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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선/ 찢어진 합판, 찢어진 회화의 몸, 그리고 사람들

고충환

박광선/ 찢어진 합판, 찢어진 회화의 몸, 그리고 사람들 


합판을 바닥에 놓고 망치로 내려치면서 형태를 얻거나 톱과 밴지 등으로 자르거나 뜯어서 인물의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얻어낸 화면 위에 유화물감을 바르고 닦아내기를 반복해서 재현한다. 재현된 이미지들은 주로 사진첩이나 주변 인물들로 채워진다. 나는 그 인물을 개체로 인식하며 개체에 집중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개체가 위치한 의미를 되묻는 방식을 취한다...거친 외곽선은 생존과 치열한 삶의 모습을 상징화한 것이다(작가 노트). 


상실과 소외와 상처.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은 저마다 상실과 소외와 상처를 운명처럼 떠안고 산다. 상실과 소외와 상처는 삶의 조건이 되었고, 생활감정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를테면 노동이 나를 소외시키고(도구화된 나), 자본이 너를 소외시킨다(상품이 된 너). 도구화된 이성이 우리 그러므로 관계를 소외시키고, 종래에는 내가 나를 소외시킨다(자기소외). 그렇게 네가 낯설고, 세상이 낯설고, 나 자신조차 낯설다. 다시, 그렇게 상처는 나의 내면이 되었고, 나는 밤마다 그 상처를 혀로 핥는다. 이 상실감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다시, 그렇게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지극한 상실감은 현대인을 증명하고 증거 하는 가장 강력한 징후이며 증상이 되었다. 여기에 한국은 급조된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다. 경제 제일주의 원칙을 향해 내달리면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것들이 상실과 소외와 상처가 움트는 둥지가 되었고,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으로 내던져진,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 되었다. 

이 지극한 상실감, 이 지독한 상처의식, 이 지리멸렬한(그러므로 어쩌면 자기 파괴적이기조차 한) 자의식은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고, 재현 가능한가. 작가 박광선이 보기에 캔버스는 너무 매끄럽고 멀쩡하다. 회화의 몸 자체가 이미 상실과 소외와 상처를 어느 정도 내재화하고 있어야 하고, 최소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합판이다. 당연히 합판 중에서도 멀쩡한 합판이 아닌, 노가다 판에서 굴러먹던 합판이어야 했다. 합판은 공사판에서도 거푸집과 같은 막일에나 쓰지 마감재로는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없으면 공사가 불가능할 만큼 꼭 필요한 자재이고, 여기에 날실과 씨실로 촘촘하게 짠 그물구조를 하고 있어서 다른 어떤 나무보다도 강하다. 그 필수불가결성, 그 비천함, 그 근성이 상실과 소외와 상처를 내재화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 자신을 닮았고, 우리 보통사람들을 닮았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는 공사판에서 주운 합판을 망치로 내려치고 밴지로 뜯어내면서 사람 형상을 만들고, 가장자리 선을 만든다. 당연히 고운 선 보다는 터실터실한 가장자리 선이 얻어지는데, 그 비정형의 선이 사람들의 생존과 치열한 삶의 모습을 닮았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렇게 망치로 내려치면서, 밴지로 뜯어내면서, 상처를 내재화하면서 얼추 사람 형상이 만들어지면, 그 사람 형상 속에 사람 형상을 그려 넣는다. 그렇게 얻어진 사람 형상을 지금은 캔버스나 다른 패널 위에 덧붙이거나, 사각 프레임 속에 가두거나, 벽에 걸거나, 나아가 근작에서는 아예 합판 대신 캔버스에 사람 형상을 그려 넣는 등 회화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방식에 충실한 편이지만, 처음에는 최초 얻어진 형상 그대로 벽에 기대 세우거나 공중에 매달아 마치 실제 사람들이 거기 그곳에 있는 것 같은 현장감과 현실감을 더했다. 현장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 그대로 공간에 연출한 것인데, 압축된 상황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는 상황극을 보는 것 같고, 이로써 연출가(상황을 연출하고, 공간을 연출하는)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작가의 말처럼 개별적 존재(고독한 사람들)를 강조하는, 그리고 어쩌면 개별적 존재 간 관계(군중 속에서 오히려 더 고독한 사람들)를 부각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착안 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재현된 사람들의 표정이며 분위기가 흐릿한 것이 서정적 감흥과 함께 공감을 자아낸다. 작가는 주로 사진첩이나 주변 인물들을 재현한 것이라고 했는데, 사진첩으로 치자면 사사로운 기억을 소환해 각색한 것일 터이고, 그런 만큼 표면의 흐릿한 질감과 색감은 어느 정도 기억의 성질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는 각색한다. 좋았던 기억을 과장하고, 안 좋은 기억을 숨긴다. 여기에 기억은 때로 없던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억을 재현한다는 것은 결국 드러내고 숨기는 욕망의 드라마를 재현한다는 것이고, 그런 만큼 흐릿한 표면은 그 이율배반성이 물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사진첩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인물들을 재현한 그림들도 그런데, 객관적 현실 속에 간여 된,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간섭된 기억과 욕망의 매개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그 혹은 그녀에 대한 작가 자신의 기억과 욕망일 수도 있겠고, 그 혹은 그녀 자신의 기억과 욕망을 작가가 유추하고 해석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사람들의 얼굴 위로 어느 눈부시던 시절의 빛살처럼 한줄기 붓 자국이 스쳐 지나가고, 객관적 현실과 기억된 현실 사이로 미련처럼 비정형의 얼룩이 흘러내리다가, 머뭇거리다가, 아롱거리다가, 맺힌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한 그림 중에 거울 시리즈(M 시리즈)가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서 사용하는 거울 틀을 보내오면, 합판에 따로 제작한 그의 초상을 그 거울 틀에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사람들이 일상으로 사용하는 물건들은 어쩌면 그의 제2의 인격일 수 있다. 평소 그의 취향과 성향 그리고 어쩌면 품성을 반영하는 예사롭지 않은 물건, 그러므로 일종의 영물(페티시)일 수 있다. 그 물건들 중 특히 거울은 각별하다. 흔히 거울은 존재 확인과 존재증명 그러므로 자기 반영성을 매개하는 물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타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그런 연유로 거울의 이중성과 양면성이 흥미진진한 존재론적 담론에로 이끈다. 거울 속에 보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타자다. 나라고 착각하는 타자다. 수면에 일렁이는 반영상이 죽음에로 이끈 나르시스의 물거울이 그렇고(타자는 죽음이다), 우연하고 불완전한 조각을 자기와 동일시한 상상계를 사는 아기의 거울이 그렇고(타자는 파편과 조각의 무분별한 집합이다),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지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검열하는 거울이 그렇다(타자는 욕망이다). 그렇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 거울 속 타자들이 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나를 분열시킨다. 

그렇게 거울은 어쩌면 밑도 끝도 없는 정체성 놀이를 매개하는 매력적인 도구일 수 있다. 아마도 작가가 거울을 소재로 한 초상작업을 착상하게 된 계기이며 이유와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고, 그런 만큼 향후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도 작가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작가는 작가와 일상을 같이 했을 생활 오브제들, 이를테면 라면 봉지나 과자 봉지 같은 오브제들을 화면에 콜라주 형태로 붙이거나, 길게 연속해서 늘어놓거나, 층층이 쌓아 탑을 만든다. 아마도 정체성 확인이라는 평소 주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는 작업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업과 관련한 작가의 코멘트인데, 우리로부터 버려진 것들은 우리의 생명과 에너지를 떼 내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이 그 경우는 다르지만, 모든 것(존재, 그리고 어쩌면 생활 오브제를 포함한)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서 얻어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과 부닥치면서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도 영물이고, 라면 봉지도 영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리고 한동안 작업실 바닥에 깔아두었던, 발자국이며 커피를 흘린 자국, 비정형의 얼룩과 같은 시간의 흔적이며 존재의 흔적이 여실한 캔버스 천을 바탕 삼아 그 위에 합판에 그린 초상 조각을 배치한 그림도 있다. 흔적으로 남은 일상을 통해,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가 찾아낸 또 다른 자기만의 한 방법이며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평면의 실루엣 형태로 자른 두 사람의 형상이 서로 마주하고 선 채로, 공사장에서 주운 파이프가 그 가슴을 관통하는 작업도 있다. 아마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아니면 소통문제 혹은 불통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폭력적인 힘의 이중성을 다룬 알통 맨, 경제 제일주의와 경쟁 사회에 내몰리는 사람들과 사회를 풍자한 굴착기, 문화재 약탈을 다룬 탑, 입에 구멍이 나고(숨) 가슴에 구멍이 뚫린(상처) 공허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노가다 판에서 막 굴러먹은 합판 조각처럼 척박한 삶의 현장에 내던져진 사람들, 저마다 말 못 할 상처를 내재화한 사람들, 천박한 한 시대를 묵묵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초상을, 일상을, 삶을, 역사를 예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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