상대성을 드러낸다.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합리적인 것은 완벽한 효율을 갖는 이상적인 기계장치라고 본다. 그는 고전주의 시대의 예를 든다. 그 시대는 세계의 질서가 단 하나의 중요한 현실인 듯이 진행되며, 철학은 안정성, 항구성, 곧 현상을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균형만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규칙과 이성, 구조와 조직으로 간주한 것이 가장 있음직하지 않은 것에 직접 맞닿아 있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현실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에 의하면 항구성은 여러 상황의 정돈되지 않은 실제 위에 자리하는 특별한 구성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술은 질서와 권력에 봉사하지 않는다. 재현주의란 질서와 권력을 재현하는 것이다. [헤르메스]에 의하면 사물이 변형 될 수 없을 때는 사물의 재현이 다루어지게 된다. 재현의 공간에 길이 그려지고 이동이 표시된다. 조화로운 공간 구성이다. 미셀 세르는 가장 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한 낡은 체계들은 멈추지 않는 바다 위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질서는 무질서가 퍼져 있는 곳에 드물게 나타나는 희귀한 것일 따름이다. 김자혜가 작품의 구상단계에서 채택하는 꼴라주는 조화로운 환영의 세계를 뒤흔드는 간극들을 다수 도입한다. 




The light above the water_91.0x91.0cm_oil on canvas_2021



The new layer in the lair_91.0x91.0cm_oil on canvas_2020



다양한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들은 그 자체가 단편이다. 단편들은 꼴라주를 통해 더 유동적인 맥락으로 편입된다. 그것은 현대세계가 육안보다는 사진적이라는 것, 그리고 사진의 지표(index)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원한 푸른 색조가 주조를 이루는 언뜻 그럴듯한 풍경들이다. 그것은 그림이 한 장의 환영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보이지만 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공간들임을 강조한다. 무인지경인 작품의 서사를 이끌만한 인간은 부재하지만, 작가는 구조적 관계와 그 해체를 통해서 현대사회의 공간을 표현한다. 단편적이지만 그것이 현실의 단편인 한 리얼리즘의 요소가 있다. 작가에 의하면 작품의 ‘혼재적 공간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 꼴라주 형식은 그자체가 조형적 방식이자 현대의 특성이다. 꼴라주가 유화로 옮겨질 때 붓터치를 비롯해서 개별적 흔적을 철저히 감추어진다. 작품 속에 많이 나타나는 거울이나 유리창처럼 작가는 투명성 속으로 사라져 간다. 


김자혜의 작품은 거의 실험실적인 깔끔함이 특징이지만, 현실은 편재한다. 관료주의와 상업주의를 모두 관통하는 익명적 체계 자체가 중성적이다. 작가는 공간 실험을 통해 이 익명적 체계의 작동방식을 가속화시켜 눈에 띄게 만들 따름이다. 예술작품 특유의 낯설게 하기이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더 흥미롭고 불가사의하게’ 만든다. 미셀 세르에 의하면 도시 문명 또한 황야처럼 열린 집합이다. 그는 바다만이 이 마력에 비견될만하다고 본다. 또한 구름 역시 애초부터 분리 불가능한 것의 모델이다. 카오스는 열린 공간이다.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는 카오스의 공간은 대개 직선이 사라지는 공간이다. 김자혜의 작품처럼 준거 없는 어떤 공간에 그려진 선들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바다일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예술이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의 구성이라고 본다.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결합이 중요하다. 




the point on the diagonal line_116.8x91.0cm_oil on canvas_2020



two chairs on the line_145.5x112.1cm_oil on canvas_2020



예술은 조이스의 말대로 하나의 카오스적 우주론(chaosmos), 즉 구성된 카오스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카오스와 투쟁한다. 그러나 그것은 카오스를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카오스의 여러 경계턱들을 통과하게 된다. 예술은 카오스의 한 조각을 틀 안에 고정시켜 감지 가능해진 구성된 카오스를 형성하거나 그로부터 다양성으로 재편된 카오스적 감각을 끌어낸다. 끝없이 열리는 창같은 화면은 예측 불가능한 단편들로 조합된다. 미셀 세르는 이러한 공간에서 카오스의 비유를 본다. 그는 하나의 통일된 공간이 아니라 한없이 다시 나타나는 어떤 평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간에서 몸은 어떤 유일한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공간들 전체의 힘겨운 교차의 지점이다. 이 교차지점, 이 연결지점은 언제나 구성해야 할 어떤 것이다. 김자혜의 작품은 과학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만, 사회적 요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서사가 부재한 듯하지만, 켜켜이 중첩된 시공간이 진공은 아니다. 작가가 주로 다루는 공간, 즉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는 공간은 물신주의의 정점에 오른 값비싼 재화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의 물질적 진보를 낳은 생산력의 혁명은 대량소비를 필요로 하고, 이 조건은 다시 생산 관계에 피드백 된다. 대부분 각자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던 전통사회는 기회를 찾아 끝없이 이동하는 사회로 변했다. 도시화와 세계화는 비슷한 과정의 다른 차원이다. 소비 밀집 지역에 생활 인프라가 깔리다 보니 지방보다는 수도(권)이 개인주택보다 아파트같은 공동주택이, 소규모보다는 대단지가 더 선호되는 흐름을 낳았다. 수도권에 인구의 반 이상이 밀집돼있는 상황은 인구 대비 국토가 좁은 나라의 숙명인 듯하다. 분단으로 반이 뚝 잘려 있는데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국의 정치적 물리적 조건, 그리고 불과 몇 십 년 동안 압축적 근대화가 진행된 경제적 조건까지 더해져 공간은 사회적 관심과 갈등의 중심이 됐다. 




14.where the shdows  shine_116.8x727.cm_oil on canvas_2021



과도하게 모여 살아야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공간은 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집을 포함한 공간의 부족은 후세에 유전자를 전달하려는 자연의 추세마저도 무력화 시켰다. 다수의 사회인이 참여하는 경쟁의 꼭대기에 바로 공간이 있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현대주의적 지배는 수평적으로는 기하학적 도로계획이, 수직적으로는 국제양식의 고층건물이 만들어낸 격자화된 도시의 이미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격자들은 파괴되어야 한다.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비판하듯이 그러한 근대적 공간은 갈수록 동질적이면서도 분절화 되어 가는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근대주의는 형태가 기능뿐 아니라 이윤을 따른다는 법칙을 강요한다. 데이비드 하비는 탈근대의 조건으로 세계 자본주의에서 일어난 시공간 압축의 강도를 지적한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이 과정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비워지고 더욱 추상적으로 되며 사물과 사람은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탈피되게 된다고 본다.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가속화는 주체와 객체 모두의 비워짐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공간이기 보다는 공유공간, 머무르기 보다는 지나가는 공간, 어디에 가도 비슷한 공간이 현대를 특징짓는다. 데이비드 하비는 공간을 통제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분쇄와 분절화를 통한 것이라면 그러한 분절화의 원리를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푸코가 주장하듯이 공간이 항상 사회적 권력을 담는 그릇이라면, 공간의 재조직은 언제나 사회적 권력이 표현되는 틀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사회적 결정이라는 뿌리로부터 해방된 공간적 이미지’(푸코)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재현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현대의 예술가가 공유할만한 목표이다. 공간은 무엇인가 담는 물리적인 그릇을 넘어 물신적 체계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서는 추상화되어야 한다. 비워진 공간은 한없이 가벼워져서 예술적 유희의 대상이 된다. 현실 속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예술의 해방적 기능이 있는 김자혜의 작품은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일 수 있는 유토피아 속의 이질적 장소, 즉 헤테로토피아에 해당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