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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림/ 미술은 어떻게 존재를 돕는, 그러므로 연민하는 도구가 되는가

고충환

한혜림/ 미술은 어떻게 존재를 돕는, 그러므로 연민하는 도구가 되는가 


벌건 속살을 드러낸 채 마구 파헤쳐진 땅, 땅을 파고 있는 굴착기와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 찢어진 가림막 틈 사이로 설핏 드러나 보이는 텅 빈 공사장 풍경. 작가 한혜림은 그렇게 헐벗은 땅과 황량한 풍경을 그렸다. 그 풍경은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근대화의 풍경이고 사회학적 풍경이다. 소위 삽질 공화국으로 대변되는 그 풍경은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이 만든 풍경이다. 그 풍경은 풍경 뒤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데, 경제성이 떨어지는 사람들, 효율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고 타지를 전전하는 원주민을 소외시키고,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조르주 바타유라면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을 잉여 인간이라고 불렀을 것이고, 조르조 아감벤이라면 호모 사케르, 그러므로 법으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헐벗은 땅과 황량한 풍경에 마음이 끌린다. 지금은 부재 하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풍경에 마음이 쓰인다. 작가가 일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노동 현장을 그리고, 버려진 것들을 그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부재 하는 것들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존재의 흔적을 그림으로, 텍스트로, 영상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기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향수라고 해도 좋고, 태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겪었을 삶의 흔적에 동화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그 능력을 예술로 승화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애정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고, 연민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의 덕목이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가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고 보는데, 작가는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흉터>에서 아마도 사진 뒷면을 눌러 쓴 신체 위의 텍스트를 보여준다. 신체 위로 돋을새김 된 그 텍스트의 세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혼잣말, 속말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혼잣말, 속말을 몸에 아로새겨진 상처처럼, 흉터처럼 지니고 산다. 설핏 읽을 수 없는 텍스트처럼 잘 안 보이지만, 잘 보면 보인다. 상처가 그렇고, 흉터가 꼭 그런 것처럼. 그리고 공중전화부스에 탁자를 그리고 전등을 설치해놓은 영상작업을 작가는 <위로도>라고 부른다. 유리창 벽면에 텍스트가 적혀 있는데, 아마도 위로하는 문구일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운 사람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장치이고 설비일 것이다. 진정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그렇게 세상 끝에 있을 익명적인 누군가와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다시 그렇게 소통의 계기가 전에 없이 활짝 열려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고립되고 더 고독하다. 
그래서일까. 얼핏 영수증 단말기처럼 생긴 장치에 달린 단추를 누르면 영수증을 뱉어내듯 텍스트가 적힌 쪽지를 뱉어낸다(좋아해요). 처음엔 좋아해요, 라는 문구가, 그리고 재차 정말 좋아해요,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좋아한다는 말,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 같다. 오용되고 남용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연변 처녀의 말투 같고 진부한 말이라고도 생각했는데, 그 의미가 이렇게 절실하게 와닿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상실된 의미가 회복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혹 듣고 싶은 말을 아무도 해주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 말을 책이나 기록 속에서 찾아봐야 할 세상에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혀온다. 그리고 작가는 유리창에 입김을 호호 불어 손가락으로 눌러 쓴 글씨를 보여준다. 내 슬픔은 짙고도 선명해요. 존재에 대한 연민에 진정성을 더하는 문구로 봐도 되겠고, 작가의 작업이 존재에 대한 연민으로 견인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작가의 작업에 할머니가 매개된다. 할머니가 아파서 몸져누웠다. 그래서 할머니처럼 몸져누운 것들, 쓰러진 것들, 버려진 것들, 보호가 필요한 것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길가에 버려진 채 쓰러져있는 플라스틱 소재의 중앙 분리대가, 주차금지 표지판이,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한때 인도를 구성했을 빨간 벽돌이, 그리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끈으로 동여매 놓은 플라스틱 호스가 예사롭지 않다. 몸져눕기 전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저마다의 기능과 용도를 수행했을 것이고, 그렇게 저 홀로 설 수 있는 것들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면서 덩달아 존재감마저 상실당한 것들일 터이다. 곧잘 아파트 분리 수거장에 보면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물건들을 볼 수가 있는데, 그 경우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가 사물을 보는 눈은 예사롭지 않다. 사물에 할머니가 투사되고 사람들이 투영된 것인데, 그 사물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사물인격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갓 사물에 작가의 시각이 가닿으면서, 어쩌면 애틋한 마음이 숨처럼 불어넣어지면서 사람과 마찬가지의 격(그러므로 어쩌면 생명)을 얻게 된 사물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할머니와 같은 세대의 노인과 이웃들을 찾아 나선다. 그중에는 참전 용사도 있고, 파지를 수거해 생활하는 노인도 있고, 노인정에서 만난 사람들이며 평생학습센터의 마을 활동가도 있다. 그들을 일일이 만나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고 영상으로 기록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역사는 거대서사와 거대담론 중심으로 기술돼왔다. 거기에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삶의 서사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여기에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 아날학파다. 생활사, 풍속사, 민속사와 같은 삶의 현장으로부터의 서사가 모여 하나로 수렴되는 역사 기술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아날학파의 미시서사와 작은 담론에 동조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이런 명분 혹은 당위성과 함께, 작가는 아마도 이름 없는 누군가의 삶도 역사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게 보통 사람들의 삶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천장에 설치된 레일을 따라 걷도록 장치된 재활보조기구를 직접 착용하고 걷기 연습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다고 몸져누운 할머니가 다시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할머니가 건강을 회복해 다시 일어나 걸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그렇게 몸져누운 할머니에서 비롯된 작가의 작업은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능을 상실한 사물들, 그리고 어쩌면 보호가 필요한 사물들을 소재로 한 사물인격체 작업으로, 보통 사람들의 삶에 기념비적인 성격을 부여한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사람이 사람을 돕듯 도구가 사람을 돕는 보조기구 작업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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