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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세계적 소통과 유통에 대해

이선영

현대미술의 세계적 소통과 유통에 대해  

  

이선영(미술평론가)


  

‘K’자 돌림의 화려한 행렬 사이로 미술이 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미술에도 세계적 무대가 있다. 그러나 음악이나 영화같은 분야만큼의 경쟁력을 가지고 소(유)통된다고 하기는 힘들다. 물론 그것은 대중문화와 예술의 차이일 수도 있다. 대중문화는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투자되다 보니 처음부터 보편적 코드에 집중한다. 드라마 한편에 수백억을 투자받을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 앞으로도 더 가속화될 비대면 시대의 강력한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거의 모든 콘텐츠가 그곳으로 수렴되고 발산될 것이다. 세계 공용의 문화 생태계인 인터넷은 변화무쌍한 기후를 가지지만, 늘 그때그때의 거대 공룡은 있기 마련이다. 미술 또한 영상을 포함한다. 그러나 영상 위주의 문화적 소통이 반드시 미술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영상 분야도 긴 호흡을 요구하는 작품들의 경우 소수자의 위치를 감내해야 한다. 한 공간에 시간을 켜켜이 쟁여 넣는 미술은 시간을 두고 읽어야 하는 문학보다는 빠르지만, 움직임의 환영인 영상보다는 느릿하다. 


가령 히트곡의 필요조건인 한 번에 딱 듣고 흥얼거릴 수 있는 지각과 기억의 조건이 미술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60년대 식의 팝아트는 일시적인 복고 열풍 같은 것이 아니라면 21세기의 스펙터클과 경쟁할 수 없다. 영어 가사가 ‘자연스럽게’ 구사되는 대중음악은 빌보드 차트의 상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 공통의 텔레비전이 된 유튜브 클릭 수는 폭발적이며 세계 곳곳에 K 팝 팬들이 진을 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음악조차도 팝이 아닌 록이나 재즈, 국악 등 한 겹 더 들어가면 ‘K’자를 붙일만한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선전하는 클래식 음악 연주도 결국은 100 미터 달리기나 수영대회처럼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게임, 즉 1등의 개념이 성립된다. 미술에서 1등은 작품 판매 액수나 전시장 유료 관객 수 등에나 해당될 것이다. 미술에서의 이미지는 의미의 무게 때문에 보나 날렵한 코드로 소비되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미술보다 훨씬 대중적인 영화부문도 한국어 대사로 아카데미 영화제에 입성했다는 낭보가 도착한 지가 겨우 1년 전이다. 


물론 그것도 한국의 특수성을 영화라는 ‘보편적’ 문법에 담은 감독의 탁월한 능력과 더불어 현지 홍보팀의 노력이 뒷받침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벽이 좀 더 높은 장르도 있다. 가령 문학의 경우, 번역 문제 때문에 노벨상이나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진입하기 힘들다. 의미는 번역될 수 있지만 작가 고유의 문체까지는 힘들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보편적 서사를 전달할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 한다. 국제적으로 통하는 언어로 꿈을 꾸고 시를 쓸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기도 힘들고 그럴 필요도 없기에 진입장벽은 낮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술은 언어로부터 자유로운가? 유학이나 유학에 준하는 경력을 탑재해야 하는 것은 미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상당한 물적 심적 투자 필요한 상황에서 미술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창작을 위한 더 강렬한 욕망만이 그 모든 부차적 과정들을 애써 극복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자기 언어를 다시 가다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미 대학입시 때문에 예술적 소양에 필요한 에너지를 상당히 고갈시킨 상태에서, 무한히 연장되는 창작 및 발표의 준비 과정들이 10대부터 늦게는 30대까지 차지하게 되는 현실이 걸림돌이다. 물론 각 단계에서 작업 외적 요소들이 변증법적 지양의 관계 속에서 풍부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낯선 상황에 던져짐으로서 오히려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는 역설은 긍정적 결과를 낳곤 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원활한 소통이란 결국은 잘 재현하는 문제다. 하지만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현대미술은 애초에 무엇을 기준으로 할지 모호하다. 사진 못지않게 잘 그리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극사실주의 계열의 작품군이 미술 시장에서 히트쳤을 때도 곧 사라진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 따름이다. 헐리웃 등에서 실감 나는 특수 효과를 담당하는 한국인의 기술력 그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기술과 달리 문화나 예술은 발전하지 않는다. 단지 변화할 뿐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발전된 나라의 문화예술과 그렇지않은 나라의 그것 사이에는 중심과 주변이라는 서열이 생긴다. 


소통은 사회의 모든 교환과 마찬가지로 불균형이 자리한다. 문화예술 자체가 도약과 비약이 요구되는 특수 분야다. 이러한 불균형은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이 모색되기도 한다. 가령 한국의 수많은 비엔날레 같은 제도가 그렇다. 한국이 주로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보니 그에 상응하는 조치일 수도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 중의 하나는 대세에 대한 민감성이다. 그것은 비약적인 물질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지만, 다양성보다는 쏠림 현상을 야기하여 문화예술의 제도적 비대화를 야기했을 뿐, 내실은 이제부터 채워야 하는 숙제를 낳았다. 늘 도구와 수단이 앞서 왔던 것이다.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작가의 활동을 위한 제도적 지원 중의 하나는 교환이다. 한국작가/기획자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초대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나라 작가도 바깥으로 초대받으리라는 기대치다. 그러나 여기에도 ‘수입/수출’의 차이는 크다. 흔한 말로 가성비가 없다고 해야 하나. 국내에서 세계적인 작가를 키우면 된다는 것은 실현하기 힘든 쉬운 대답이다. 


가령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단지 한국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여전히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는 작업뿐 아니라 국제무대에 ‘프로모션’을 위해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국제적 규범에 맞는 (무)의식적 변화를 감행해야 한다. 해외 무대에 통하는 현지의 기획자들과의 네트워크는 필수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 외적 노력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겠다. 사유는 언어이며, 조형 언어 또한 언어다. 그런데 언어는 용량이 큰 시스템이다. 이러한 언어의 중심을 변화시키는데는 큰 대가가 따를 수 밖에 없다. 국제적 규범을 갖추게 되었지만, 정작 자신이 발언할 차례가 되자 보다 소중한 자신의 많은 것들이 쓸려나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고, ‘너만의 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타자들의 냉정한 판단에 맡겨지게 된다. 생각할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는, 작가가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획자들의 활약이다. 작가든 이론가든 기획자든 비슷한 아이템을 두루 장착하느라 애쓰기 보다는 특화된 자기 영역이 필요하다.  

 


출전; 쿨투라(cultura)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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