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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위한 국내학술심포지엄

고충환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를 위한 국내학술심포지엄 


주제,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의 주제와 비전 


전통적으로 수묵화는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과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원형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소재에서 찾아질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도 의식보다 깊은 무의식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의 학문적 정초를 예비한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원형적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원형적 기억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문화로 편입된, 그래서 문화적 기호 혹은 관습적 기호(롤랑 바르트가 독사 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언술, 상식과 합리, 선입견과 편견이라고 부른)로 부를 만한 전형과는 구별되는, 전형보다 깊은 심층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다. 

수묵화에 반영된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이 유래한 장소이기도 하고, 수묵화에 대한 현대적 각색과 변용과 확장을 위한 형식실험의 장이 될 이번 수묵비엔날레가 정초해 있는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을 먼저 살핀 연후에, 이를 바탕으로 이번 전시가 그 원형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변용하고, 각색하는지, 그리고 때로는 지양 그러므로 부정을 통해 수용하는지 살필 것이다. 그렇게 전시의 주제며 성격과 함께 참여작가들의 경향을 통해 전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가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과 한국성,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 

로컬리티와 글로벌리즘, 지역성과 국제성 

예술은 지역적 특수성(자기 개성)을 통해 다국적 혹은 무국적의 언어적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이런 지역적 특수성과 관련해 논의되는 개념이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과 같은 개념이다. 문제는 지역적 특수성이 지역적 한계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무국적성을, 무국적의 언어적 보편성을 획득하고 담보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일 터이다. 


최치원의 풍류 

최치원은 신라 당시 이른 나이에 중국에 유학해 이름을 떨치다가 국내에 귀국한 이후에는 지리산 가야산 등지를 주유산하하다가 빈 신발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이후 신발은 신선을 상징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무(무속)를 바탕으로 유(유교), 불(불교), 도(도교) 삼교가 회통하는 우리 문화의 전형을 풍류로 처음 정의 내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인 종교에 외래종교를 흡수 통합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보기에 따라선 무속으로 대변되는 종교, 유교로 대변되는 도덕과 윤리 내지는 정치철학, 불교로 대변되는 철학, 그리고 도교로 대변되는 예술의 결합을 시도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견지에 따라선 주관 정신에 종교를, 객관 정신에 예술을, 절대정신에 철학을 결부시켜 정신의 현상학을 전개한 헤겔의 경우와도 비교해볼 수가 있겠다. 종교가 지배적인 시대적 배경에서 삶의 다양한 루트와 채널을 종교에 버무려낸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종교와 인문 정신의 등치를 시도한 경우로 볼 수 있겠고, 종교를 매개로 한 인문 정신의 승화를 꾀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문제는 이런 통합의 정신을 풍류의 개념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풍류란 바람처럼 흐른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벽이 없고 경계가 없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거침이 없다는 말이고, 바람처럼 정처가 없이 떠돈다는 말이다. 흐르는 것은 바람 말고도 또 있다. 물이 그렇다. 그래서 흔히 바람과 물은 자유 정신과 예술혼의 귀감을 상징한다. 그 상징적 의미 혹은 실천 논리로 치자면 세속적인 지식이 갈라놓은 구별과 분별 너머로 흐르고, 그 경계와 벽 위로 범람하는 가벼운 정신이며 떠도는 정신, 부유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그 정신은 하릴없이 거니는 것을 의미하는 소요와 무목적적인 그래서 그 자체가 이미 목적인 여기를 하부개념으로서 아우른다. 특히 여기와 관련해선 전통적인 사대부 문인화가 바로 이 여기에 그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고, 서양의 논리로 치자면 아마추어 정신이며 딜레당트 개념이 여기에 해당한다. 

무슨 말인가. 즉 풍류는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가. 풍류의 정신은 한마디로 삶의 다양한 채널과 루트로부터 유래한 이질적인 지점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융합하고 통섭해 들이는 깔때기의 논리에 비유하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정처가 없이 흐른다는 점에서 보면 유목주의와도 통한다. 최치원의 풍류는 1000년 전에 이미 이런 통합과 융합 그리고 통섭의 논리를, 그리고 유목주의의 실천 논리를 선취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겸재 정선, 현대판 진경 

겸재 정선은 흔히 한국의 근대화와 관련한 시점 논의와 맞물려서 곧잘 거론되곤 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 내지는 근거로서는 주체성과 자생성을 든다. 그리고 영 정조 시대에 이를 실현한 것으로 보는데,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와 함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그 예로 꼽는다. 산수는 크게 실경산수(실제 하는 풍경을 소재로 한)와 관념산수(이념의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해낸)로 구분되며, 겸재의 진경산수는 이를 종합해낸 경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자 하는 산수 속에 빠져 그 기운을 온몸으로 체득한 연후에 기억을 더듬어 그려낸 겸재의 작화 방식이 이런 식의 이해(실경의 재구성)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경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소재와 정서와 기법 면에서 공히 고유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겸재는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겸재식의 진경이 지금도 가능할까. 시대가 변하면 환경이 변하고, 의식이 변하고, 표현도 덩달아 바뀐다. 현대판 진경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지금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산수와 자연으로 부를 만한 전망이나 장소 같은 것은 없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연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물활론과 범신론과 같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자연 같은 것은 이제 없다. 최소한 의미를 상실했다. 한적하다 싶으면 송전탑이 가로 막고 서 있고, 숲속의 자투리땅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공원들이 조성돼 있다. 이제 군 초소는 전원풍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산 정상에는 헬리콥터를 유도하기 위한 H자가 흰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그런가 하면 험한 곳일수록 산세도 빼어나 그만큼 등산객도 더 많이 찾는다. 이처럼 사람이 찾는 산이 아닌, 적막강산을 생각하기도 어렵고 현실성도 없다. 등산객은 말하자면 현대판 산수풍경에 빠질 수 없는 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이런 풍경(인공풍경?) 대신 오히려 관광엽서와 휴양지 광고 브로셔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등장하는 빙하와 화산, 물개와 펭귄이 더 친숙하고 더 살갑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비의를 품지도 주술을 부리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흘러간 옛 노래로 되돌아와 향수를 달래주거나 하릴없는 풍문으로 떠돌 뿐. 이런 상실의 시대에 자연과 풍경, 풍수와 오행, 전원과 산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욱이 산수를 그리고 수묵을 그리는 행위는 무슨 최소한의 의미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한국화 논쟁, 한국화의 정의 

그동안 한국화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그 논란은 대개 한국화의 개념 규정과 범주에 대한 것이었고, 주로 형식적인, 방법적이고 기법적인, 그리고 재료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상 장르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화에 대한 개념 규정과 범주의 문제는 과연 한국화라는 장르적 특수성의 벽을 넘을 수는 없는 것인가. 장르적 특수성은 더 이상 양보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화라는 장르 규정은 서구의 논법을 따른 것이다.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회화의 본질에서 회화의 당위성을 찾고,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조각의 본질에서 조각의 존재 이유를 찾은,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화의 본질은 뭔가. 한국화를 한국화이게 해주는 형식논리는 뭔가. 흔히 알려진 바대로라면 지필묵이 그것이다(엄밀하게는 이마저도 중국의 국화와 일본화와 겹친다. 그럼에도 여하튼).  

이 논법은 차이를 통해서 장르적 특수성을 규정한 것이다. 차이를 통해서? 여기서 차이를 전복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예술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고 유효하다면, 그건 다름 아닌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차이를 장르적 특수성을 보장해주고 강화하는 계기로서보다는 장르적 특수성을 허무는 계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동시대 한국화는 한국화로 분류되는 장르 구분이나 장르 특정성에 괘념치 않는다. 평면에 한정되지도 않거니와, 지필묵에 발목 잡히지도 않는다. 특정 소재에 한정되지도 않고, 어떤 기법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종이에 그린 먹그림은 물론이거니와 오브제와 콜라주, 조각과 설치, 디지털과 인터넷을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예술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고 했다. 논법은 허물라고 있는 것이고, 장르적 특수성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탈장르가 현대미술의 공공연한 사실 내지 현실임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논리의 비약은 아닐 것이다(오히려 새삼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렇게 한국화의 정의는 결정적인 의미보다는 관계의 기술과 현재진행형의 작동원리에서 찾아져야 한다. 


아시아성 담론, 오리엔탈리즘과 탈오리엔탈리즘 

아시아성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선 항상성과 비항상성을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시아의 문화적 특수성으로 부를 만한 항상적인 지점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한편으론 그 문화적 특수성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가변적이라는 사실 곧 비항상적인 지점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지점 곧 특수성이 뭔가를 알아야 하고, 그 차이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정학적 장소가 어디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특수성으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성 담론의 문제의식 혹은 자의식은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그 배경엔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동양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정의 내리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자기반성적인 과정이 깔려 있다. 서양의 시각에서 볼 때 동양은 호기심의 대상이면서 욕망의 대상이다. 일본의 경우에 자포니즘, 인도의 경우에 구루(정신적인 스승)들의 나라, 그리고 한국의 경우엔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정의하는 것이 바로 호기심의 대상성을 투사한 것이고, 동양의 실체를 신비주의로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신비주의가 차이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매력적인 상품과 시장에 연동되는 것이란 점에서 욕망의 대상성이 투자된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런 호기심의 대상이며 욕망의 대상성이 식민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용하고 기능했음은, 그리고 그 논리는 이후 신제국주의와 후기식민주의 그리고 세계화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재단한다면, 이와는 반대로 동양의 관점에서 서양을 판단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나와진 것이 옥시덴탈리즘이지만 현재로선 설득력은 차치하고라도 오리엔탈리즘만큼 파급력을 갖는 경우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셀 푸코는 지식이 곧 권력이라고 했다. 담론도 권력이고 지식도 권력인 것. 말하자면 헤게모니의 문제인 것이며, 아시아성 담론의 형성 가능성 문제가 정치적인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의 문제에 연동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아시아성 담론 형성을 위해선 문화를 문화 자체로서보다는 문화의 얼굴을 한 정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 투쟁이나 인정투쟁과 같은 개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화란 말하자면 정치의 침전물이며 상징인 것이고, 그렇게 저마다의 상징으로 인정받으려는 투쟁의 과정인 것. 

여기서 정치며 투쟁과 같은 단어에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보기에 따라선 모든 것이 정치고 만사가 투쟁이다. 특히 개인적인 층위에서 투쟁은 자기 갱신을 의미하며, 예술가에게 자기 갱신(다르게는 자기부정)만한 덕목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시아적 특수성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 구성요소랄 수 있는 예술가의 혼이 먼저 변한 연후에라야 비로소 그렇게 흐르는 현상이며 변하는 지점을 따라잡을 수가 있을 터이다.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  

그렇다면 한국성, 한국미,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은 어떻게 찾아질 것인가. 감각적인 표면의 층위에서, 현상적이고 사건적이고 소재적인 차원에서 찾아질 수는 없는 일이다. 표면의 일이란 언제나 변화무상한 것이고, 그 이면에는 표면을 밀어 올린 원인에 해당하는 무엇, 항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편안한 옷처럼 자연스럽고 몸에 밴 습관처럼 관성적인 어떤 층위가 있기 마련인 것이며, 한국적인 것은 바로 그 층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충분히 스며들어 체화된, 그래서 미처 의식할 새도 필요도 없이 저절로 배어 나오는 어떤 차원, 그러므로 저절로 주어진 어떤 층위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오채찬란 모노크롬_생동하는 수묵의 새로운 출발>을 주제로 2021년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두 달간 목포 문화예술회관 일원과 진도 운림산방 일대에서 열려. 관련해서 같은 시기에 광양, 여수, 나주, 광주에서 특별전이, 여수, 구례, 보성, 강진 등 9개 시 군에서 수묵 기념전이 동시에 선보일 예정이다. 


수묵, 세상 모든 존재가 파생되는 계기 

먹색은 오색이라고 했다. 문자 그대로는 오색이지만, 사실상 오만가지 색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올 9월에 먹색 곧 수묵을 테마로 한 전시가 열린다.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다. 전통적으로 수묵이 강한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한, 특화된 비엔날레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는 전시 주제가 <오채찬란 모노크롬>이다. 바로, 하나의 먹색에 오만가지 색을 담았다. 그저 똑같은 먹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의 모든 색을 담고 있다.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색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형식이 그렇고, 양식이 그렇고, 소재가 그렇고, 주제가 그렇다. 

그러므로 먹색은 오색, 이라는 말은 먹색 하나로 오만가지 색을, 형식을, 양식을, 소재를, 주제를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고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색채에 구속될 일도, 평면에 한정될 일도, 형식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의식일 것이다. 무엇을, 왜, 어떻게 표현하느냐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 수묵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일 것이다. 수묵에 대한, 그리고 먹색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후기모더니즘 이후 탈의 논리와도 통한다. 탈장르와 탈형식에 견인되는 현대미술의 생리에도 부합한다. 

그렇게 전시는 수묵을 매개로 때로 이것도 수묵인가 싶은 의구심을 반영하고, 더러 저것도 수묵일 수 있겠다 싶은 확장 가능성을 아우른다. 수묵의 장르적 특수성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수묵의 외연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계기를 실현하기 위해 각 현대 수묵이, 수묵 정신이, 수묵의 맥이, 생활 속의 수묵이, 그리고 도시재생이 소환된다. 이번 전시를 위한 키워드들이다. 사실상 각 섹션 별 전시 주제에도 해당하는 키워드들은 그대로 이번 전시의 성격이며 지향점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현대 수묵을 보면, 장르 간, 형식 간, 매체 간 경계를 넘어 현대미술과 수묵이 만나는 접점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리고 수묵 정신에서는 수묵의 형식적 특징이나 장르적 특수성보다는 정신적 유산이나 생리적 DNA의 차원에서, 보다 일반적으론 한국적 미의식의 층위에서 수묵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현대 수묵과 수묵 정신 섹션에서는 특히 서양화 같은 동양화, 동양화 같은 서양화를 매개로 수묵에 대한 개념이 재설정되는 장이 될 것이다. 또한 수묵의 맥과 관련해서는 수묵의 전통성과 적통성을 되짚는 계기를 통해 수묵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장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수묵 바깥에서 수묵을 보는 것, 그렇게 확장되고 재설정된 관점의 차이가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란 점에서 그 의미만 놓고 보자면 특히 생활 속의 수묵과 도시재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생활 속의 수묵에서는 패션과 공예 등 이미 생활 속에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는 수묵의 새로운 쓰임새에 주목한다. 그리고 근대문화역사가 살아 숨 쉬는 목포의 원도심을 전시장으로 활용한 도시재생 섹션에서는 마치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한 것 같은 거리와 건축물과 생활사를 매개로 역사적 현실을 당대적 현실로 추체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생활 속의 수묵과 도시재생 섹션에서는 수묵이 원래 발생했을 삶의 현장에서 수묵을 재정의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수묵 이전에 예술이 있었고, 예술 이전에 삶이 있었다. 삶에 연루하지 않은 예술, 생활 현장에 연동되지 않은 수묵, 그러므로 수묵에 갇힌 수묵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수묵을 상상하는 전시, 수묵을 삶에 되돌려주는 전시, 수묵과 더불어 노는 전시, 그러므로 마치 축제와도 같은 전시가 됐으면 좋겠다. 

전통적으로 수묵은 칠흑 같은 먹색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투명한 안료가 종이에 스며들면서 번지는 그림이다. 그렇게 번지면서 얼룩을 만드는 그림이다. 그 얼룩이 때로 사람처럼도 보이고, 더러 풍경처럼도 보이는, 때로 막막한 우주에 던져진 미아처럼도 보이고, 더러 밤하늘을 수놓는 폭죽처럼도 보이는 그림이다. 그렇게 하나의 얼룩에서 세상 모든 존재가 파생되는 그림이다. 결정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먼, 비결정적인 의미, 가변적인 의미, 열린 의미와 생리적으로 친한 그림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누가 얼룩을 결정적인 의미로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나의 얼룩으로부터 세상 모든 존재가 파생되는, 그런 형식실험의 장이 됐으면 좋겠다. 




목포문화예술회관 전시_현대 수묵 

전시 주제/ 무묵수묵_수묵 없는 수묵, 수묵은 도처에 있다 


전시 개념 

흔히, 그림 같은 풍경이란 말이 있다. 그림처럼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방점은 그림이 아닌 풍경에 찍힌다. 비록 풍경 속에 그림은 없지만, 그림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경 속에 그림은 없는 채로 이미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묵 같은 풍경이란 말이 있다. 사진 속 풍경과 같은 하나의 이미지가 수묵의 분위기를 띨 때 하는 말이다. 여기서 방점 역시 수묵이 아닌 풍경에 찍힌다. 비록 풍경 속에 수묵은 없지만, 수묵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경 속에 수묵은 없는 채로 이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번 전시에선 수묵 없는 수묵, 수묵 같은 풍경, 수묵이 아니면서 혹은 수묵이 없는 채로 수묵을 암시하는 풍경이 주제다. 수묵을 재료와 기법, 방법론과 장르적 특수성이 아닌, 수묵의 분위기, 수묵의 이미지, 수묵의 감각에 초점을 맞춘 전시다. 이 주제 전시가 기왕의 수묵에 대한 개념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시 참여작가 사례분석(목포문화예술회관 전시 참여작가를 중심으로) 

이응노, 군상 시리즈. 주지하다시피 고암 이응노는 1958년 도불해 파리에 정착한 후, 1989년 호암미술관 초대 전시에 참석하지 못한 채 파리 현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그동안 1967년 동베를린(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 옥고를 치른 것 외에 사실상 국내에 정착한 적이 없다. 작가는 투옥된 와중에도 종이, 천, 돌멩이, 비닐, 은박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한 재료로 작품을 제작했고, 당시 제작된 작품을 따로 옥중미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후 백건우 윤정희 납치사건에 휘말리는 등 작가는 윤이상과 함께 왜곡된 정치적 현실의 희생양으로서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 만큼,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망향의 한이 남달랐던 것 같고, 도불 이후 형식파괴의 와중에도 도불하기 전 한국화에 대한 뿌리 근성이 작업의 밑바닥에 면면히 흘렀던 것 같고, 그 뿌리 근성을 자양분 삼아 동서양을 아우르고 뛰어넘는 독자적인 형식으로 우뚝 설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주로 1980년대 제작된 군상 시리즈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한국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응답으로 내놓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 특정 국가를 초월해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표상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지배적인 양식에 해당하는 문자 추상의 와중에도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잠시라도 작가의 작업을 떠난 적이 없었음을 말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황창배, 형식파괴와 자유구상. 형식파괴와 자유구상으로 특징되는 작가의 그림은 많은 부분 전통적인 민화에 나타난 한국적인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종의 자유연상 기법에 근거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한국의 집단적인 무의식의 원형을 추출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와 관련한 형식실험의 첨단이었다. 그리고 그 첨단은 지금 봐도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먹그림과 아크릴이 어우러지는가 하면, 그림 속으로 문자가 거침없이 들어오고, 그렇게 문자는 조형의 한 요소가 된다. 설화와 현실이 하나의 화면 속에서 몸을 섞는가 하면, 사사로운 이야기가 서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도맡는다. 경계에 대한 의심과 실천 논리가 한국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무색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현재 한국화단에서의 성과 중 상당 부분이 그의 회화에 빚지고 있다. 

이종상. 수묵의 본성을 추구한 수묵화 운동, 고구려 고분벽화 기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벽화 운동, 한국식 산수의 원형을 추적한 원형상 시리즈, 그리고 동판 위에 금박을 붙이고 유약을 발라 고열로 접착시킨 동유화 등 한국화의 형식실험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시도며 제안들이 작가에게서 유래했다. 그의 화력은 가히 한국화를 매개로 한국화를 넘어서는 형식실험으로 점철된 것으로 봐도 되겠다. 그 형식실험의 연장선에는 수묵 추상을 특징짓는, 사물 대상의 골격에 대한 사의적 표현을 보여주는 진경 시리즈도 있다. 예컨대 작가가 그린 독도 진경을 보면 독도의 감각적 표면 현상(살)을 발라내고 그 이면의 본질(골격)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결코 건조하거나 앙상하지는 않은데, 이는 수묵의 발묵 효과가 고유의 아우라를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경을 단순한 실경을 넘어서는 어떤 경지며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가 하면 작가 스스로 장판화로 명명한, 꽤 오랫동안 숙성시켜온 일련의 그림들도 있다. 알다시피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종이 장판을 방바닥 재료로 사용해왔다. 아마도 방바닥으로 종이를 깔고 산 경우로 치자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인 고유의 생활감정이며 철학이 긷든 예로 봐도 되겠다. 아마도 작가가 종이 장판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 종이 장판은 사이즈가 한정돼 있어서 마치 조각보에서처럼 면과 면을 이어 붙여야 한다. 이런 연유로 종이 장판 작업에는 면과 면이 어우러진 면 구성이 있고 화면 운영이 있다. 여기에 치자 물을 들여 은근한 색채 감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처음엔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이후 아예 원형 그대로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로써 작가의 형식실험은 생활 오브제를 직접 도입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술의 계기를 발견하는 경우로 심화된다. 

김병종, 바보 예수와 생명의 노래. 작가의 자유구상 경향성 회화를 대표하는 <바보 예수> 연작에서는 시대를 풍자하는 메타포의 한 형식이 읽힌다. 이와 함께 한지 릴리프로 떠낸 저부조 입체의 표면에다 채색한 민화와 설화를 소재로 한 <생명의 노래> 연작에서는 원형적인 생명력의 분방한 표출과 함께, 도가 사상에 그 바탕을 둔 상생의 철학에 대한 공감이 읽힌다. 이로써 작가는 생명의 본질과 환희를 노래한다. 

이길우, 의미를 파생시키는 구멍들. 작가의 모든 그림에는 구멍이 있다. 지금은 전기인두를 사용해 화면에 구멍을 뚫지만, 원래 이 구멍들은 일일이 향불로 뚫은 것이다. 전기인두로 뚫은 구멍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느낌을 준다면, 향불로 뚫은 구멍은 이보다는 더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이고 우연성에 더 많이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향불을 종이에 대고 누르는 힘의 강도와 미세한 시간상의 차이에 의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은 것이 하나 없는 구멍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구멍들에는 어김없이 불에 탄 자국이 가장자리 선으로 남겨진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형태도 틀리고 크기도 다 틀린 구멍들이 흡사 좀 벌레가 갉아먹은 종이나 무명천을 보는 것 같고, 시간에 풍화된 흔적을 보는 것 같은 고답적이고 낡은 느낌을 준다. 비록 도구가 향불에서 전기인두로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는 그 의미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한국화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카테고리로 치자면 지필묵을 들 수 있다. 한국화와 관련한 모든 문제의식과 형식실험은 그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에서 그 범주 즉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특정성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한국화와 관련한 재료적 한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나 방식, 형식이나 표정마저도 다른, 판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서도 한국화 고유의 아우라를 잃지 않는데, 한 땀 한 땀 수놓듯 종이 위에 새겨 넣은 자국에 반영된 작가의 호흡이, 일종의 수행적인 과정이 그렇다. 말하자면 화면 가득히 빼곡한 구멍을 심는 과정에 긴장과 이완이 교차 되고, 이는 그대로 들숨과 날숨의 표상처럼 보인다. 그림에 일종의 숨구멍을 내는 행위를 통해 종이의 생리와 작가의 생리가 상호작용하는 것. 그렇게 향불 자국에 중첩된 이미지가 마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것 같고, 시간의 켜를 헤집어 과거의 한 시점을 현재로 호출한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고, 부재 하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아득하고 서정적인 정감을 자아낸다. 현재와 과거 사이, 은폐와 비은폐 사이, 존재와 부재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한 그림들이 그대로 기억의 속성을 상기시킨다. 기억은 언제나 부재 하는 것들을 떠올리는 법이고, 이로부터 그리움과 향수가 딸려온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흐릿할 때 더 기억답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처럼 기억이 그리움과 향수의 정서로 전환되는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이진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도 알려진 것이지만, 의식의 흐름은 물과 같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다. 상식과 편견과 선입견이 그어놓은 금을 아무렇지 않게 넘나든다. 그렇게 나는 다른 빨래들과 함께 빨랫줄에 널리고, 열린 것 같기도 닫힌 것 같기도 한 투명 상자 속에 담겨 양육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무의식이 그리고 어쩌면 존재론적 상처가 어떻게 자기식의 집을 짓는지, 어떻게 자기만의 서사를 만드는지 보여준다. 

김택상, 숨 빛. 작가는 숨 빛을 그린다. 숨 빛? 호흡과 숨결 같은 생기를 머금은 빛이다. 호흡과 숨결은 들고 날 수 있는 통로(숨길)가 있어야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 통로는 투과하는 성질과 함께 투명한 화면 위로 열린다. 작가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만큼 섬세한 얼룩과 함께 물빛을 머금은 색감 위로 생기를 머금은 빛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어준다. 여기서 얼룩이 반(半)가시적인 것은 시간이 비가시적인 것과 같다. 말하자면 중첩된 얼룩은 켜켜이 내려앉은 시간의 표상인 것. 그렇게 작가는 오로지 물빛만으로, 색감만으로 투명하고 섬세한 빛의 질감을 그려내고 있었다. (심상초등학교 전시작가) 

장연순, 시간의 집을 짓다. 작가는 섬유를 소재로 추상적인 구조와 형태를 구현한다. 마의 일종인 아바카 섬유를 소재로 만든 사각형을 모듈 삼아 이를 무수하게 중첩 시킨 겹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서는 빛과 공간 그리고 공기의 흐름이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 된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기하학적 형태를 기본형으로 이를 반복적으로 쌓거나 덧붙여나가는 방법으로 구조적인 다변화를 꾀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풀 먹임과 바느질이라는 지난한 수작업을 통해서 수행된다. 수행은 작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작가는 단순히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존재를 투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의 몸을 최대한 단순화한 육면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상자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는 작가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쪽빛으로 염색한 섬유에 풀 먹임과 재봉만으로 조형적이고 건축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겹 구조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쪽빛 염색의 은근하고 맑고 깊은 색감이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과 밖이 서로 닫혀있으면서 열린, 막혀있으면서 통하는 역설적인 구조를 실현한다. 구별하면서 통하는 구조, 이는 어쩌면 섬유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며 본질적인 국면이랄 수 있는데, 작가는 그 성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극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중첩된 망 구조의 조형물을 <늘어난 시간>이라고 부른다.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도 주관적인 시간개념도 알고 보면 모두 주체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신축성 있는 섬유 구조물이 주관적인 시간을 추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무궁한 시간의 망 속에서 존재와 존재가 끊임없이 연기(緣起)하여 만나는 존재론적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재삼, 달빛과 검은 여백. 작가는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여기서 목탄은 먹이 확장된 경우로 볼 수 있다. 목탄은 부드러운 질감과 조직이 크고 성근 그림에는 제격이지만, 그림 위에 덧그리기 어렵고 상대적으로 세밀한 묘사에도 까다로운,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종적으로 그림을 정착시키기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그래서 목탄은 흔히 스케치나 드로잉 같은, 본격적인 그림을 위한 밑그림으로 많이 그린다. 작가는 지난한 형식실험 끝에 목탄이 갖는 이런 난점을 해결했고, 세밀한 묘사와 단단한 표면, 그리고 여기에 목탄 특유의 부드러운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목탄화를 그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이든 그릴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소나무와 숲과 폭포와 같은 자연을 특유의 정서를 담아 그린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달빛으로 명명한다. 정작 그림 속에 달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달빛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달빛은 달빛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 대상의 은근한 표면 질감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달빛은 달빛으로 형용 되는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의미할 것이다. 말하자면 밤에 숲은 달빛의 기운을 받아 마치 어둠 속에서 부각 되듯 부드럽게 자기를 드러낸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어둠이 드리워져 있어서 부분과 부분이 강조되기보다는 부분과 부분이 유기적인 덩어리로 다가온다. 그렇듯 어둠은 부분과 부분을 구별하기보다는 하나로 연속시키고 연장시킨다. 그렇게 연속되고 연장되는 사물과 사물 사이 곧 어둠 자체로부터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들이며 그림으로 환원되지 않은 것들이 수런거리면서 나무를 흔들고 숲을 일렁이게 한다. 달빛은 말하자면 어둠 자체와 사물 자체 사이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숲의 기운이며 정령이며 비의를 열어 보인다. 

신선주, 부드럽고 아득한, 깊고 어두운 심연과도 같은 음영. 풍부한 중간계조와 흑과 백이 대비되는, 그러면서도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흑백사진을 닮았고 메조틴트 판화를 닮았다. 특히 중간계조 혹은 검정 색조의 방식으로 알려진 메조틴트 판화는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특히 초상화 제작을 위해 널리 쓰였던 판화 제작방식이다. 작가의 그림 역시 재료가 다르고 찍어내는 대신 그린 것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메조틴트 판화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은 크게 흰 여백 부분과 회색 톤의 중간계조를 보여주고 있는 영역 그리고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화면이 구분된다. 빛과 어둠을 대비시켜 극적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실재로부터 취해온 소재임에도 기하학적 패턴이나 구도를 보는 것 같은 추상적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바로 중간계조로 나타난 영역으로서, 오일 파스텔(크레용)을 칠한 후 동판화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인 니들로 칠해진 부분을 미세하게 긁어나가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사물 형상이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그림은 그 속에 사실적인 묘사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빛과 어둠이, 여백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검은색 또한 인상적인데, 실제로 그림자는 그림자 속에 일정 정도 중간계조의 빛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를 무시하고 칠흑 같은 균일한 단면으로 그림자를 처리했다. 이 단색조의 검은색 화면으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뚜렷해 보이고, 기하학적 구도가 두드러져 보이고, 실제보다 더 단순해 보인다. 현실로부터 소재를 취한 것임에도 그리고 적어도 외관상 현실 그대로 재현한 것임에도 추상적으로 보인다. 검은색 오일 파스텔을 수도 없이 덧칠하고, 여기에 일일이 손가락으로 눌러 펴는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의 올을 완전히 채워 편평하게 만든다. 이로써 수묵화의 먹빛보다도 더 검은, 아마도 카본보다도 더 깊은 색조의 검은색이 만들어진다. 더욱이 그 검은색은 조금의 빛도 반사하지 않는 탓에 실제보다 더 깊고 더 검어 보인다. 마치 외부의 빛이란 빛은 모조리 자기 내부로 흡수해 들이는 블랙홀 같다고나 할까. 외부 환경을 자기 내부로 낱낱이 빨아들여 점점 더 새까매지는 마치 칠흑과도 같은 어둠, 연옥과도 같은 어둠, 원형적인 어둠, 어둠 자체인 어둠에 직면케 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검은색은 부드러운 벨벳의 질감이며 촉감을 떠올리게 하고, 그 깊이가 심연에 닿는다. 

한상진, 풍경의 상처.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내가 참여하기 위해선, 그렇게 자연을 향유 하기 위해선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무엇, 나를 향해 자연을 열어놓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중개 혹은 중재를 말하는 것인데, 감정적인 도구며 개념적인 도구가 그것이다. 그게 뭔가. 작가의 경우에는 무경계, 스침,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 그것이다. 작가가 자연을 볼 때, 자연을 보면서 자연을 풍경으로 변질시킬 때, 그렇게 자연이 열어놓는 풍경에 동참할 때 작가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 자체 작가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주제이기도 하고, 평소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소요, 그리고 흐르는 풍경이라고 부른다. 소요란 무엇인가. 목적도 없이 의식도 없이 자기를 투기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에 무엇을 투기하는가. 텅 빈 자기, 열린 자기를 풍경 속에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열린 풍경과 열린 자기가 소통하면서 스스로 풍경의 몸이 되고, 풍경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객체 사이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원래는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이미 풍경이다. 우주적 살이고 몸이다. 그러므로 풍경을 그리는 것은 곧 내가 연장된 몸을 그리는 것이고, 나를 그리는 것이다. 작가는 산 그러므로 풍경을 상처와 파편이라고 본다. 혹은 풍경에서 상처와 파편을 본다. 상처와 파편이 뭔가. 작가는 지시성이 강할수록 언어는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했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화했을 때 오히려 그 의미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아마도 상처와 파편은 이처럼 의미화의 과정에서 왜곡되고 훼손된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흐르는 풍경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의미화의 과정으로 왜곡되고 훼손되지 않은 풍경, 그러므로 의미화 이전의 풍경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풍경은 흐른다. 흐르는 것을,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것을 어떻게 의미로 결정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의미화에 실패한 작가의 그림이 청회색 조의 희뿌연 기운이 감도는 모노톤으로 그려진다.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의 어스름할 즈음에, 그리고 새벽녘에 본 풍경이라고 했다. 작가는 풍경 그러므로 몸의 피부를 그린다고 했는데, 대기와 접촉되는 몸의 최전선을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 구조(붓질의 결)를 보면 헐렁한데, 말 뒷다리 털로 만든 붓이며 양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비결정적인 것들,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의미의 부스러기로 겨우 얼버무릴 수 있는 것들,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의미가 새 나가는 것들을 포섭하기에 적절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산에 기대어, 상처와 파편으로 나타난, 사실은 자신의 징후와 증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풍경에 의지해,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들, 흐르는 것들, 이행하는 것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제여란, 회화 자연, 어디든 어디도 아닌. 작가는 재현적인 회화 혹은 회화의 관성이 싫어서 스퀴지로 그린다고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려진 이미지가 뭔가를 닮았다(재현했다) 싶으면 고쳐 그리거나 아예 그림을 망치고 만다. 애써 재현을 피해 가는 그림, 재현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은 그림이 가능하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적어도 알려진 대로라면 비 혹은 탈재현적인 회화는 추상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작 완전한 추상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추상은 뭔가. 작가의 그림은 추상이 아니란 말인가. 추상이 아니라면 뭔가. 재현도 아니면서 추상도 아닌,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그림이 위치할 수 있는 지정학적 장소는 어디인가. 완전한 추상은 없지만, 추상은 있다. 다만 추상처럼 보이는 추상이다. 이처럼 추상에 대한 작가의 의미 부여가 유보적인 탓에 재현에 대한 의미도 유보적이다. 이런 유보적인 태도에 작가의 회화의 특정성이 있고, 그리기에 관한 그림의 특정성이 있다. 여기서 유보적인 태도는 모더니즘 패러다임과의 타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기에 관한 탐색 과정을 통해서 찾아낸 회화의 장소, 회화의 지정학적 위치(그러므로 어쩌면 회화의 본성?)로 봐야 한다. 작가의 회화가 위치하는 지정학적 장소는 이처럼 겉보기와는 다르게 회화의 순리를 따른 혹은 회화의 순리를 재해석하고 자기화한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이 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마냥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인다기보다는, 사실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을 매개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어 보이는 경지며 차원에 도달한, 그래서 그림 이면에 잠자고 있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발하는 내적 생명력과 에너지가 여실한(바이탈리즘?), 그런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바로크 회화의 자기 확장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러므로 후기 바로크 회화의 추상화 버전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의외로(?) 가장 재현적인 자연에 대해서 언급한다. 위험, 춤, 연대감, 친화력, 온정 그리고 끝내는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끊임없이 무언가가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인 그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서 회화가 자연일까, 하고 묻는다. 자연과 주체와의 관계가 그림 속에 자연을 생성시키고 작동시킨다. 그렇게 그림은 삽과 쟁기로 파헤쳐놓은 객토 된 농토를 보는 것도 같고,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고, 태초의 카오스를 보는 것도 같고, 막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극적인 현장에 동참하는 것도 같고, 아니면 아직 외부에 전혀 알려진 적이 없는 신비한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도 같다. 사실은 이 중 그 무엇도 아니면서, 그 자체 멋진 장관(자연)인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것을 작가는 회화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림 속에만 있는 장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장관, 그림으로 인해 비로소 열리는 장관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어쩜 품성으로서의 자연(끝내 둥글어지는 분명한 실체로서의 자연), 회화 자연의 장관을 열어놓는다. 

김혜련, 존재의 원형을 찾아서. 작가는 어쩌면 잃어버린 상징을 소환하고, 잊힌 원형을 호출한다. <예술과 암호_빗살무늬>(2018), <예술과 암호_황남대총>(2018), <예술과 암호_고구려의 기와 문양>(2019), <예술과 암호_고조선>(2020), 그리고 근작에서의 <예술과 암호_고인돌의 그림들>(2021)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한국의 고대 유물을, 선사시대와 고대 역사를 두루 섭렵하고 아우른다. 작가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무려 30,000여 기나 되는,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고인돌 유적이 전해진다고 한다. 가히 거석문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전국에 흩어져 있거나 숨어 있는 상징(작가의 용어로는 암호)을 찾아서 방방곡곡을 헤맨다. 남원 대곡리 암각화, 고령 장기리 암각화, 영천 보성리 고인돌 암각화, 그리고 영일 칠포리 암각화와 같은. 여기서 고인돌은 말할 것도 없이 고대 무덤이고, 암각화 역시 꼭 죽음이 아니라 해도 죽음(주검)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제의와 관련이 깊다. 단순한 미의식만으로 새겨진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의, 상징의, 암호의 한 형식이다. 작가는 그렇게 암호를 매만지면서, 해석하고 각색하면서 고대인과 만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이 유래한 존재의 원형 혹은 원형적 존재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고대인이 발신해온 암호를 어떻게 해석하고 각색하는가. 고인돌도 그렇거니와 암각화에서 암호는 돌 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무채색이다. 그래서 작가는 골판지에 먹으로 그렸다. 그렇다면 돌의 질감이며 아로새겨진 새김질은 또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그래서 골판지에 칼로 긋고, 부분적으로 종이를 뜯어내고, 마치 칼질을 하듯 붓질로 새김질을 대신했다. 그렇게 화면은 암각화의 최소한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내지르는 붓질과 튀기거나 마구 흘러내리면서 맺힌 먹물 자국으로 낭자한 것이 흡사 기운생동의 육화된 형식을 보는 것 같다. 작가는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돌에 새겨진 암호를 의미보다는 감각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육화된 형식 그러므로 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고대인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메시지에 실려 온 고대인의 혼이다. 암각화에는 의미보다 먼저 고대인의 혼이, 흔적이, 번민이, 숭고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바로 그렇게 의미보다 먼저 아로새겨진, 그러므로 의미 이전부터 있었던, 한갓 의미로 환원되지는 않는,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의미를 표면으로 밀어 올렸을 혼을 무슨 귀신이라도 부르듯(그러므로 초혼) 되불러오는 것이다. 보통 상징과 암호를 취할 때는 자칫 기호와 패턴으로 빠지거나 도상학적으로 흐르기 쉬운데, 작가는 그 염려를 뒤로한 채 암각화에 암호로 아로새겨진 고대인의 혼을 되불러오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가 유래했을 원형적 인간, 까마득하게 잊힌 자신과 대면하는 일에, 잠재적인 자기를 불러내는 일에, 자신의 육화된 분신과 대면하는 일에 성공하고 있다. 

배종헌. 작가의 그림은 얼룩 회화 혹은 흔적 회화라고 부를 만한, 자기만의 가능한 회화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미장이가 회칠한 회벽 혹은 시멘트를 칠한 벽면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 그 벽면은 미니멀리즘 타블로 작업을 연상시키고, 모노톤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은 예술이 가능해지는 조건을 상황 논리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그 벽면은 일상이라는 맥락 속에서 벽면인 것이지, 제도권 미술 속에 들어오는 순간 작품이 된다는 논리다. 여기에 미장이는 벽면을 바를 때 자신의 땀도 바르고, 한숨도 바르고, 걱정도 바르고, 눈물도 바른다. 논리적 비약이나 상상력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물론 그걸 벽면에서 캐내고 읽어내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는 벽면으로부터 벽면 회화를, 검댕으로 새까만 터널에서 터널 회화를 캐냈다. 얼룩과 검댕 속에 숨어 있을 누군가의 땀을, 한숨을, 걱정을, 눈물을 풍경으로 되불러냈다. 

이수경, 번역된 도자기. 작가는 접착제를 이용해 도자기 파편들을 붙여나가는 과정과 방법을 통해서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도자기 복원기술에 따른 것인가. 얼핏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슨 말인가. 하나의 형태로 조합된 도자기 파편들은 알고 보면 그 출처가 각양각색이다. 적어도 논리로만 치자면 그것들을 한데 모아놓을 근거는 없다. 작가는 그렇게 억지 조합된 형태를 번역된 도자기라고 부른다. 문명사적으로 도자기는 최초 발원 지역으로부터 다른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영향을 준다. 그렇게 다른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같은 도자기지만, 저마다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번역한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그 상호영향사를 주제화한 것이다. 문화충돌과 문화번역을 주제화한 것이다. 이로써 존재치고 저 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어쩜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순혈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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