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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다인, 창문을 통해 본 기억 속 풍경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

고충환



임다인, 창문을 통해 본 기억 속 풍경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



그늘에서 햇빛을 희롱하다. 햇볕 좋은 날 등나무와 같은 키 큰 나무 그늘에 앉아있으면 유독 빛과 어둠의 대비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쨍한 햇빛 탓에 그늘이 더 서늘하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나무는 주변으로 그림자를 던지는데, 마치 실루엣으로 화한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구멍이라도 난 듯 빛의 조각들을 흩뿌린다. 그렇게 벽 위에도, 테이블 위에도, 시멘트 바닥 위에도 온통 빛 조각들로 아롱거린다.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지우면서 사물을 빛과 어둠의 조각들로 해체 시키는데, 그 와중에 나도 해체된다. 그 꼴이 꼭 빛이 나를 희롱하는 것 같고, 내가 빛을 희롱하는 것 같다. 여기에 바람이라도 불어올 때면 빛 조각들이 흔들리면서 빛과의 상호작용은 극대화된다. 작가는 그렇게 세상과 자신의 경계를 지우면서 아롱거리는 빛의 유희를 그렸다. 아마도 세상을 반영하는 만화경이 꼭 그렇지 않을까 싶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꼭 그렇지 않을까 싶은 세상을 대면하고 재현하는 감각적인 그림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책을 열면 그림이 입체로 일어서는 책이 있다. 팝업북이고 움직이는 그림책이다. 요샌 여기에 꿈꾸는 것 같은 소리가 가미된 책도 있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어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상실된 유년을 되불러오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게 꼭 팝업북 같은, 움직이는 그림책 같은 입체설치작업을 했다. 종이와 종이박스를 일일이 핸드 커팅해 집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었다. 그 집은 밑이 뚫려 있어서 바닥에 깔린 레일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터널 역할을 한다. 여기에 조명이 가미되면서 집 터널은 벽면에 자기보다 큰 그림자를 만들고, 조명을 장착한 기차가 지나가는 것에 맞춰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림자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안식처를 상징한다고 했다. 돌아갈 수 없는 안식처? 작가는 지금까지 24번에 걸친 이사를 했고, 13년간 유목민처럼 세계를 떠돌았다. 이런 떠돌이 생활이 집을 소재로 한 작업의 배경이며 이유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집은 이전에 살았던 집을 추억하고 유년 시절의 향수를 소환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집은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에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라고 중얼거린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언제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그래서 작가는 종이가방처럼 생긴 휴대용 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떠나고 싶은 곳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없다. 마치 살 수 없는 종이집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그리움의 화신 같기도 하고 존재의 원형 같기도 한 집을, 어쩌면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을 집을 되불러 온다. 

광장에서 그러므로 어쩌면 길 위에서. 삶에 대한 메타포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경우로 치자면 길이 있다. 오죽하면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을 소재 혹은 주제로 한 장르영화 로드무비가 따로 있다. 이처럼 삶은 흔히 길에, 여로와 여정에 비유된다. 길에는 익명적인 사람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 중 누구일 수도 있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흔적으로 남는다. 스크래치로, 발자국으로, 상처로, 메아리 없는 혼잣말로 아로새겨진다. 그러므로 길은 그대로 삶의 화석일 수 있다. 

여기에 작가는 실물 그대로의 보도블록을 그렸다. 사이즈가 그렇고, 알 수 없는 흔적과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삶의 흔적을 말해주는, 색감이며 질감도 원형 그대로다. 그리고 그렇게 그린 보도블록을 바닥에 까는 대신 일으켜 세워 또 다른 벽면처럼 재구성했다. 그렇게 작가의 보도블록 그러므로 길 그리기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머잖아 일어선 길로 전시공간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일어선 길 사이를 거닐어 볼 수 있고, 또 다른 벽면으로 꽉 막힌 통로 사이를 지나칠 수 있다. 남이 걸었던 길을 걸으면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생각으로 잠시 멈춰 설 수도 있을 것이다. 

창문을 통해 기억을 보다.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그의 눈을 보면 그가 무엇을 쳐다보고 있는지, 때로 자기 내면을 쳐다보고 있는지,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웬 관심법이냐고도 하겠지만, 눈은 그의 마음을 반영하고, 여기에 어쩌면 그가 세계를 보는 관점 그러므로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눈으로 열린 창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기보다는 보고 읽고 자기를 투사하는 종합적인 인식행위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본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창을 그린다. 대개는 세로로 긴, 그리고 더러 옆으로 긴 쪽창을 통해서 보이는 풍경을 그린다. 대개는 외벽이나 더러 일부 실내의 정경을 포함하는, 그러므로 창문을 통해서 바라보거나 창문에 비친 풍경으로는 멀리 하늘이 보이고, 하늘을 배경으로 한 숲이 보이고, 막 노을이 지고 있는 듯 건물이며 대기가 점차 붉은 기운으로 스며들고 있는 정경이 보인다. 아마도 밤일 듯 칠흑 같은 어두운 대기가 보이고, 아마도 어스름 아니면 새벽녘일 듯 푸르스름한 대기 속에 최소한의 실루엣으로 화한 창문틀 위에 놓인 화분이 보이고, 아마도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통해 희미한 사물의 그림자가 보인다.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정적이고 감미로운 색감과 질감이 현실 속 풍경 그대로라기보다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선 풍경을 예시해준다. 한눈에도 알만한 풍경이어서 친근하고, 그럼에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비현실적인 풍경이 낯설게 다가오는 양가적인 풍경을, 어쩌면 풍경의 표면과 이면을 예시해준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은 그 색감과 질감이, 그 분위기가 시간을 특정하게 하는데, 이를테면 어스름한 저물녘이나 파르스름한 새벽녘, 혹은 노을과 칠흑 같은 밤중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시간과 장소를 제목으로 붙여놓고 있다. 지금 여기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그때 그곳의 풍경을, 그 풍경의 인상과 분위기를 기억을 소환해 그린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 속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친근하고 낯선 풍경의 두 얼굴이며,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느낌은 바로 이처럼 기억으로 되불러낸 풍경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운 풍경을 그린 것이다. 비록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지만, 동시에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속에 간직된 그리운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시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마치 일기를 쓰듯 특정한 날에 올려다본 하늘을 시리즈 그림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그저 일기를 대신한다기보다는 그날그날의 감정과 기분 그리고 바이오리듬과 같은 사사로운 경험치를 하늘에다 투사해 그린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는 이처럼 창문을 통해 본 기억 속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대신, 변형 캔버스를 이용해 아예 창문 형태의 그림틀 위에 창문을 그리고 풍경을 그려 넣기도 한다. 좀 극적으로 말해 창문 그림 대신 창문 자체를 일종의 유사 오브제로서 제안한 것이다. 그 자체 재현의 틀에 갇힌 회화를 현실 위로 불러냄으로써 회화의 영역과 범주를 확장 시킨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는 평면에서 오브제(엄밀하게는 유사 오브제)로 확장되고, 여기에 재차 공간설치작업으로도 확장된다. 가변 설치를 하는 것인데, 디스플레이를 할 때 창문 그림은 높게, 주방과 같은 실내의 정경을 그린 그림은 낮게 설치해 마치 현실 공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유사 공간 경험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자체 그림 속에 재현된 이미지가 현실로 확장되고, 그렇게 재현과 현실이 어쩌면 재현된 현실과 현실 자체가 경계 너머로 상호작용하는 공감각이 실현되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창문 그림과 함께 실내 정경을 그리기도 하는데, 자신의 생활공간을,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자기반성적 경향성의 회화로도 볼 수 있는 이 일련의 그림에서 일부 사물 초상화로 개념화할 만한 사례들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구석에 저 홀로 서 있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 의자가 그렇고, 빨래 건조대가 그렇다. 마치 증명사진이라도 찍는 듯 사물 자체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무미한 그리고 건조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무미하고 건조한 경우에서마저도 기억을 소환하고 그리움을 호출할 때 부수되는 따스한 감성에, 나른하고 감미로운 기분에 감싸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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