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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자연의 본성을 품은 그림, 감각으로 지은 집

고충환

이진원/ 자연의 본성을 품은 그림, 감각으로 지은 집 


 무의미함, 가장 두렵게 여기는 것, 최종적인 진실인지도 모른다...어떤 사물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질 없음을 극복하는 것...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것들, 진한 초록, 신비로운 숲,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가 이내 흩어지는 입자들, 지금 나를 매혹하는 건 그런 것들 이어서, 너무나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우선 그 속에 머무르며 빛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작가 노트). 

무의미한 삶은 가장 두려우면서도 최종적인 진실이다. 성경은, 헛되고 헛되니 사람이 하는 만사가 헛되다고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의미한 삶이 두려워서 종교에 귀의한다. 어느 정도 예술 역시 그렇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 복무한다. 마치 종교와 예술이 무의미한 삶을 보상해주기라도 하듯이. 니체는,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무의미한 삶을 설명 그러므로 해명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미학만이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 여기서 미학은 또 다른 무의미함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무의미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니체의 말은 무의미함만이 무의미한 삶을 해명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니체가 보기에 미학 그러므로 예술의 지상과제는 무의미한 삶에 맞서는 것에 있다. 존재론적 결핍 의식 그러므로 타고난 결핍 의식에 대적하는 것에 있다. 
이로써 이진원은 자신이 예술에 복무하는 가장 숭고한 이유를 스스로 고백한 셈이다. 무의미한 예술을 통해 무의미한 삶에 맞선다는. 무의미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 있는 예술이라는 말이기도 한데(여기서 예술은 동시에 삶에 대한 태도가 된다), 어떤 사물을 그리는 것이 부질없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어떤 사물의 감각적 형상을 따라 그리는 그림은 여기서 배제되는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물 대상의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면 뭔가. 바로 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것들, 진한 초록, 신비로운 숲, 잠시 동안 하나가 되었다가 이내 흩어지는 입자들이고, 지금 작가를 매혹하는 것들이다. 
그 성분이며 성질에서도 추상할 수 있는 것이, 감각적 형상보다는 감각적 현상이다. 세계가 의미화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어쩌면 의미화의 과정과는 상관없이 있었던 자연현상이고, 자연과 작가가 상호 교감하는 감각 현상이고, 자연과 작가가 서로 삼투되는 현상이다. 그렇게 내가 자연을 보면(시선), 자연도 나를 본다(응시). 내가 자연을 보면서 자연의 일부로서 기입이 되고, 자연이 나를 보면서 내 속에 내재화된다. 그렇게 나는 자연이 되고, 자연은 내가 된다. 동화현상(다르게는 동일시 현상)으로 봐도 되겠고, 물아일체의 경지로 봐도 되겠다. 세계와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살로 채워져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는, 그리고 그렇게 자연이 내 의식을 생성시키고 내 몸이 자연에 연장되는 메를로퐁티의 우주적 살의 차원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지금 자기를 매혹하는 것들 속에, 그러므로 자연 속에, 그리고 자연과 자기가 교감하는 감각 현상 속에 머무르면서 빛나는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서 빛나는 것들은 스스로 발광하는 자연을 의미하기도 하고,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지만 사실상 빛나는 순간에 유비 될,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본성으로 빛을 발하는 자연현상의 찰나에 미친다. 그 순간, 그 찰나에 작가는 매혹되는 것인데, 그 자연현상이 순간만큼만 찰나만큼만 지속되는 것이란 점에서 작가는 덧없는 것을 그리고, 그러므로 어쩌면 무의미한 것을 그린다. 다시, 그러므로 덧없고 무의미한 것만큼이나 매혹적이고 감각적인 것(그러므로 어쩌면 순간)을 그린다.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를 실제로는 멀리 있는 것인데(신적 존재?)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신의 표상?) 감정이라고 했는데, 그런 아우라를 그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암시(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혹은 가시적인 것으로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기술)가 되겠고, 우리 말로 옮기면 분위기가 되겠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는 자연의 감각적 형상보다는 감각적 현상이, 의미화되지도 개념으로 환원되지도 않은 감각적 현상 고유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자연의 감각 현상을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그리고, 자연이 빛나는(자연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에 발하는 분위기를 그리는 것이다(여기서 교감은 자연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순간의 분위기를, 어쩌면 극적인 사건을 포획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숲속에서 올려다본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 사이로 산란하는 빛의 질료를 보는 것도 같고, 움직이는 듯 움직이지 않은 듯 미세하게 일렁이는 수면에 아롱대는 빛 알갱이를 보는 것도 같고, 수중에서 올려다본 수면에서의 희미한 빛의 기미를 보는 것도 같고, 투명한 레이스가 겹겹이 포개진 해파리의 하늘거리는 유영을 보는 것도 같고, 칠흑 같은 밤을 배경으로 터지면서 쏟아져 내리는 폭죽의 장렬한 주검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일부 그림에 붙인 제목으로 유추해보면, 어스름한 대지 위로 첫 빛의 기미가 내려앉는 순간을 그린 것도 같고(해 뜨는 땅), 숲속에서 작렬하는 빛의 세례를 받아 나무의 형태가 해체돼 보이는 극적 순간을 그린 것도 같다(황금빛 나무). 
이 모든 그림에 빛이 있고, 빛의 기미가 감지된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두움도 있다. 빛은 어두움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어두움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빛을 그린다는 것은 동시에 어두움을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자연에 대한 감각의 경험치는 빛과 어두움의 스펙트럼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빛의 질량과 어두움의 정도를 조율하는 것에 있고, 이때 그 조율하는 도구가 감각이다. 지극한 빛은 형상을 지우고, 지극한 어두움 역시 형상을 삼킨다. 빛에 가까울수록 사물성이 부각 되고, 어두움 쪽으로 치우치면 분위기가 강조된다. 
그건 마치 하이데거의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을 보는 것도 같다. 대지는 진리를 숨기고, 세계는 진리를 드러낸다. 대지는 세계에 의하지 않고서 진리를 드러낼 방법이 없고, 세계에 의해 드러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의 개념이고, 죽은 진리에 지나지 않은 것. 그러므로 진리를 보존하면서 진리를 드러내는 방법이 예술의 지상과제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이율배반이 그 방법론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 여기서 대지와 세계의 자리에 대신 어두움과 빛을 대입해보면 그대로 작가의 그림(그러므로 감각)이 작동하는 원리가 된다. 어두움 속에 분위기(어쩌면 감각과 함께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결정적일 수 있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빛의 기미를 빌려 그 분위기를 감각의 표면 위로 그러므로 그림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정작 빛이 아닌, 분위기를 품고 있는 어두움이 된다. 다시, 그렇게 표면적으로 볼 때 작가의 그림에서 빛이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빛은 어두움에 종속되는 것이며, 어두움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며, 어두움에 부수되는 것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보존되면서, 동시에 드러나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분위기란 뭔가. 작가의 그림에서 그토록 결정적인 분위기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다시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사실은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사실은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인데 가시를 통해 설핏 보았다고 느끼는 감정이며, 가시를 통해 볼 수 있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그게 뭔가. 암시다. 암시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가 없다. 어떤 기미이며, 어떤 여운이고, 어쩌면 어떤 착각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기미(최소한으로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와 여운(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심지어 부재에서마저 여전히 존재를 보는 것)으로 하여금 그림 그러므로 감각의 기술이 되게 하는 것에 암시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고 기능이 있다. 
그렇게 무엇이 드러나 보이는가. 그렇게 무엇이 감지되는가. 그렇게 분위기에 부수되는 것은 뭔가. 아니마다. 자연의 호흡과 숨결이며 원초적 자연의 숨이다. 자연이 작가의 내면 그러므로 그림 속에 심어놓은 울림이며 내적 울림이다(그러므로 그림은 작가의 몸이다). 작가의 그림 속엔 기포가 있고, 비정형의 크고 작은 얼룩이 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하는 점들이 있고, 희미한 그래서 은밀한 선들이 있다. 그 형식요소(아니면 차라리 감각 요소)가 마치 내면(혹은 오히려 심연)에서 자기를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어스름하고 은근한 색채감정과 어우러지면서 켜켜이 중첩된 레이어를 만들고, 화면 안쪽으로 투명한 깊이를 만든다. 여기서 점과 선은 모더니즘의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을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본성에 의한 것이며, 특히 선은 직선일 때조차 곡선으로 보이고 유기적으로 보인다(훈데르트바서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00 같은, 다만 00처럼 보일 뿐,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지목할 수도 특정할 수도 없는 암시적인 형태 혹은 차라리 감각이 규정할 수도 개념으로 환원할 수도 없는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원형을 열어 보인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첫 빛의 기미가 어스름을 깨우는 대지 앞에 서게 만들고, 숲이며 나무의 형태를 해체 시키는 빛의 세례 속에 서게 만들고, 빛과 바람이 희롱하는 수면 앞에 서게 만들고, 희미한 빛의 기미가 올려다보이는 물속에 서게 만든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렇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져들게 하고, 환상(작가의 그림이 감각적임을 인정한다면, 차라리 환각)에 대면하게 만든다. 
사실 작가에게 환상은 감각만큼이나 오래된 일이고 본질적인 것이다. 전작에서 보면, 흡사 샌디 스코글런드의 초현실주의 사진에서처럼 금붕어가 유영하는 방(꿈꾸는 침대)이 그렇고, 꽃들이 만개하는 소파(꿈꾸는 소파)가 그렇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상황도 그렇지만, 붉은 색의 모노톤으로 나타난 색채감정이 그림을 환각적으로 보이게 하는데, 마치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의 투명한 깊이를 머금은 붉은 색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여기에 집을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희미한 그래서 은밀한 가장자리 선으로 축약된, 켜켜이 중첩된 선들이 투명한 깊이를 만드는 집이다. 아마도 작가가 내면에 지은 집일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하이데거를 인용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으로 지은, 다시, 그러므로 또 다른 언어로 지은 존재의 집일 것이다. 감각으로 그러므로 예술로 무의미한 삶을 건너가기 위해 지은, 자신만의 성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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