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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녀 / 형태와 형태 전후의 것

이선영

형태와 형태 전후의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이경녀의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 시리즈는 제목은 다소 불편해 보이지만, 그림은 서정적이다. 타자, 특히 타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은 자연인을 사회인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통과제의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와의 괴리는 씁쓸한 현실감을 낳는다. 나의 상상에 빠져 있는 것은 쾌락이지만, 정신분석학자들이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을 구별한 이래, 양자의 긴장은 존재해 왔다. 한편 코로나의 충격은 인간의 사회성이 개인의 자유에 반(反)하는 억압이기보다는 본능적 즐거움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개인과 사회는 대립 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생활이 극도로 억제되자 이제는 갈구 된다. 그러나 대체로 ‘다른 시선’은 개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생산적이고도 소모적인 계기이다. 다름은 추구되는 매혹적인 가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다름은 매혹과 끌림의 원인이 되지만, 반대로 환멸과 배척이라는 결과도 낳는다. 나의 경계를 어디까지 둘 것인가, 어디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타자와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림을 그리는 주체도 늘 상 당면하는 문제다. 가령 이경녀의 작품 속 풍경은 실제로 봤다면 정말 황홀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가가 황홀에만 빠져 있었다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주관적 체험을 중시하는 어떤 미학적 경향은 성상파괴주의(iconoclasm)와도 비슷하게 구체적인 결과물에 무심하다. 그 경우 매개체가 불확실하기에 타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는다. 작가에게는 인상 깊게 마주했던 것을 자기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 이경녀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소재가 아름다울수록 의미 있을수록 이러한 딜레마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멀리서 보는, 지나가는 풍경은 늘 아름답거나 초월적이기 마련이다. 제목과 작품 사이의 온도 차는 ‘다른 시선’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있다. 


이경녀의 작품은 여행지에서 봤을 법한 이국적 풍경이기에 다소간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작가는 이국취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상 또한 다르게 보려고 한다. 작가는 ‘늘 보던 평범한 일상이 다른 시선과 만나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색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며, 욕망은 시각예술이 많이 의지하는 시각과 밀접하다. 여행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재)발견한다는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다른 것을 찾는 여정은 자기를 향한 먼 우회로들일 터이다. 이때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라는 개념은 거울을 보는 자신의 상황과도 비교된다. 그러나 거울은 자신을 제대로 보여주는가? 최소한 좌우의 상이 바뀌면서 실제와 일치될 수 없는 반사상은 자기 속의 타자를 비춰준다. 회화가 오랫동안 거울과 비교된 것은, 실제를 그대로 재현한 듯한 이미지에도 내재되어 있을 어떤 균열을 암시한다. 


이경녀의 작품은 실제에 대한 감흥이 넘쳐나지만, 대상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물을 많이 섞어 그린 수채화는 특정 대상이나 영역을 확 풀어헤치곤 한다. 그래서 작품의 구석구석을 확대해 보면 영락없는 추상이지만, 자신을 감동시켰던 최초의 지시대상을 감추지는 않는다. 풍경에는 어느 나라의 어느 성, 성당 등을 알아볼 만한 요소가 있다. 그러나 한 장의 그림에는 알아볼 수 없는 부분들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1-Ⅰ]는 이국적인 건물 위로 구름이 보인다. 구름 묘사 부분은 추상적이다. 어떤 가장자리도 확정되어있지 않은 구름은 그자체로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하늘이라는 거대한, 그리고 오래된 캔버스에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표현으로, 얼룩덜룩한 흔적들을 구름과 겹쳐놓는 방식은 수채화라는 매체와 어울린다. 풍경 부분에서 나무도 무늬처럼 표현함으로서 주관적 감흥을 끼워 넣을 만한 부분을 파고든다. 


형태 이전의 또는 이후의 상태인 얼룩덜룩한 부분은 무의식과 관련될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내부에 있는 타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로이트가 구별한 이드/자아/초자아라는 삼층의 구별에 의하면 제일 하층의 무의식은 이드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현실 그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의 기저를 이룬다.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전복]에 의하면, 라깡은 이드라는 용어보다는 타자라는 용어를 선호했다고 한다. 라깡의 이론에서 타자는 욕망과 관련되는데,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것, 그리고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으로 나타난다. 페터 비트머가 해석하는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상상과 상징의 차이는 메워질 수 없다. 나와 타자가 동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한다는 이경녀의 생각은 이러한 간극을 예시한다. 그러나 간극은 비극이기 보다는 바라보는 인간의 조건이다. 마주한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뛰어넘어야 하는 작가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철학자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동일자는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만 동일자이다’(데리다)라는 말은 인용하면서, 모든 현전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부재하는 것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수백년 넘게 지상에 우뚝 서 있었을 역사적 건축물들은 흐물거리는 외곽선으로 변모하는 것은 자못 견고해 보이는 상징적 우주를 흔들리게 하는 상상의 결과일 것이다. 울렁거리는 건물의 라인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을 때의 설레임을 나타낸다. 이국적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 울렁거리는 선은 풍경의 주관적 측면이다. 이경녀의 작품은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기에 관광지에 가득 있었을 법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19-Ⅰ]는 아래에서 올려다 본 관점을 통해 건물 위의 하늘로 시선을 유도한다. 하늘은 노랑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하며, 식물과 바위도 얼룩으로만 표현된다. 하나의 풍경을 다른 어법으로 서술함으로서 다른 시선을 마주하게 한다. 


추상적 부분은 정확한 외곽선이나 고유색을 벗어난 추상적인 색 얼룩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이 부분의 밀도가 더 희박해지면 동양화의 여백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Ⅰ]는 풍경 왼편 물이 흐를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를 거의 여백처럼 흐리게 표현했으며, 원경의 산과 나무는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번짐 효과를 주었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Ⅱ]는 색 점으로 찍은 이름 모를 꽃들이,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Ⅲ]는 나뭇잎들이 색종이처럼 표현하여 동화 속 풍경 같다. 일상어에서 ‘그림같다’라는 표현에는 그림에 대한 인간의 로망이 포함된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희망 사항을 모아 담아내는 것이 그림의 역할 중 하나다.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는 이러한 희망을 구체화한다. 이경녀의 작품에서 타자는 풍경에 나타난 자연 외에 보다 추상적인 타자, 즉 절대적 타자라 할 만한 비전을 포함한다. 


작가는 풍경에 등장하는 건물의 부분에서 뾰족 탑에 대한 애호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양의 솟대나 뾰족한 불교의 탑(stupa)처럼 여기와 저기를 연결시켜 준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Ⅵ]에는 탑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듯한, 옅은 밀도의 얼룩으로 표현된 하늘이 눈에 확 들어오게 한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Ⅳ]는 종교 건축의 높은 탑 위로 어떤 흐름을 표현하는 듯한 구름 들이 가득하다. 동서고금의 탑이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듯이 지상과 천상의 교감을 나타낸다. 작품 [다른 시선과 마주하기’20-Ⅴ]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이슬람 양식의 건물 위에 떠 있다. 작가는 다른 작품에서의 구름의 표현처럼 물감의 농담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어두운 하늘을 채웠다. 풍경 속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성스러운 기(氣)는 지상의 모든 견고한 것을 울렁거리게 하는 근본적인 힘일 수 있다. 부분적 추상 어법은 여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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