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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 기억의, 존재의, 자기의 원형을 발굴하는

고충환


창덕/ 기억의, 존재의, 자기의 원형을 발굴하는 


나의 작품은 일종의 창조적 파괴행위로서 화면을 파내는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수히 파 내려간 선으로 인하여 면과 면이 만나면서 점, 선, 면의 새로운 내면의 풍경이 생성되는 것이다...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굳혀진 기억의 화석에 더 많은 선을 그었다. 이리저리 파 내려간 선 사이로 더 많은 기억이 보였다.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장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듯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작가 노트)  

작가 창덕의 그림을 본 첫인상은 추상이고 단색화였다. 한눈에도 모더니즘 세대의 세례를 받은 그림이고 그 영향 관계를 반영한 회화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반영하면서 그 회화적 준칙을 자기화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뭔가. 회화가 성립 가능한 지점을 점, 선, 면, 색채, 양감, 그리고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로 환원(그러므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형식주의고 환원주의다.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은 차치하고라도,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회화로서 요구되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모더니스트로서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반영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영향 관계를 받아 자기화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 부분이 결정적일 것이고 작가의 회화적 특정성을 담보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의 준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자기화하는가. 설핏 작가의 그림은 모노 톤의 단색화 같지만, 사실은 화면의 표면에 무수하게 그어 내린 세선들이 보이고, 그 선들 사이사이로 얼핏 표면과는 다른 색깔이 드러나 보인다. 문득 그 과정이 궁금하다. 그 과정을 알아야 비로소 그림 속에 내장된 의미도 캐낼 수가 있을 터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엄밀한 의미에서 단색화는 아니다. 단색으로 보이는 표면 밑에 무수한 다른 색의 지층을 숨겨 놓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먼저 이런저런 색면이며 이미지를 덧그리고 덧올리는 방식으로 화면을 조성한다. 그리고 그 위에 최종적인 한 색면으로 덮어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어쩌면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위한 밑바탕 작업이 겨우 끝났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조성된 화면 위에 작가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무수한 세선들을 그어 내리는데, 그렇게 그어 내린 선들 사이사이로 밑 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 보인다. 최종적인 색면으로는 밝은색도 있지만, 어두운 색면에서 밑 바탕색은 더 밝게 드러나 보이는데, 작가는 거기서 빛의 기미를 본다. 빛의 기미? 내면의 빛?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창조적 파괴행위에 비유한다. 작가 자신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이런 창조적 파괴행위로 치자면 예컨대 평면에 길을 열어 공간을 내고 공간을 통하게 할 요량으로 칼로 캔버스를 찢은 루치오 폰타나의 경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현대미술 곧 아방가르드 미술은 자기부정(그러므로 회화적 전통에 대한 부정)을 통해 새로운 형식 창조를 위한 형식실험의 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창조적 파괴행위는 어떻게 수행되는가. 애써 쌓아 올린 색면의 지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세선을 긋는 것으로 지층을 파헤치는 것인데, 그렇게 무수히 파 내려간 선 밑에서 내면의 풍경이 열린다. 

내면의 풍경이 열린다? 무슨 풍경? 이렇게 작가가 근작의 주제로서 제안해놓고 있는 <Landscape> 곧 풍경에 도달했다.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자연을 묘사한 그림도 아니고 풍경을 재현한 그림도 아니다. 이처럼 묘사적인 그림도 아니고 재현적인 그림도 아니라면, 그럼에도 풍경을 그린 것이라면, 이때의 풍경은 내면 풍경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하자면 추상적 회화형식을 빌려 서사적이고 의미론적이고 자기 고백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암시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폴 클레는 예술이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기술, 그러므로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내면 풍경을 암시한다. 설명을 하자면 작가는 켜켜이 중첩된 색면의 지층을 기억의 지층(화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억의 지층은 기억답게 단색으로 드러난 표면 밑에 숨겨져 있다. 마치 의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무의식의 그림자처럼. 그리고 작가는 스크래치를 통해 기억의 지층을 헤집어 기억의 원형을 캐낸다. 기억의 원형? 여기서 다시, 작가는 사실은 자기 고백적인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자기 그러므로 존재가 뭔가. 기억의 집이다. 기억이 자기를 만들고 존재를 형성시킨다. 전작에서 작가는 코라(Chora) 그러므로 근원적 모태를 주제로 제안한 적이 있는데, 그림도 그렇거니와 주제 의식 또한 근작과 서로 통하거나 심화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원형은 말하자면 그대로 존재의 원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기억을 캐내면서 사실은 궁극적인 자기를 캐내는 것이다. 궁극적인 자기? 불교에서의 진아? 작가는 스크래치를 관성적인 나, 습관적인 나를 파괴하고 죽게 하기 위한 조형적 표현이라고 했다. 나를 죽이면 뭐가 혹은 누가 남는가. 궁극적인 자기가 남고, 진아가 오롯해지는가. 작가의 그림은 아마도 거듭나기를 위한 기획에 그 초점이 맞춰진 것이고, 그러므로 존재론적인 그림일 터이다. 주지하다시피 주체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구분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 곧 사회적 주체, 제도적 주체가 페르소나다. 그리고 알다시피 페르소나는 그 어원이 가면에서 왔다. 운명적으로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모두 이런 가면 주체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가면 주체 뒤에 억압된 주체,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주체가 아이덴티티다. 

그러므로 어쩌면 다만 그 종류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이중 분열과 자기분열은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가면 주체를 너무 오래 쓰고 있다 보면 진정한 주체가 아득해지고 아예 잊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주체가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계속 상기시키고 표면 위로 불러내는 일이 예술가의 과업으로 주어지기도 한다. 어찌 예술가만의 일일까. 모든 진지한 사람들의 자의식이 맞닥트리고 맞아들여야 할 일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실명과 예명,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자체 작가가 이런 분열적 주체 혹은 이중적 주체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를 생활 주체(그러므로 관성적 주체)와 창작 주체(그러므로 창조적 주체)로 구별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기억의 지층을 헤집어 기억의 원형을 캐내고, 표면적인 자기, 피상적인 자기, 관성적인 자기를 죽여 또 다른 자기(자기_타자)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의 원형 혹은 원형적 자기를 발굴하는 기획으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반성적인 기획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서 작가의 그림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세선이 외상 곧 트라우마를 떠올리게도 한다. 
작가는 기억의 지층(그러므로 화석)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상상계(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와 상징계(언어와 기호와 규율이 작동하는 세계) 그리고 실재계(상징계로부터 추방된, 억압된 상상계)가 중첩되고 포개진 존재론적 층위의 표상처럼도 보인다(자크 라캉). 그러므로 작가는 비록 선 사이사이로 설핏 드러나 보이는 밑 색에서 빛의 기미를 보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어쩌면 파열된 상징계의 틈 사이로 출현한 실재계의 귀환(프로이트라면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했을)으로 볼 수도 있는 일이다(슬라보예 지첵). 양가성이 존재론적 조건임을 인정한다면, 빛의 기미가 동시에 외상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형식논리 중심의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정박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를 해석하고 자기화하는 자기만의 과정과 방법을 통해 서사적인, 의미론적인, 자기 고백적인 그림을 그려 놓고 있다. 비록 자기 고백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는 존재론적 조건과 자의식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기에,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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