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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세상과 존재의 불완전한 관계, 그러므로 어쩌면 경계 위에 선

고충환




김지혜/ 세상과 존재의 불완전한 관계, 그러므로 어쩌면 경계 위에 선 





주제에 대하여, 연속_불완전한. 작가 김지혜가 그동안 자신의 작업에 붙인 주제를 보면 대략 자아정체성,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 관계의 긍정과 무한의 지속을 들 수 있다. 한눈에도 다소간 무겁고 관념적인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로 미루어 볼 때 작가의 작업은 아마도 자기반성적인 물음에 맞닿아있고, 자신과 타자(사회)와의 관계에 잇대어져 있다. 서로 별개의 섬들로 단락되기보다는, 아마도 상호 간 유기적인 관계로 연속된 이 일련의 주제들에서 유독 관계 개념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관계는 복수를 전제로 한다. 내가 있으면 네가 있어야 한다. 주체가 성립하려면 객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존재든 개념이든 단독자만으로 관계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게 관계는 나와 네가 연속되고, 주체와 객체가 연결되는 개념이다. 그렇게 관계 개념은 동시에 어느 정도 연속 개념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근작에 붙인 연속이란 주제는 관계에 기초한 이전 주제를 아우르면서 확장 시키는, 그리고 그렇게 종전 작업을 증폭하면서 종합하는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주제로 제시한 연속 개념이 예사롭지 않다. 연속이되 불완전한 연속이다. 불완전한 연속? 왜 불완전한 연속인가. 도대체 불완전한 연속이란 어떤 연속인가. 작가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생전에 자기를 가장 많이 닮은 아버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이 그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에게서 자기에게로 연이어진 인연의 끈이 끊어졌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불완전한 연속 개념을 주제로 내세운 작가의 근작은 어느 정도 생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고 오마주이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본, 존재에 대한 사유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불완전한 연속 개념 자체는 비록 아버지의 죽음이 불러온 부분이 없지 않으나, 사실은 작가의 평소 주제 의식이 표출되고 반영된 경우로 보아야 한다. 관계 개념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 형성과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속 개념도 상당한 불완전성을 자기의 한 형성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의 연속성 개념이 있다. 과학적 진화란 원인과 결과가 맞물린 인과론의 산물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여기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연속성(그러므로 어쩌면 불완전한 연속) 개념이 있다. 과학적 사실이란 알고 보면 우연하고 돌발적인 사건들의 무분별한 연속에 지나지 않고, 다만 이성의 오만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라는 발상이다. 각 내적 필연성과 우연성의 인정이 상호 비교되는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관계(그러므로 어느 정도 연속) 개념과 관련해 불교의 인드라망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서로 반영하면서 연이어진, 유리구슬로 촘촘한 그물망이다. 인과론을 넘어선, 우연마저도 필연인 차원에서의 착상이다. 

그렇게 작가는 진즉에 관계 개념의 한 속성으로서 어느 정도 불안정성을 포함하고 있었고, 근작에서는 연속 개념의 한 요소로서 상당한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있다. 인과론과 함께 우연성(노이즈?)의 매개와 간섭을 인정하는 유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작가의 사진은, 드로잉은, 그리고 설치작업은 바로 그처럼 흔들리는 유격,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유격을 표출하고 표현하고 표상한 감각의 소산이면서 그 물적 증거들이다. 


사진, 스트라이프에서 스트로크로. 그러므로 그동안 주로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 작업(디지털포토) 역시 외관상 도시의 경관에 매료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도시를 매개로 본 자신과 사회, 사람들과 사회와의 관계를 주제화한 것이다.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사람들과 사회와의 관계의 인식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일반화한 것이다. 미학은 언제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개인적 경험이 자기에 함몰되지 않고 보편적인 경험으로 일반화할 때, 자기를 통해서 타자를 말할 때 미학은 비로소 열린다.
 
그렇게 작가가 자기를 통해서 타자를 말하는 장이 도시다. 도시는 추상이다. 얼핏 도시는 알만한 감각적 형상으로 축조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속에 추상을 숨겨 놓고 있다. 알만한 감각적 형상, 그러므로 도시의 표면을, 피부를, 파사드를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추상과 만난다. 현대도시에서 추상은 심지어 숨어있지 않기조차 하다. 휘황한 불빛으로 유혹하는 색면들, 아찔하거나 아득한 직선들(곡선으로 구조화된 자연의 그것과 비교되는), 마치 퍼즐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포맷들(유기적인 자연의 그것과 비교되는)에서처럼 도시에서 추상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추상은 감각적 형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석들, 변방들, 숨어있는 것들, 알 수 없는 것들, 설핏 본 것 같기도 한 어떤 사람의 눈빛들, 오리무중의 기호 같기도 한 사람들의 몸짓들, 도무지 읽어낼 재간이 없는 마음들, 미처 발화되지 못한 말들, 실체 없이 떠도는 말들, 혀끝에 맴도는 말들, 그러므로 노이즈처럼 허공에 부유하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작가는 감각적 형상이 숨겨 놓고 있는 도시의 이면(아니면 공공연한 표면?)을, 추상성을 색면으로, 스트라이프로 표현했다. 

스트라이프는 처음에 직선으로 표출되다가(세련되지만 무미건조한 도시), 머뭇거리는 곡선으로 표현되다가(작가에게 도시는 또 다른 자연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연하고 유기적이고 무분별한 스트로크(붓질)를 닮아간다. 사진이되 그림 같은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각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그리고 마침내 회화적이고 해체적인 순으로 도시가, 도시의 이미지가, 그러므로 어쩌면 도시에 대한 작가의 관념과 감각이 진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도시를 소재로 한 작가의 근작은 사진과 회화의 경계 위에 서 있다. 


드로잉, 청색과 다른 숨들의 기록, 그리고 흙기둥 설치작업. 드로잉은 가장 회화적인 장르고, 가장 해체적인 장르다. 가장 직접적인 장르고, 가장 몸적인 장르다. 사유가 매개될 틈도 없이 감각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고야 마는 장르다. 오직 흔적으로서만 말하는 미디어다. 말할 수 없는 것들, 의미할 수 없는 것들, 머뭇거리는 것들, 주저하는 것들, 생각(그러므로 어쩌면 관념)의 변방을 떠도는 것들을 말하고 의미하게 해주는 미디어다. 

사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디지털포토는 찍는다기보다는 만든다. 그렇게 자기만의 비전을 제시하고, 자기만의 세상을 연다. 그렇게 작가는 사진을 만들면서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현실에 연장된 비현실이, 감각에 연장된 관념이, 구상에 연장된 추상이, 의식에 연장된 무의식이, 말할 수 있는 것에 연장된 말할 수 없는 것이, 의미론적 대상에 연장된 탈의미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에 연장된 비가시적인 것이, 가까이 있는 것의 일부로서의 멀리 있는(아마도 발터 벤야민이라면 아우라라고 했을) 것이 은연중 포획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현실의 틈이 붙잡혀 열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작가에게 사진은 체질적으로 드로잉적인 것이었다. 우연적인 것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필연(현실의 감각적 기록)을 가장한 우연적인 것이었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진은 말하자면 드로잉에 연장된 것이었고, 드로잉은 처음부터 사진의 일부였다. 그렇게 작가는 드로잉을 한다. 몸과 그림이 수직이 되도록 바닥에 붙여놓고 드로잉을 한다. 몸이 그리고, 중력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림이 얼추 완성되었다 싶으면 그림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떼어낸 테이프를 한지 위에 붙여 촘촘한, 총총하면서 느슨한 관계의 망을 만들고, 시간의 층을 쌓는다. 작가는 그렇게 만들고 쌓인, 어쩌면 흔적의 기록으로 봐도 좋을 드로잉을, 다른 숨들의 기록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사진 그러므로 어쩌면 드로잉은 시간을 기록하고, 흔적을 기록하고, 숨(삶의 매 순간, 혹은 몸의 필연 그러므로 어쩌면 마치 중력과도 같은 몸의 숙명)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흙기둥 설치작업이 있고, 청색이 가세한다. 작가는 흙기둥을 쌓아 마치 토템폴과도 같은 지주를 만들고, 그 표면에 드로잉을 하고, 몸(그러므로 어쩌면 숨)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아마도 노동집약적인 작업, 정직한 노동에 자기를 몰입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지주(아마도 아버지를 대신할?)에 해당하는 어떤 표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표면에 목탄과 수성 안료를 올리는데, 청색(청색이라기보다는 청색의 계조 혹은 기미)이 두드러져 보인다. 작가에게 청색은 각별하다. 보통 청색은 긍정과 희망과 이상을 상징하지만, 사실 그 의미론적인 스펙트럼은 상상 이상으로 넓다. 그 상징적 의미는 양가적인 것, 양극적인 것을 포함하며, 규정할 수 없는 것, 이율배반적인 것, 역설적인 것에 두루 미친다. 아마도 근작에서 작가에게 청색은 삶과 죽음, 죽음과 재생을, 그 불완전한 연속을 상징할 것이고, 밑도 끝도 없는 코로나 블루의 우울한 터널을 통과하는 자기를, 사람들을, 시간을, 시대를 표상할 것이다. 

세상과 존재의 불완전함, 나는 이제 그것을 자신 있게 사랑하기로 했다(작가 노트). 작가의 사진은, 드로잉은, 그리고 설치작업은 세상과 존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껴안는 과정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고, 스스로 거는 주문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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