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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지 / 비밀은 없다는 비밀

이선영

비밀은 없다는 비밀

  

이선영(미술평론가)

  


임혜지의 최근 작품이 전시되는 ‘멍 bleu’ 전의 부제는 어느 전시 제목보다도 와닿는다. 팬데믹 때문에 1년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뒤틀려버린 일상에 지치고 넌더리가 난 상황이 얼마나 만연했는지 ‘코로나 블루’라는 용어까지 생겨났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그것을 딱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눈만 단독으로 나오는 작품들이 상당한 것을 보면, 마스크가 일상이 된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작품 속에 홀로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우울과 고독이 특정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은 보편적 정동임을 알려준다. 프랑스 유학의 이력을 반영이라도 하듯, 블루에 해당하는 다른 철자를 사용했고 여기에 멍들다, 멍때리다 등의 일상어 및 하위문화의 언어를 장난스럽게 병치했다. 멍이나 멍때리다라는 말은 상처나 방심 등, 회피 되어야 할 부정적 상태로 다가온다. 끝없이 정상/비정상을 가늠하고, 일분일초도 낭비해서는 안 되는 현대의 강박적 기준에 의한다면 말이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전시전경



블루와 멍의 병치는 시사적인 상황을 포함한 다양한 상상으로 가지 친다. 어차피 기의와 기표 사이에는 거리가 있으며, 그 사이의 공간에서 예술가들은 마음대로 상상하고 실험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의 단편이 담긴 크고 작은 작품들을 복합적으로 설치하여 다층적인 서사를 구축/해체한다. 여러 크기의 작품을 한 영역에 배치함으로서 각각이 다른 시공간대의 단편들임을 강조한다. 작은 작품은 멀리 있는 풍경처럼, 큰 작품은 가까이 있는 풍경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보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관객들은 눈에 띄는 작품부터 시작해서 이야기를 엮으면 된다. 특히 눈이 등장하기에 장면의 배치는 형식 그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이야기는 연속극처럼 이어지기도 하고, 한순간을 고정시키는 그림의 특성을 살려 간극을 두기도 한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그리고 하나의 그림 안에도 간극은 편재한다. 분열은 거듭해서 일어난다. 


화면을 확대하면 오히려 불확실해지듯, 쪼개기는 전체를 모호하게 하다. 그것은 퍼즐 맞추기처럼 유쾌한 수수께끼이기도 하지만, 불안 또는 공포를 낳는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의 특징을 애매모호 하고 대상이 없다는 것으로 보며,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그것은 두려움이라고 정의한다. 임혜지의 작품은 누군가를 위험에 빠트릴 만한 위협적 요소가 명백하게 가시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안이다. 그러나 불안 또한 위험과 관련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코로나 블루로 말하자면, 불안과 공포는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프로이트는 불안의 심리적 역할에 대해, 예상되는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외상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불안은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마치 백신을 맞듯이 말이다. 작품 속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외눈은 불안과 공포를 연상시킨다. 아무도 전체를 볼 수 없게 하고 누군가는 전체를 관할하는 패놉티콘적 상황은 현대적 지배의 특징이다. 




멍, 캔버스에 유채, 130.3 cm x 162.2 cm, 2021



무제, 캔버스에 유채,91.0 x 116.8cm, 2021



어떤날, 캔버스에 유채, 116.8 x 91.0 cm, 2020



어떤날, 캔버스에 유채, 130.3 cm x 162.2 cm, 2021



임혜지의 작품에 편재하는 눈은 시각 예술가들이 서로의 눈만 보게 된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예로 주목(注目)할 만하다. 작가는 작품 [조각_멍]에서 하얀 강아지의 눈망울 하나가 화면 중심에 그려놓기도 했다. 강아지 눈 그자체가 그렇듯이 그것은 귀여운 분위기도 있지만, 작품 [조각_무제]처럼 화면 가득 포착된 풀섶 아래에 보이는 눈알 하나는 공포스럽다. 그것은 산 채로 파묻힌 인간인가. 초야에 산채로 묻혀있는 이미지가 은유라면, 그것은 사회적 삶으로부터 절연된 공포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팬데믹으로 마스크가 일상화되어 우리는 상대의 눈을 더 집중적으로 보게 되었다. 안면에 나란히 배치된 눈은 날카롭다. 오래전에 잊혀진 포식자의 눈을 떠올리기도 한다. 상위의 포식자에 속하는 고양이과 동물의 아이라인은 매우 진하며, 인간의 화장술 또한 눈빛의 강렬함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생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는 [바디 워칭]에서 상대를 똑바로 쏘아보기란 너무 위협적이어서 얼른 눈길을 돌리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데이먼드 모리스에 의하면 뜨거운 사랑이나 증오의 때라야만 오랫동안 눈과 눈이 서로 마주 볼 수 있을 뿐이다. 상대의 눈길을 피하는 사람은 자신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니콜 아블릴은 [얼굴 문화, 그 예술적 위장]에서 얼굴은 겉으로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며 감추고 싶은 비밀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눈동자는 모든 것을 뚫어보지만 정작 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커튼이 내려진 작은 방에 10x10cm 크기의 작은 나무패널에 그려 넣은 눈 이미지가 38개 걸려있는 작품이 있는데, 높이를 맞춰 한 줄로 배열된 눈들은 서로를 감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모습이지만 쌍커풀 진 작가 1인의 눈이다. 상호적 감시 및 감시를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자기 감시를 지배에 활용하는 거시 권력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와의 간극에서 벌어지는 여러 불행한 사태들이 ‘멍’의 원인이 된다. 




잔상, 캔버스에 유채, 60.6 x 72.7 cm, 2020



조각_덩어리, 종이에 유채, 23.0 x 31.0 cm, 2020



조각_멍, 22.0 x 27.3cm, 2021



시선의 문제는 아무리 개인적이고 내밀한 존재에게도 사회적 측면이 내재함을 알려준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자아도 되고 주체도 되기 때문이다. 자아와 타자의 시선을 매개로 한 간극은 SNS를 통해 엿보기가 대중문화의 몸통이 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SNS 문화에 대하여,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가 작가의 생각이다. 밋밋한 일상을 세심하게 다뤄왔기에 ‘블루’의 파고는 더 높았을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하루하루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걱정들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긴장 상태, 우울감들이 만들어낸 내면의 잔상 들을 회화로 표현한 기억의 조각들로 구성’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울한 일상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지상주의 사회에서 이미 있던 모순과 갈등을 도드라지게 했다. 임혜지의 작품은 사회적 상상력까지 확장되곤 하지만, 그자체로는 애매하고 모호하다. 


거기에는 사회적 울림이 있는 것이지 사회적 주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장막이 쳐진 이미지들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장막이 아니어도 뭔가에 싸여있거나 눌려 있거나 하는 사물, 또는 상황이 종종 나타난다. 완전히 밀폐된 대상을 보여주는 작품 [조각_덩어리]는 접촉할 수 없는 상태의 남녀 같은 실루엣이 보이기도 한다. 작품 [현대인의 초상]은 얼굴을 완전히 가린 마스크 두 개에, 눈 부분에는 가상현실 기기까지 장착하고 있는,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누군가는 현실과 접촉하고 있으며 이러한 직접성을 통해 현실을 지배하고 변화시킨다. 작가는 지배층과도 다른 방식으로 암막이 쳐진 현실을 들춰내는 게임을 수행한다. 많은 작품들에 존재하는 모호한 관점은 형식의 문제로부터도 온다. 드로잉을 대신하여 일상을 수집하는 사진적 시점에 내재한 단편성 또한 수수께끼를 가중시킨다. 물론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은 없고 변형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워지고 합쳐지면서 또 다른 연상으로 확장된다. 




조각_잔상, 캔버스에 유채, 15.8 x 22.7 cm, 2021



잔상, 캔버스에 유채, 116.8 x 91.0, 2021



조각_무제, 판넬에 유채, 26.0 x 18.0cm, 2020



활활 타오르는 불길 내부를 그린 [잔상]은 심리테스트 형태처럼 다양한 연상을 낳는다. 불길보다는 멀리서 잡힌 풍경인 또 다른 [잔상]은 노랑 고무장갑을 끼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아줌마의 자잘한 배경을 추상적으로 처리하여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는 작품 제목 [무제] 속 대상은 어떤 것의 부분이지만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작가는 던져줄 뿐 결론 내리지 않는다. 까도까도 핵심이 없는 양파껍질처럼 거듭 드리워진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를 유지, 확대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공포증의 대상은 선택을 회피하는 것이고, 주체로 하여금 가능한 한 오랫동안 결정 내리기를 미루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공포증의 대상은 무(無)에 대한 환각이다. 즉 은유란 무의 반복이다. 공포증은 대상과의 관계가 불안정하다. 임혜지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도 그러한 대상의 불확실성이다. 


그것은 너무 뻔해진 세상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반응일 수도 있고, 진짜 모르겠는 세상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다. 자연보다 사회라는 무대가 더 많은 작품에서 추상적인 세상보다는 대개는 인간관계에서의 모호함에 방점이 찍혀있다. 30대 중반의 젊은 작가로서는 역설적 세상에 대해 역설적으로 반응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이 있겠는가.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두터운 커튼은 프랑스 유학 때 그들의 문화에서 받은 인상에서 온 것이다. 커튼은 자기를 감추면서 타자를 엿볼 수 있는 장치다. 작품 속 눈과 같이 생각하면 그것은 창과 방패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모순(矛盾)’이라는 설화를 낳은 창과 방패의 관계는 인간사회 도처에서 작동한다. 요즘 가장 절박하게 다가오는 것으로는 (변이)바이러스와 백신의 관계가 그렇다. 작가는 두터운 커튼에 함축된 의미를 서구 개인주의의 산물과 연결시키지만, 한국에 와서도 계속되는 타자적 상황은 장막을 알레고리로 만든다. 




조각_잔상, 캔버스에 유채, 14.0 x 23.0 cm, 2020



조각_잔상, 판넬에 유채, 18.0 x 26.0 cm, 2020



Bleu, 캔버스에 유채, 60.6 x 72.7cm, 2021

   


Bleu, 캔버스에 유채, 53.0 x 65.1 cm, 2021



한 쌍으로 이루어진 작품 [나의 공간]은 보라색 두터운 장막이 구석부터 걷어지려는 상황이다. 다른 한쪽은 더 많이 걷힌 상태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환상적인 보라색 뒤에 있는 것은 검은색이다. 자연도 비밀스럽기는 마찬가지인데, 나무숲 위에 걸쳐진 푸른 장막 아랫자락이 나무숲 그림으로 된 작품은 현실과 환상이 악(惡) 무한으로 엮여있는 초현실주의 회화와 닿아있다. 나무숲 안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 작품 [조각_무제]에서 눈구멍같이 보이는 뚫린 창문은 호기심 어린 관객의 시선을 되받아친다. 들춰진 진실은 환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환상만큼이나 모호하다. 그것은 비밀은 없다는 비밀처럼 보인다. 오래된 나무 찬장을 틀로 삼아 그린 [열린 또는 갇힌]에서 틀 안에 그려 넣은 겹겹의 커튼들은 두텁고 무겁다. 모든 커튼이 다 밀폐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어떤 날]엔 붉은 커튼이 야외로 열리는데, 한가운데 풍경을 보는 사람과 관객의 시선을 겹쳐진다. 


커튼이 있으나 없으나 단절감은 마찬가지다. 가령 열린 문으로 보이는 무엇인가를 하는 남자가 있는 작품 [어떤 날]은 타인을 볼 수는 있으나, 교류는 할 수 없는 겹겹의 차단막이 깔려있다. 커튼만큼이나 묵직한 심리적 현실은 블루가 담당한다. 작품 [bleu]에서 혼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은 우울하다. 그가 있는 곳은 하얀 선이 그어진 삶의 경기장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경기자도 아니고 구경꾼이다. 대중들처럼 말이다. 작품 [조각_잔상]은 시멘트 구조물을 지나는 지팡이를 든 한 남자의 뒷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다른 [조각_잔상]은 사람이 검은 실루엣으로만 등장하기도 한다. 홀로가 아니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작품 [bleu]는 구불거리는 장식 뒤편으로 끼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푸르딩딩한 두터운 옷과 하얀 마스크의 조합은 우울함을 자아낸다. 블루는 그래도 먼 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인류의 상상계에서 블루는 자연이나 영원을 떠올렸다. 




현대인의 초상, 종이에 유채, 31.0 x 41.0 cm, 2020



조각_bleu, 판넬에 유채, 27.0 x 22.0cm, 2021



덩어리, 캔버스에 유채, 116.8 x 91.0cm, 2021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영어권에서 블루는 ‘슬픈, 멜랑콜리한’ 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블루스의 기원인 블루를 환기 시킨다. 미국의 흑인으로부터 시작된 블루스는 우울한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블루스의 노랫말은 향수, 사랑의 아픔, 그리움을 담고 있다. 블루는 또한 어둠과 차가움으로 우울함과 연관된다. 이번 전시에서 블루와 연동되는 또 하나의 키워드 멍은 몸과 마음에 응어리지는 어떤 징후를 말한다. 내복처럼 보이는 분홍 상의에 봇짐을 품는 여자가 있는 작품 [멍]은 그녀의 가슴에 품고 있는 멍이기도 하다. 푸른 상의에 팔을 괴고 상념에 잠긴 여자 옆모습이 있는 작품 [조각_bleu]는 멜랑콜리하다. 작품 [덩어리]는 구겨진 검은 옷 위에 하얀 책, 또는 노트가 있는데, 작품이란 덩어리진 것을 정리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출발해도 일상의 반복은 아니다. 예술은 삶의 모순에 대해서 답해주진 못하더라도 답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맥락을 만들어준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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