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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허 손외경. 존재, 수억 광년 전에서 온, 아롱거리는, 그러므로 어쩌면 고독한

고충환


태허 손외경. 존재, 수억 광년 전에서 온, 아롱거리는, 그러므로 어쩌면 고독한 



점을 찍을 때는 숨을 멈춘다. 숨을 멈추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죽으면 업(존재?)이 일어나지 않는다...한 점과 한 점이 모여 또 다른 완전체를 만드는 이 그림을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수많은 점으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가는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돼 자연과 우주로 이어지는 인연의 가르침을 깨달아 가는 과정과 같다.
(작가의 말)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정의는 크게 변하는 것을 좇는 경우와 변하지 않는 것을 향하는 경우로 귀결된다. 당대적인 문제의식과 동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하고 견인하는 경우와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잊힌 것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여전한 존재의 기원과 이유에 관한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 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존재론적 원형으로 부를만한 것들에 천착하는 경우로 나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오죽하면 이러한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거 하는 징후이며 증상인 시절을 살고 있다. 이 일련의 상실감은 고향의 상실감으로 대리될 수 있다. 여기서 고향은 지리적이고 지정학적인 장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가 유래하고 기원한 존재론적 원형을 의미하며, 현대인은 그런 존재론적 원형의 상실감을 앓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나르시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애써 외면해 보지만, 여차하면 깎아지른 낭떠러지 끝에 서게 만들고 시퍼런 칼날 위를 걷게 만드는 질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했고, 슬라보예 지젝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했다. 그러니 억압된 것들은 억압된 채로 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고, 실재계는 그 봉인이 뜯기지 않게 잘 보존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으로 충분한가. 억압된 것도, 억압된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도, 실재계도, 실재계의 봉인이 뜯어지는 것도 사실은 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라고 한다면 위안이 될까. 프로이트(욕망)도 지젝(무의식)도 하나같이 정신분석학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어서 다름 아닌 마음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분명한 것은, 이처럼 상실된 기원에 대한 질문은 끝이 없고 그 기억은 아득하다. 

여기에 작가는 마음을 그린다. 상실된 기원을 그리고, 잃어버린 원형을 그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잊고 있었지만 알고 보면 처음부터 나의 일부 혹은 전체 혹은 자체였기에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론적 원형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은 황홀하다. 경이롭다. 영적이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점들이, 스스로 빛을 내는 점들이 어우러져 유기적인 원을 이룬 것이 흡사 부드럽고 은근하고 우호적이고 신비롭게 발광하는 불덩어리를 보는 것 같고, 암흑의 장막을 찢고 우주가 막 태어나던 극적 순간을 보는 것 같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투명하고 칠흑 같은 우주에서 아롱거리는 지구의 야경을 보는 것도 같다. 흔히 지구의 야경을 찍은 사진을 보면, 빛이 살아있는 부분과 빛이 죽은 부분이 대비돼 보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빛이 고르게 흩뿌려진 것이 다르다(존재치고 빛나지 않은 존재가 없다는 것일까). 원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빛의 밀도(광도)가 느슨해지면서 입체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우주를, 지구를, 행성을 그린 것일까.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시신경에 압력이 가해질 때 눈꺼풀 밑으로 보이는, 그렇게 순간적으로 머물다가 사라지는 섬광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다시, 작가는 생리적인 현상 아니면 마찬가지 의미지만 생리적인 현상을 통해 보이는 비전을 그린 것인가. 무슨 비전? 감긴 눈 속에서 아롱거리는 그 비전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 그걸 영혼이다, 마음이다, 존재다, 라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모르긴 해도 오랜 수행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그런 종류의 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을 우주의, 지구의, 행성의 질료 그러므로 감각적 형상을 그린 그림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 형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영혼의, 마음의, 존재의 표상을 그린 그림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작가에게 나 그러므로 마음, 다시 그러므로 존재는 인연의 끈으로 우주와 연결돼 있다). 그 비전이 황홀하고 경이롭고 영적인 감동으로 사로잡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의 점을 찍는다. 점을 찍으면서 존재를 세운다. 점을 찍을 때 숨을 멈춘다. 순간적으로 죽으면서 존재를 살린다. 하나의 존재를 살리는 일은 어쩌면 하나의 우주를 낳는 일이고, 죽음과 맞바꿀 만한 일이다. 자기를 타자에게 내어주는, 그러므로 타자를 맞아들이는(레비나스) 작가만의 방식이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는 하나의 점을 찍기 위해 몰입한다. 몰아다. 그렇게 몰입하는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고, 내가 지워지고 무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아다. 내가 죽어야 존재가 살고, 내가 없어야 타자를 위한 빈자리가 생긴다. 그렇게 하나의 점을 찍는, 하나의 존재를 세우는 과정에서 몰아와 무아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나는 오히려 오롯해진다(진아?)는 역설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마치 숨을 쉬듯 죽고 살기를 반복하면서 헤아릴 수도 없는 점을 찍고 꼭 그 점만큼의 존재를 세운다. 반복이다. 숨을 쉬는 것도 반복이고, 죽고 사는 것도 반복이고, 점을 찍는 것도 반복이다. 반복수행이다. 비록 그 과정은 반복이지만, 정작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도 똑같은 점이 없는, 저마다 본연의 빛으로 발광하는 천태만상의 존재들이, 그러므로 어쩌면 지구촌 사람들(생명체들)이 비로소 그 형상을 덧입는다. 

이처럼 점은 존재의 최소 단위원소일 수 있다. 단위 원소들이 모여 나를 만들고, 존재를 만들고, 사람들을 만든다. 마음을 만들고, 생명을 만들고, 우주를 만든다. 여기서 만드는 것은 그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만드는 것이므로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점은 이처럼 존재가 유래한 원천이면서, 동시에 조형예술의 최소 단위원소이기도 하다. 모든 조형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비롯했고, 재차 하나의 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모더니즘 환원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조형이란 어쩌면 관념을 표현하고 표상한 것이라고 한다면(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작가가 자기 관념을 표현해줄 표상 형식을 찾는 과정에서 저절로 가닿은 지경이며 차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는 이렇듯 점찍기와 함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이번에는 점 대신 격자다. 마찬가지의 원 속에 격자들이 빼곡하다. 격자들은 그려 넣었다기보다는 마치 건물을 짓듯 뼈대와 구조를 세워 일으켜 축조해놓은 느낌이다. 물감을 밀어 올려세운 것인데, 눈으로도 보이고 실제로도 만져지는 요철이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른다. 그 격자들 속을 작가는 다양한 색깔로 채워 넣었다. 점 시리즈가 저마다 본연의 빛으로 발광하는 존재를 매개로 한, 내면적이고 영적인,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격자 시리즈는 흡사 지구촌 구성원들의 다채로운 삶의 색채를 풀어놓은 듯 알록달록하고 다정다감하고 장식적이고 예쁜 느낌이다. 점 시리즈가 영적 존재를 표상한다면, 격자 시리즈는 생명의 환희를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격자는 구조적으로도 닮았지만 집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존재의 집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존재의 집?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언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하나의 조형 언어를 표현한 것이고, 이로써 지구촌 사람들의 다채로운 살림살이(그러므로 어쩌면 집)를 표현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으로 다채로운 색깔이 아닌, 격자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저마다 자기 속에 갇힌 고독한 존재를 표상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저마다 와닿는 마음결에 따라서 읽으면 될 일이다(예술의 의미는 열려있다). 

한편으로 정작 작가는 격자를 탑에서 착상했고 만다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여기서 만다라 자체를 우주의 원리며 구조를 도해한 형상으로 이해한다면, 나로부터 시작돼 연이어진 우주(점 시리즈)와 저마다 존재의 집들이 모여 확장된 지구촌(격자 시리즈)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탑 속에 만다라가 있고, 집이 있고, 우주가 있고, 존재가 다 들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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