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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작가의 사과에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고충환




박미연, 작가의 사과에는 어떤 향기가 나는가 




사과는 나에게 일반적인 대상이 아니다. 폴 세잔의 사과에서부터 출발한다. 가장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이 되는 동기로 인해 사과는 나에게서 시작된다...누군가 작품에서 점, 선, 면을 픽셀(회화의 형식요소? 회화의 모나드?)이라고 얘기할 때 나는 향기로 답한다(작가 노트). 


그동안 작가 박미연은 꽃을 그리고 사과를 그렸다. 물론 막간처럼 팝아트적인 소재를 그린 적도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그림을 소재주의 경향의 회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물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추구하는 재현적인 경향의 회화로도 규정하기 어렵다. 작가에게 무엇을 그리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보기에 소재는 다만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실이며, 그림을 시작하게 해주는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재가 다만 그림을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면, 작가는 도대체 뭘 그리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리고 그럼에도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여기서 작가는 세잔의 사과를 소환한다. 그렇다면 왜 세잔의 사과인가. 주지하다시피 세잔의 사과는 현대미술 신화를 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세잔의 사과를 이해하기 위해선 세잔이 자기 회화를 위한 반성적인 대상으로 삼은 인상파 회화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알려진 대로 인상파는 변화무상한 사물 대상의 표면 현상을 그렸다. 사물 대상의 고유색을 부정하는 한편, 색이란 사실은 빛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색 대신 빛을 그렸다. 빛의 질료를 흔적으로 간직(혹은 기억?)하고 있는 색을 그리고, 빛의 실체를 증명하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색을 그렸다. 그래서 인상파 그림을 보면 온통 빛으로 아롱거리는 것 같고, 그렇게 아롱거리는 빛의 질료 뒤편으로 사물 대상이 왜곡되고 해체되는 것 같다. 빛은 말하자면 왜곡과 해체의 화신이다. 그렇게 빛은 종잡을 수가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여기서 볼 때 틀리고, 저기서 볼 때가 다 다르다. 

세잔은 이처럼 회화가 사물 대상의 표면 현상을 좇는 것이 불만이었고, 변화무상한, 그래서 어쩌면 덧없는 감각 현상을 좇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구조다. 항구적인, 항상적인, 그래서 신뢰할 만한, 어쩌면 윤리적이기조차 한(인상파의 감각적인 태도와 비교되는) 그림의 구실을 사물 대상의 구조에서 찾았다. 그렇게 구조주의 회화를 열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사물 대상의 구조란 최소한의 형식으로 환원되고, 따라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핵심 테제에 해당하는 환원주의 회화를 열었다(그리고 알다시피 이후 모더니즘 회화는 점, 선, 면, 색채와 같은 회화의 형식요소를 따져 묻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세잔은 모든 사물 대상은 원통과 원뿔과 같은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형태(그러므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다고 했고, 이로써 기하(학)주의 회화를 열었다. 아마도 세잔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실제로도 이런 기하학적인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작가에게로 돌아가 보자. 작가에게 사과는 일반적인 대상이 아니다. 김춘수에게 꽃이 일반적인 대상이 아니듯이. 일반적인 대상이 마침내, 비로소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선 이름을 불러주는 시인의 명명 행위(그러므로 사건)가 매개되어야 한다. 그렇게 명명 행위에 의해 마침내, 비로소 일반적인 대상이 하나의 꽃(그러므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으로 재생될 수가 있었다. 바로, 존재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에 대한 해법을 숨겨놓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일반적인 대상을 하나의 사과로 재생하기(그러므로 하나의 엄연한 존재로서 존재하기, 다시,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사건을 예비해놓고 있는가. 

작가는 가장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이 되는 동기로 인해 사과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여기서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이 되는 동기가 세잔이 추구했던 항구적인, 항상적인 사물 대상의 구조와 통하고, 사물 대상(그리고 사물 대상의 재현)을 형식요소로 환원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환원주의와도 통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가적 태도에는 세계(그리고 세계의 재현)를 회화적 형식요소(이를테면 중첩된 붓 터치가 만들어낸 크고 작은 면, 색채, 그리고 어쩌면 향기?)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가 읽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과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서 시작된다고 했다.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사과?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사과? 자신(만)의 사과? 세잔의 사과 역시 그랬다. 세잔으로부터 비소로 막 시작된 사과, 세잔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과, 그러므로 세잔의 사과가 아니라면 현대미술의 신화를 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세잔으로 하여금 그 신화를 열게 해준 계기가 구조였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그 계기란 뭔가. 작가로 하여금 일반적인 대상을 하나의 사과로 거듭나게 해준, 작가로 인해 비로소 새롭게 시작되는,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만)의 사과를 가능하게 해준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이 되는 동기란 뭔가. 여기서 작가는 향기라는 답을 내놓는다. 향기? 여기서 향기란 감각적 실재인가, 아니면 관념적 실재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회화적 실재(그러므로 회화의 형식요소)인가. 질료인가. 기분인가. 기미인가. 감정인가. 분명한 것은 작가에게 향기란 가장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적인 동기다(누군가 그림에서 점, 선, 면과 같은 회화의 기본을 말할 때 나는 향기로 답한다). 아마도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원인이고, 추구(그러므로 태도)로 치자면 원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색채다. 색채? 향기? 색채로 표현된 향기? 그러므로 어쩌면 공감각적인? 


색(의 미묘한 떨림)은 화면 속에서 향기를 연상시킨다. 누군가 작품에서 점, 선, 면을 말할 때 나는 향기로 답한다...화면과 온전히 하나가 된 색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하모니...시종 그림을 그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색이다. 무엇을 그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작가 노트). 


그렇게 마침내 작가의 회화를 지지하는 두 축(어쩌면 하나의 축)에, 색채와 향기에 도달했다. 작가는 화면과 온전히 하나가 된 색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하모니에 대해서 말한다. 작가의 이 말은 색채의 마술사로 알려진 마티스를 연상시킨다. 마티스에게 회화란 다름 아닌 표현이었고, 회화에서의 표현이란 색채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색채가 곧 표현이었다(작가의 말대로라면 색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하모니). 회화에서 가장 근원적인, 원초적인, 기본이 되는 동기를 찾기 위해 세잔을 소환했다면, 그 동기가 다름 아닌 향기, 그러므로 색채로 판명됨에 따라 그 판명을 증언하기 위해 이번에는 마티스를 호출한다. 그렇게 작가에게 색은 향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색은 곧 향기에, 그리고 향기는 곧 색에 다름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색과 향기의 관계에 관한 한 공감각이 작용하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회화에서의 궁극적인 것은 뭔가. 여기서 작가는 구조주의자 세잔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닌 색채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자기를 대변해줄 증언자로서 색채주의자 마티스를 호출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미술사에 기생한다. 미술사를 숙주 삼아 미술사를 자기화하는 방법을, 미술사를 재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문제는 향기다. 세잔이 사과의 구조를 그렸다면, 작가는 사과의 향기(그러므로 색채)를 그렸다. 여기서 색채와 향기의 공감각을 인정한다고 해도, 실제로 사과에서 향기를, 그것도 매번 다른 사과에서 다른 향기를 맡고, 더욱이 그 향기를 다른 색채로 표현(그러므로 환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작가의 남다른 감각의 소산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향기란 질료적인, 자연적인, 그러므로 감각적인 대상으로만 머물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매번 다른 기분과 감정, 생체리듬과 바이오리듬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과를 매개로 해서 실제로 작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 과도로 사과껍질을 깎는 과정에 사과에 투사된 자기, 사과를 깎는 순간에 자신의 몸이 겪는 사건, 사과가 불현듯 불러일으킨 생각(그러므로 어쩌면 향기), 사과와 자기와의 교감, 그러므로 사과를 통해 본 몸의 생태학(그러므로 어쩌면 몸의 현상학)을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색채와 향기로 구조화된(그러므로 환원된) 일련의 사과 그림을 작가는 <answer me my love>라고 부른다. 근작의 주제다. 내 사랑이라고 답해달라는 주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향기라고, 너(사과)에겐 좋은 냄새가 나, 라고 답해달라는 주문이다. 색을 통해서 마티스는 편안한 안락의자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작가는 색을 매개로 좋은 향기가 나는(감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답한다. 색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것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다. 여기에 작가는 색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각적 쾌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그렇게 작가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감각적인 회화로 확장 시킨다. 금욕주의와 구조주의(세잔)로부터 시작해 감각주의와 쾌락주의(마티스)로 되돌아온다. 어쩌면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두 인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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