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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섬을 그리워하는, 섬처럼 고독한 도시

고충환

김영구/ 섬을 그리워하는, 섬처럼 고독한 도시 


 도시는 공사 중. 인간은 원래 자연으로부터 왔다. 그런 만큼 자연이 고향이다. 그리고 문명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은 점차 자연을 상실했고, 고향을 상실했다. 상실감을 대가로 인간은 현대인으로 거듭났다.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징후며 증상이 되었다. 그런 만큼 그 증상의 이면에는 상실된 자연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을 그리워하는 존재론적 그리움이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이렇듯 상실감과 그리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다. 그리고 문명이 건설해준 도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지만, 그 고향이 온전할 리가 없다. 상실감을 채워주지도, 그리움을 떨치게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대개 현대인의 도시에 대한 감정은 삭막하다. 비인간적이고, 비정하다. 무표정하고, 무색무취다. 상실감이 만들어준 감정이고 표정이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도시, 비정한 도시, 무표정한 도시, 무색무취의 도시를 색채 감정으로 치자면 무슨 색이 될까. 회색이다. 회색 도시다. 작가 김영구는 이런 도시를 그린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회색 도시를 그린다. 회색 콘크리트로 구조된 빌딩 숲을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린다. 화면이 좁은 듯 빼곡한 건물들을 하나하나 그리는 것인 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요구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리고 때로 실크스크린으로 찍기도 하는데,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하나같이 비슷한 형태와 크기와 얼굴을 한, 도시의 삭막하고 기계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가녀린 테이프를 얼기설기 엮어 틀을 만들고, 그 틀을 캔버스에 대고 붓질로 색을 채워 넣는 식의 일종의 공판법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같은 회색 도시지만, 때로 무미건조한 느낌이 강조되기도 하고 더러 물성이 강조되기도 하면서, 회색 도시는 한정된 스펙트럼 내에서 다양한 표정을 얻는다. 
그리고 그 회색 도시 위에 공사 중임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공사 차량을 오버랩 시킨다(도시_공사 중). 무채색으로 그려진 배경화면과 컬러로 그려진 화면이 대비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준다. 여기서 공사 중인 도시는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면서 자가증식하는 물신 도시, 무분별한 재개발사업으로 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장 가림막 뒤편으로 소외를 키우는 현대도시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도시는 항상 공사 중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자본이 순환하는 숨 막히는 현장이며, 도시의 전형적인 풍경일 수 있다. 

회색 도시에서 꿈을 꾸다. 그리고 작가는 회색 도시 위로 또 다른 모티브를 띄운다. 알록달록한, 크고 작은 열기구들이다(도시_날다). 아마도 날고 싶다는, 숨 막히는 회색 도시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는, 보들레르의 전언처럼 여기가 아닌 어디로라도 훌쩍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상징할 것이다. 여기가 아닌 어디? 거기가 어디인가. 아마도 상실한 자연이며 고향, 그러므로 존재론적 원형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상실된 유토피아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또 다른 그림에서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를 소환한다. 자연 대신 빌딩 숲을 이룬 신 몽유도원도다(도시_몽유도원도). 
상실한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부재 하는 것만이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불가능한 것만이 꿈꿀 수 있다. 그렇게 유토피아는 원래 없는 장소, 부재 하는 장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유토피아의 전언은 그 이면에 현실부정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다(그렇게 때로 유토피아는 혁명의 구실이며 동력이 되기도 한다). 다시, 그러므로 부정화법을 통해서 겨우 말할 수 있는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꿈꾸게 만들 수 있다(어쩌면 여기에 삶의 부조리와 역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회색 도시 위로 그리움의, 욕망의, 꿈의 계기들을 띄워 올린다. 
그리고 여기에 꿈꾸는 도시가 있다. 야경이다. 도시의 야경을 먼발치서 보면 명멸하는 불빛들이 아롱거리는 것이 꼭 도시가 숨을 쉬는 것도 같고, 꿈을 꾸는 것도 같다. 욕망이 잠자면서 뒤척이는 것도 같다. 그렇게 꿈처럼 아롱거리는, 욕망이 잠든 도시의 야경 위로 작가는 반가사유상을 호출한다(도시_반가사유상). 아마도 상실한 자연, 상실한 고향, 그러므로 어쩌면 까마득한 원형을 사유하는, 다시 말해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지 사유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표상할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반가사유상을 매개로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밤에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 밤에 꿈을 헤아리는 사람들, 그러므로 어쩌면 고독한 사람들의 내면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도시는 고독한 섬이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섬을 그린다. 몽유도원도를 재해석한 그림에서 산수 대신 빌딩 숲으로 채워 넣었듯 섬 속에 빌딩 숲이 빼곡하다. 그렇게 도시는 섬으로 전이된다. 섬이 도시가 되었다거나 도시가 섬으로까지 확장되었다기보다는, 도시를 일종의 섬으로 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게 작가가 보기에 도시는 또 다른 섬이다. 존재론적인 섬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듯, 도시 자체는 군중이지만 그 속을 사는 사람들은 개별적 존재들이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고독한 사람들이 동떨어져서 모여 사는 곳이 도시며, 그 유비적인 표현이 섬이다(도시_섬). 혹 빌딩 숲으로 빼곡한 도시_섬은 도시가 상실한 것들, 이를테면 자연과 고향 그러므로 원형을 상징할 수 있다. 그렇게 도시_섬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보기에 따라선 도시_섬 자체가 이미 그렇다. 도시와 섬, 도시와 자연, 도시와 고향, 도시와 원형이 서로 대비되면서 각을 세우고 있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 도시(그러므로 도시_섬)의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성질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회화를 넘어 설치회화로의 공간확장을 꾀한다. 변형캔버스를 도입하는 것인데,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합판으로 형태를 만든 연후에 그 위에 캔버스를 씌워 그림을 그린다. 특이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 섬들이 한 쌍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데칼코마니처럼 형태 그대로를 뒤집어놓으면 서로 마주하는, 또 다른 똑같은 형태를 얻을 수가 있다. 서로 반영하는 거울 효과다. 표면과 이면을 대비시키는 그림자 효과다. 
거울 효과? 그림자 효과?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두 개의 똑같은 섬을 조성했다. 그중 하나에는 섬의 원형 그대로를, 그리고 또 다른 형태에는 빌딩 숲으로 빼곡한 도시를 그려 넣었다. 같은 섬인데, 그중 하나는 섬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도시_섬이다. 그렇게 그려진 화면 뒤편에 지지대를 세워 두 개의 섬이 서로 마주하게 공간에다 설치했다. 그렇게 같으면서 다른 두 개의 섬이 마주하면서 대비된다. 마치 거울에서처럼. 그렇게 도시는 섬을 반영하고 섬은 도시를 되비친다. 섬은 도시가 상실한 자연과 고향과 원형을 상기시키고, 도시는 섬을, 어쩌면 자기가 상실한 그림자(그러므로 섬)를 그리워한다(앞서 상실한 것만이 그리워할 수가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자연(섬)과 문명(도시_섬)이 서로 반영하고, 상호 그림자 역할을 하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작은 섬은 벽에다 걸고, 상대적으로 큰 섬은 공간에다가 설치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것이 먼발치서 다도해를 내다보는 것 같은, 섬들이 떠 있는 바다를 조망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한 현실감과 함께 아득하고 먼 비현실적인 느낌도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섬들의 바다 사이를 마치 정원에서처럼 걸어볼 수도 있다. 그렇게 섬들의 바다를 거닐면서 도시가 상실한 것들을 상기하고, 섬만큼이나 고독한 도시를 떠올리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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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코마니는 마치 거울을 보듯 같으면서 다른 두 개의 형상을 얻을 수가 있다. 작가 김영구는 데칼코마니 기법을 전용해 자기만의 형식을 만들었다. 섬의 가장자리 선을 따라 합판으로 형태를 만든 연후에 그 위에 캔버스를 씌운 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마치 거울을 보듯 한 쌍을 이룬 캔버스 위에 섬을, 그리고 또 다른 캔버스 위에 회색 도시를 그렸다. 그리고 캔버스 뒤에 지지대를 대고 세워 두 개의 섬이 서로 반영하면서 대비되게 했다. 섬과 도시_섬이다. 그렇게 작은 섬은 벽면에다 걸고, 상대적으로 큰 섬은 공간에다가 설치했다. 평면을 입체로, 회화를 설치회화로, 나아가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해놓고 있는 경우로 보인다. 
이처럼 설치된 정경이 마치 먼발치서 다도해를 내다보는 것 같고, 크고 작은 섬들이 떠 있는 바다를 조망하는 것도 같다. 심지어 섬들의 바닷속을 거닐어볼 수도 있다. 그렇게 거닐다 보면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현실감과 함께, 아득하고 먼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도시가 상실한 것, 그러므로 어쩌면 섬으로 대변되는 것, 이를테면 자연과 고향, 그러므로 어쩌면 아득한 원형을 상기시키고, 그렇게 도시가 섬(도시가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는 것도 같다. 섬처럼 고독한 도시를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게 도시(도시_섬)가 섬을 반영하고, 섬이 도시(도시_섬)를 되비친다. 작가의 그림은 그렇게 자연과 도시, 자연과 문명이 서로 대비되는 오래된 문법의 또 다른 버전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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