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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 / 공기를 품은 색의 계열

이선영

공기를 품은 색의 계열

  

이선영(미술평론가)


  

양희의 최근 작품의 제목은 색채명이 들어가 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있듯, 색의 명칭에는 언제나 단순화의 위험이 있다. ‘파랑색’이라고 할 때 각자 떠올리는 색감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양희의 작품처럼 미묘하게 색채를 구사하는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멀리서 본 풍경이지만 자연의 결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형태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풍경은 거의 색을 소환하기 위한 알리바이처럼 보일 정도로 색의 비중은 크다. 주도적인 색감이 있어도 결코 하나의 색으로 채워지지는 않는 작품들은 색을 앞세운 추상화는 아니다.  색만으로 작품이 성립되기는 힘들다. 가령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로 자리매김 된 바 있는 단색화가 색과 질감만으로 부각 된다면 충분하지 않다. 형태에 비해 색은 더 미묘하다. 형태가 의미라면 색은 감성과 더 관계된다. 우선 순위를 색으로 볼 것인가 형태로 볼 것인가에 따라 미술사의 이즘이 갈라지는 예도 많다. 가령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대조가 그러하다. 색은 형태와 달리 단선적인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스페인어로 ‘침묵’을 의미하는 단어 ‘Silencio’를 색이름 앞에 붙여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 양희의 작품은 풍경을 소재로 하는 만큼 색은 공기를 품고 있다. 같은 블루라도 어떤 시간대의 공기를 품고 있는가에 따라 제목도 작품도 달라진다. 침묵과 결합된 이름은 바닥이 없는 색의 심연으로 끌고 간다. 작품은 연작의 특성을 띄며, 본질이 아닌 계열체로 존재한다. 시작은 블루여도 끝은 열려있다. 푸른 필터를 끼운 듯한 풍경 [Silencio-Blue I]은 그 안에 살법한 동식물을 알아보기는 힘든 먼 시점으로, 블루에 내포된 초월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풍경은 다양한 블루를 칠해보기 위한 알리바이 같다. 블루에 잠긴 아스라한 풍경이 있는 작품 [Silencio-Blue II]는 블루에 흡수되고 또다른 블루로 태어나는 나무가 전경화 된다. 빛이 드러나거나 사라지기 전의 깊은 푸름이 있는 작품 [Silencio-Deep blue]는 푸름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하늘과 물이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이 풍경에는 고체, 액체, 기체 상태의 블루가 두루 포진해 있다. 푸르른 산마저도 액체나 기체의 또 다른 측면에 불과한 유동성이 있다. 


서로의 반영 상에 의해 하나의 계로 통합된 듯한 풍경인 [Silencio-Prussian blue] 운무에 싸인 봉우리인지, 해무에 싸인 섬인지 알 수 없다. 고유명사가 일반명사가 된 색명의 어원이 군복색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서정적 풍경을 낯설게 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국가의 이름과 결합된 색이름 프러시안 블루에 대해, 프로이센 군대부터 입었던 진한 청색의 군복이 1차 대전 때의 독일군까지 이어졌다고 기록한다. 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군복은 보호색이기도 했다. 개체로 드러나지 않고 전체에 침잠하는 블루는 초월부터 생존까지, 냉정한 이성에서  묵직한 우울까지 여러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Aurora pink’, ‘Orange’ 등으로 이름 붙은 시리즈는 푸른 계열의 상대색인 붉은 계열로, 푸름과 함께 배치되곤 한다. 따스한 계열의 색상이 내포하는 지상적 행복이나 환희는 작품의 서사를 이끌만한 개체가 등장하지 않음으로 인해 극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자체의 본질이 아닌 차이의 계열로 작동하는 색은 푸르름과 대조되는 감성을 깔고 있다. 


붉음과 푸름은 빛과 그림자와 같은 상보적 관계를 가진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본 색의 수수께끼]에서 심리학적으로 볼 때 파랑과 빨강은 유채색을 대표하면서 대조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빨강은 경종을 울리는 색이다. 반면 파랑은 중세에는 신적인 빛인 동시에 모든 형태의 악에 대항하는 구원자라고 믿어졌다. 가로로 긴 풍경 작품 [Silencio-Aurora pink]은 푸른 산 위로 핑크빛 하늘이 펼쳐진다.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은 자연이 제공한 캔버스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색은 지상의 물질적 조건에서 벗어나 마음껏 풀어 헤쳐진다. 수평면으로 길게 늘어선 야트막한 푸른 산/섬들은 하늘과 물을 나누는 작품 [Silencio-Orange I]은 전경의 수면이 오렌지빛 하늘을 반사한다. 작품 [Silencio-Orange III]에서는 첩첩이 쌓인 산세들이 붉은 계열의 하늘과 푸른 계열의 물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 어느 작품보다 산세 같은 물질적 라인이 확실한 작품 [Silencio-Yellow]에서 하늘을 반영하는 물을 품은 육지 때문에 노랑은 둘러 나뉘어 있다. 


양희의 작품에서 푸름(정확히는 푸름의 계열)은 단독으로도 존재하지만, 붉은 계열은 푸른 계열을 반드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푸른색은 더 비중이 있다. [색의 유혹]에 의하면 공기는 실제로 파란색이 아니지만 파랑으로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유리병에 든 공기나 물은 아무 색도 없지만 깊은 바다는 파랗게 보인다. 공간이 깊어지면서 모든 색이 파랑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색은 빨강이다. 양희의 풍경은 전반적으로 원경이지만, 나무나 돌같이 풍경의 일부가 자세히 드러난 작품군도 있는데, 이때 자연물의 질감은 색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가 있는 작품 [Silencio-Mintgrey]는 색의 무한한 계열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형태 또한 자연에서 찾아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땅에 뿌리를 내리며 천상을 향하는 나무는 인간을 닮았다. 이 나무/인간은 자신의 분열된 조건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초월적 몸짓을 보여주기도 한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은 움직임을 순간으로 고정시킨다. 다양하게 뻗은 나뭇가지들은 무수한 세월 동안 쌓인 분열과 통합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작가는 녹색 나무를 푸름 속에 담갔다. 한국어는 나무를 ‘푸르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푸른색과 녹색은 차이가 있다. 푸름이 천상이라면 녹색은 지상이기 때문이다. 에바 헬러는 파랑이 하늘이기에 신성한 색이며 영원한 색이라고 말한다. 지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모든 것에 파랑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파랑이 신성한 색이라면 녹색은 지상의 색, 자연의 색이다. 에바 헬러는 대조를 통한 결합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파랑-녹색의 색조는 하늘과 땅을 결합 시킨다. 무기물인 돌 또한 그에 못지않다. 자갈밭에 밀려드는 물살이 있는 작품 [Silencio-Viridian]은 돌의 각이 둥글려지도록 오고 갔을 청록빛 물살이 형태와 색채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풍경들이 벽화적 차원이 될 때 충만한 색감에 상응하는 촉각적 측면은 다른 매체의 힘을 활용함으로서 확장된다. 벽면 가득 펼쳐진 구름을 품은 산 풍경 아래에 작가는 도기들을 부착했다. 도기들은 산세가 흐르듯 같이 흐르고 있다. 


크기가 다른 둥근 도기들은 마치 풍경을 현미경으로 바라본 듯한 미시적 시점을 보여준다. 풍경의 여러 지점에서 채취한 듯한 비슷한 계열의 색감이 특징적이다. 풍경이 품었을 공기나 물방울들의 흐름이다. 도공이 풍경을 담은 그릇을 만들고자 한다면 화가는 풍경을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담아내려 한다.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이 공존하는 이 벽화에서 도기로 붙여진 부분은 풍경의 또는 우주를 이루는 원소처럼 거시적 질서를 반향한다. 마가레테 브룬스는 [여덟 가지 색으로 풀어본 색의 수수께끼]에서 파랑은 고대에 우주를 이루고 있다고 믿어지는 5 원소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테르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파랑은 4원소인 불, 물, 공기, 흙의 춤 즉 우주의 유희를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에테르, 또는 공간과 파랑은 연결짓는 형이상학적 사유는 심오함과 허무함의 연결고리 또한 암시한다. 양희의 작품에서 자연은 비어있는 곳은 없지만 물이나 공기처럼 손으로 잡기도 힘들다. 도기 꼴라주 작품은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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