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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호/ 들끓는 파토스, 때로 정적이고 더러 격렬한

고충환


박준호/ 들끓는 파토스, 때로 정적이고 더러 격렬한 


언제나 무형의 것에 관심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영역은 항상 내게 큰 영감을 준다. 그것들은 내 눈앞에 던져진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다...본다는 경험을 만드는 것.
(작가 노트) 

좋은 그림이 주는 힘이란 감각의 밸브를 여는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박준호의 그림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결정적인 것은 색감이고 질감이다. 더러 미색과 연두색 그리고 청색과 같은 다른 계조의 색채가 없지 않지만, 주로 붉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검붉은 색조가 지배적이다. 그러므로 검붉은 색조를 작가의 지배적인 색채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계조라고 했고, 색조라고 했다. 작가의 색채감정은 청색 혹은 녹색 혹은 적색과 같이 어떤 색채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미에 가까운, 어떤 색채의 기미를 내포하고 있는, 어떤 색채의 다층적인 층위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 가깝다. 

이 계조며 색조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그 과정과 방법이 궁금하다. 작가는 묽게 갠 물감을 캔버스 한쪽에 부은 후 캔버스를 기울여 물감이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게 했다고 한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를 봐가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한 차례 이상의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의 유사한 과정과 방법이 적용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화면에는 같은 색조가 서로 스미면서 포개지는 다층적인 색 구조가 형성되었다. 물감이 퍼져나가면서 다만 한 차례 지나가고 만 자리가 밝게 드러나는가 하면, 물감이 고여 층을 이룬 부분이 짙은 검붉은색으로 고착되면서 화면 내부에 비정형의 공간(유사 공간? 추상적 공간? 내면적 공간?)을 연상시키는 공간감이며 내진감이 조성되었다. 

마치 물을 머금은 종이 위로 먹이 번져나가듯, 수묵화에서의 선염법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색채감정으로 치자면 흡사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나 볼 법한 투명한 붉은 색이, 그 속에 빛의 기미를 품고 있는, 스스로 발광하는 붉은색이 인상적이고 광학적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적이다(비가시적인 정신적 영역은 항상 내게 큰 영감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붉은색 자체의 상징적 의미로 치자면 마치 내면에 응축된(억압된?) 격정을 보는 듯, 정중동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내적 에너지를 봉합하고 있는 듯 파토스적이다. 니체라면 내적 질서 그러므로 에토스와는 비교되는,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 그러므로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면은 물감이 마르면서 생긴 자잘한 기포와 균열이 미세한 자국을 만들고,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맺힌 자국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마치 색깔 속에서 빛이 배어나는 듯 은근한 발광이, 마치 그 속에 불덩어리를 품고 있는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검붉은 연기와 화산재 주변으로 폭죽이라도 터지듯 불똥을 흩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태초에 우주가 창조되던 극적인 순간을 목격하는 것도 같고, 정적이고 격정적인 파토스의 분출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위에 드리워진 드로잉이, 흩뿌려진 물감 알갱이가, 그리고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트라우마의 표상 같다. 그리고 더러 영문자와 숫자들이 그림에 갇힌 의미가 발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것은 색채감정이다. 여기서 색채와 색채감정은 다르다. 색채가 스스로는 가치 중립적인 색채 자체를 지시한다면, 색채감정은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의미하고, 가능한 무언가의 표상 형식을 의미한다. 비록 외관상 작가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여기에 꼭 맞는 전언을 예비하고 있다. 회화는 표현이며, 색채가 다름 아닌 표현이라고 했다. 표현이란 내적인 무엇을 표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다른 색도 있지만, 특히 검붉은 색채감정을 통해 내적 파토스(다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적인 영역)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적 파토스든 정신적인 영역이든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실체를 밝히기 전에 작가의 그림이, 특히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인 검붉은 색채감정이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전제하고 싶다. 그 전제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의 그림이 그 속에 품고 있을지도 모를 의미를 파고드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재현적인 그림은 아니다. 그렇다면 탈재현적인 그림인가. 다시, 그렇다면 여기서 탈재현적이란 무슨 의미인가. 조르주 바타이유는 재현을 제도의 속성이라고 본다. 제도에 관한 한 재현되지 않는 것은 없고, 의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재현화의 과정 그러므로 의미화의 과정은 제도를 존속시키는 전제조건이 되고, 그러므로 제도가 존재를 억압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무정형(어쩌면 앵포르멜의 비정형과도 통하는, 그리고 작가의 경우에는 무형)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무정형을 실천하는 것으로 예술의 당위성을 요청한다. 규정할 수 없는 것, 재현되지 않는 것,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제도의 재현화의 기획에 반하는 실천 논리다. 

그러므로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이 지향하는 실천 논리와도 그 경우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 모두와 함께, 그리고 어쩌면 이보다는 회화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회적인 사건, 그러므로 재현 불가능한 사건이라고 본, 그리고 이로부터 숭고의 감정을 도출해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입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검붉은 색채감정의 형식은 무정형이었고, 그 의미론적 실체는 숭고의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무형의 것에, 비가시적인 것에, 정신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것들은 보고, 듣고, 만져지는 감각적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폴 클레는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작가의 입장이 그럴 것이다. 여기서 무형의 것, 비가시적인 것, 정신적인 것은 작가가 보기에 진정한 현실이 된다. 어쩌면 감각적 현실을 밀어 올리는 현실, 그러므로 감각적 현실의 원형적 현실일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면 감각의 밸브를 여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감각의 밸브는 어떻게 열리는가.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고, 새롭게 만져지는 감각경험(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본다는 경험을 만드는 것)을 통해 감각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술가는 감각의 개발자들이다. 반 고흐가 없었다면 춤추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측백나무도 없었고, 코로가 아니라면 햇빛과 나뭇잎이 서로 희롱하는 감각적 유희도 없었을 것이다. 뭉크가 없었다면 공포스러운 노을도 없었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니라면 말하는 그림자 그러므로 의미하는 그림자도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시적 회화(visual poetry)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이런 감각의 개발자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 닫힌 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시는 단어와 단어의 열린 관계와 관련이 깊다. 작가의 경우로 치자면 색감과 질감의 관계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색감과 질감의 예기치 못한 만남에 연유한 열린 의미(움베르토 에코), 매번 일회적인 그래서 재현 불가능한 사건(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면에서 들끓는 잔혹한 파토스(아르토),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의 또 다른 타자(자기_타자)와 대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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