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이정원/ 위로하는 달, 판타지를 열어놓는 달

고충환



이정원/ 위로하는 달, 판타지를 열어놓는 달 



기억. 호박(화석화된 수지)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투명한 덩어리 속에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유리 덩어리 역시 호박처럼 자기 속에 화석을, 전설을, 기억을 보존할 수 있다.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기억에 물질적 형상을 부여해 현재 위로 되불러올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유리의 투명한 성질을 이용해 기억을 소환하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 속에 불투명한 색유리와 투명한 유리를 대비시키는 것으로, 그리고 유리 덩어리를 부분적으로 갈아내 희뿌옇게 만드는 것으로 기억을 조형했다. 희뿌옇게 피막이 덮인 부분과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부분이 대비되는 것인데, 그대로 희미한 기억과 또렷한 기억이 비교되는 것을 표현했다. 희미한 기억과 또렷한 기억? 사실 모든 기억은 희미하다. 이처럼 희미한 기억을 또렷하게 만드는 것은 욕망이다. 되새기고 싶은 기억은 부풀리고, 잊고 싶은 기억은 지우고, 부끄러운 기억은 각색하는 것이 욕망의 일이고, 그런 만큼 욕망이 기억을 희미하게도 또렷하게도 한다. 이처럼 유리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투명한 유리를 통해 기억(그러므로 어쩌면 욕망)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비롯했다. 


무질서 속의 질서. 그리고 작가는 블로잉 기법으로 속이 빈 기(용기) 형태의 유리 조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표면에 색실과도 같은 중첩된 곡선의 패턴을 입혔다. 패턴이라고는 했지만, 중첩된 선들은 흐르는 것도 같고 분방한 것도 같다. 마치 기를 회전시키면 그 안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그 한가운데로부터 선들이 생성되는 것처럼 보이고, 그 회오리를 따라 선들도 덩달아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정작 기는 멈춰 서 있는데, 선들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최소한 흐름을 암시하고 있다. 흐르던 기억의 여전한 관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유리 조형은 찻잔 속의 폭풍 같기도 하고, 정중동의 표상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표상을 작가는 무질서 속의 질서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카오스를 내장한 코스모스, 카오스를 예비하고 있는 코스모스가 결합 된 카오스모스로 나타난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표상하는 것도 같다. 


폭넓은 흰 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 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 어린 흰빛의 조화...아주 일그러지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아름다움...계산을 초월한 아름다움...신기스럽고도 천연스러운 아름다움(백자 달항아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 

백자 달항아리. 백자 달항아리가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이라는데, 한국미의 백미라는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자는 한국미의 원형을 무기교의 기교라고 했고 무법이라고도 불렀다. 무기교로 기교를 넘어서고 무법으로 법을 능가한다는 말이다. 비록 기교의 소산이라고는 해도 그리고 법의 산물이라고는 해도 그 소산이나 산물에서 기교가 보이고 법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기교의 소산인데 어떻게? 법의 산물인데 어떻게? 그러므로 어쩌면 불가능한 기획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숙련을 충분히 취한 연후에는 숙련을 버려야 비로소 취할 수 있는 어떤 경지며 차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경지며 차원으로 오롯한 것이 백자 달항아리다. 달항아리에는 정형이 한군데 없다. 색깔도 비정형이고 형태도 비정형이다.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렇고, 어리숭하게 생긴 둥근 맛이 그렇고, 아주 일그러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둥그런 원을 그린 것도 아닌 형태가 그렇다. 색깔은 또 어떤가. 폭넓은 흰빛이고 순정 어린 흰빛이다. 그 형태며 색깔은 심지어 무심하게 아름답고, 어리숙하면서 순진하게 아름답고, 천연스럽게 아름답다. 그 색깔을 어떻게 형언하고 그 형태를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 한국미의 백미가 그렇다.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이 그렇다. 말로서 형언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경지다. 

유리 달항아리.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한국미의 백미에 해당하는 백자 달항아리를 유리를 소재로 한 달항아리로 재현한다. 여기서 재현한다는 것은 그저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백자 달항아리에 함축된 미의식의 원형질을 오롯이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먼저 형태를 보자. 간단하게 말해 백자 달항아리는 각 위쪽과 아래쪽을 따로 만든 연후에 하나로 엎친 것이다. 그래서 달항아리의 특징적인 형태랄 수 있는, 마치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서처럼 기름하게 둥근, 기름하면서 둥근 배 형태가 나온다. 여기서 작가는 블로잉 기법으로 한 번에 그 형태를 만든다. 그러면서 달항아리 특유의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형 곧 정해진 형태가 없는 탓에 오로지 감으로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비정형은 기실 정답이 없어서 오히려 쉬운 일처럼 여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을 말하자면 정답이 없는 탓에 오히려 그만큼 헤매기도 쉬운 법이다. 그렇게 어리숭하게 둥근 형태, 일그러지지도 둥그렇지도 않은 형태에 도달해야 하는 일이다. 정형을 넘어서는 형태, 그리고 여기에 말로서 형언할 수 없는 형태를 얻어야 하는 일이다. 

색깔은 또 어떤가. 어떻게 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폭넓은 흰빛과 순정 어린 흰빛을 재현할 것인가. 재현이 아니라면, 최소한 어떻게 그 분위기를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인가. 사실은 단서는 이미 주어져 있다. 젖 빛깔에도 흰빛에도 하나같이 빛이 들어있다. 빛이 단서다(여기서 빛이란 사실 빛 자체라기보다는 기미와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그리고 유리는 말할 것도 없이 빛에 민감한 소재고, 그 성질에서 해법을 찾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 기미며 분위기와 같은 섬세한 차이를 제하고 보면, 백자는 불투명이고 유리는 투명이다. 그래서 흰색이든 흰빛이든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백자 달항아리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유리의 투명성을 살리면서 투명하지도 불투명하지도 않은 색깔, 일정한 투명성을 포함하고 있는 희뿌연 색깔을 택했다. 그건 마치 창호 문을 통해서 바깥을 가늠하고 발을 통해서 외부의 번잡함을 한차례 걸러서 보고 듣고 했던 전통적인 미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정도면 얼추 산 배꽃이나 젖 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폭넓은 흰빛과 순정 어린 흰빛에도 버금가는 색 감정을 실현하고 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유리 달항아리에는 크게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앞서 본 것과 같은, 불투명한 흰색에서부터 투명한 흰색(무색)에 이르는 색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달항아리가 하나 있고, 금박을 덧입힌 또 다른 분위기의 달항아리가 있다. 전자가 어스름한 대기 속에 은근하게 빛나는 달빛을 닮았다면, 그렇게 서정을 파고드는 달빛을 닮았다면, 후자는 상대적으로 더 장식적이다. 우연을 가장한 듯 깨알 같은 비정형의 금박 조각을 유리 표면에 흩뿌려놓은 것이 마치 빛 조각을 대기에 풀어 놓은 것 같고, 밤하늘에 수 놓인 별 무리를 보는 것 같고, 여기에 둥근 형태를 평면으로 펼치면 흡사 수면에서 아롱거리는 빛의 조각(윤슬)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화려한 것도 같고 장식적인 것도 같지만 속되지는 않은 것이 흰 달항아리의 은근한 달빛과 그 감성을 맞춘 것도 같다. 그렇게 작가의 유리 달항아리는 흡사 위로라도 하듯 보는 이를 은근한 달빛으로 감싼다. 그리고 빛 조각의 세례 속에 판타지를 열어놓는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