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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수, 풍경의 재구성 1부

고충환



김윤수, 풍경의 재구성  1부




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 감기. 골판지를 잘게 잘라 감아 나간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감아 나가다 보면 처음 감기 시작했던 형태가 점차 희미해지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만든다. 그렇게 곡선이 만든 형태를 보면 중첩된 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구조가 파동을 연상시키고 파문을 떠올리게 한다. 바닥에 누워있는 형태가 그렇고, 형태를 일으켜 세워 공중에 매달면 뒤집힌 거대한 종 같고, 종지 같고, 모자 같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형태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애매한 형태, 알 수 없는 형태, 미증유의 형태라고 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골판지를 자르면 단면에 무수한 구멍들이 보인다. 그래서 매단 형태에 조명을 비추면 바닥에 구멍이 숭숭 뚫린 그림자를 만든다. 이 조각을 작가는 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여기에 두 개의 조각이 있다. 골판지로 만든 조각과 그림자 조각이다. 골판지로 만든 조각이 매스(양감)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조각이라고 한다면, 그림자 조각은 물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물질 조각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명명한 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으로 치자면 골판지 조각보다는 그림자 조각 쪽이 더 부합해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탈조각과 비물질 조각을 매개로 투명한 사유에 관하여 형식 실험을 한다. 그렇다면 투명한 사유란 무슨 의미이며, 또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작가의 작업이 조각을 전제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다름 아닌 탈조각과 비물질 조각 자체가 이미 투명한 사유의 의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투명한 사유에 관한 조각이란 최초 의미는 사실은 어떻게 조각을 투명하게 할 것인가란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감기를 통한 반무의식적이고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어진 그림자 조각 곧 비물질 조각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렇게 작가는 조각을 탈조각화하고 비물질화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향후 작가의 작업은 더 이상 조각의 장르적 특수성에 한정되지 않으면서,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투명한 조각과 투명한 사유를 묻는 것이 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여기서 투명한 조각은 그렇다 치고, 투명한 사유는? 일단은 감기로 나타난 반무의식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수행과정 자체를 투명한 사유의 물화 된 형식으로 볼 수는 있겠다. 

흩어지는 것들의 기록, 지문. 사람들이 저마다 지문을 찍는다. 그리고 각 삶에 대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그러면 작가가 지문과 생각을 수집해 작업을 위한 재료로 이용한다. 알다시피 지문이 같은 사람은 없다. 신분증이 사회적 존재증명서라고 한다면, 지문은 몸에 아로새겨진 생물적 존재증명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문에는 고유의 골이 있다. 작가는 그 골을 따라 사람들이 적어준 생각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나간다. 그렇게 생물적 존재증명서에 사유적 존재증명서가 겹쳐진다. 다시, 그렇게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는 저마다의 생물적 그리고 사유적 존재증명서가 완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사유적 존재증명서는 지문만큼이나 개인에 속한 것이 된다. 삶과 죽음 사이, 그러므로 어쩌면 시점과 종점 사이, 알파와 오메가 사이로 흩어지는 사유의 입자들이 오롯이 기록되면서 저마다 고유의 형태를 입는다. 작가가 주선하고 사람들이 참여하는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고, 이를 통해 저마다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자기반성적 사유의 계기를 여는 존재론적 작업이다. 

나는 맨발로 태고의 시간을 이어온 땅을 만지며 머리가 아닌, 발이 그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삶에 대해 생각한다...고정되지 않고 늘 변화하며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사막과도 같은 풍경들, 그것은 발이 그려놓는 살아간다는 것의 무늬이다...가끔 인적이 뜸한 산길을 거닐 때면 신을 벗고 맨발로 걷곤 한다. 그러면 적막이 발끝을 타고 가슴 깊은 곳까지 번져간다. 나의 몸이 땅이 되고 숲이 되고 산이 되고 물결이 되고 하늘에 가까워진다. (작가의 말) 

발자국, 살아간다는 것의 무늬. 아마도 작가의 작업 중 그나마 뚜렷한 형태와 손에 잡히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작업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사람들은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런저런 비유를 만들어냈다. 저마다 주어진 배역을 사는 연기에 삶을 빗댄 비유도 있고(극장 무대 연극 같은 비유가 여기에 해당한다).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나 막막한 우주에 던져진 미아에 빗댄 비유도 있고(고독하고 쓸쓸한 존재를 증명하는 경우), 책에 빗댄 비유도 있다(이야기하는 존재에 주목한 경우). 그리고 길, 여로, 여정에 빗댄 비유가 있다. 성장소설과 로드무비로 나타난 작은 장르(장르 속의 장르)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그리고 전형적인 비유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걸어서 숲에도 가고 산에도 간다. 바다에도 가고 사막에도 가고 하늘에도 간다. 아득한 시간에도 가고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에도 간다. 의식에도 가고 무의식에도 간다. 내면에도 가고 심연에도 간다. 오브제로도 가는데, 너무 많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 속으로도 가고, 절벽에서 잠을 자던 흡혈박쥐가 날아올라 피를 빠는 활자 속으로도 가고, 빛바랜 흑백사진 속으로도 가고, 그리운 엽서 속으로도 가고, 그 자체 작은 풍경이랄 수 있는 사물 속으로도 간다. 인간은 몸과 의식을 분리할 수 있는 동물이다. 몸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지만, 의식이 갈 수 있는 곳은 무한정이다. 

여기에 의식을 몸이 연장된 것으로 본다면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메를로 퐁티는 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세계에 세계가 나에게 이미 속해져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나는 가지 않고도 갈 수 있다. 여기에 세계를 내 손안에 쥐게 해준 그러므로 의식을 확장 시켜준 미디어 세상에서라면 더 그렇다. 그렇게 심지어 나는 너에게 나를 보낼 수도 있다. 

그렇게 오고 가는 이 모든 삶의 여로에 발이 있다. 작가가 발에 주목한 이유다. 작가는 일정한 두께를 갖는 투명한 비닐 패드로 발 모양 그대로 오린다. 그리고 그렇게 오린 발 모양을 다른 패드에 대고 오리는데, 이때 패드 자체의 두께 때문에 과정이 진행되면서 점차 최초 형태가 뭉그러져 대략적인 유선형의 곡선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오린 발 모양의 패드를 쌓아 올려 하나로 중첩 시키면 최초 모본에 해당하는 형태 그러므로 꼭대기가 발 모양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형태 전체가 발자국이 지나간 자리 그러므로 발자국의 궤적을 하나의 지층처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존재가 지나간 자리, 존재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을 흔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가 지나간 자리는 그저 존재가 지나간 자리에 머물지 않고, 존재가 머문 자리, 존재가 머물다간 자리, 존재가 머물다 가면서 뭔가를 남기고 간(이를테면 그리움이나 상처 같은) 자리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렇게 확장되면서 덩달아 의미론적 서사 역시 소설적 서사(그 자체 닫힌 서사 체계를 가지고 있는)에서 시적 서사(열린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는)로 확장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가 해변이나 사막에 아로새겨진 발자국 같고,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남긴 모래톱 같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그러므로 바람이 자신의 일부를 남기고 간 움푹 파인 자국 같고(패드가 만든 형태 자체는 양각이지만, 투명한 탓에 음각으로도 보이는), 패드와 패드가 겹쳐지는 지점에 라인이 생기면서 층 구조를 만드는 것이 등고선 같고, 산 같고, 절벽 같고, 바람 속에 그리운 마음을 실어 보내는 회오리 같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는, 변화무상한, 그래서 덧없는 구름 같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대로 가면서 유사 풍경을, 의식(아니면 무의식)의 풍경을, 내면 풍경을 만든다. 

비록 발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발이 오만대로 가면서, 의식을 따라 흐르면서 오만가지 형태로 변태 되는 형태가 의식의 흐름 기법(마르셀 프루스트)을 연상시키고,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는 무정형(조르주 바타이유)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이런 의식의 흐름 기법이나 무정형은 입체 조형에서보다는 구름 드로잉, 하늘 드로잉, 별빛 드로잉, 달빛 드로잉, 파도 드로잉과 같은 일련의 드로잉이나 이를 묶어낸 책 작업에서 더 흐릿하게, 더 희박하게, 더 애매하게, 더 섬세하게, 더 깊게, 더 시적으로 전개되고 확장되고 심화된다. 

울트라마린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법칙을 넘어서 닿고 싶은 저편의 세계다. 울트라마린이 나를 매혹한다. 공간은 아득히 깊어지고 끝없이 넓어진다. (작가의 말) 

울트라마린, 바다 저편에서 온. 울트라마린블루라는 색깔이 있다. 그 의미를 보면,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이라는 말이다. 옛날에 안료는 당연하게도 천연재료였고, 그중 청색은 귀하고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 건너 이국에서 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국은 아마도 중국과 중동 터키와 인도 같은 동양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처럼 이 말속엔 오리엔탈리즘의 기원이 숨어있다. 그리고 초기 국가 간 무역과 상권, 그리고 어쩌면 식민제국주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 작가는 그 색깔 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안료와 화구 점토와 사물 가리지 않고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을 모은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드로잉을 하고, 오브제를 만든다. 하늘을 그리고, 구름을 그리고, 별빛을 그리고, 적막을 그린다. 여기에 비닐 패드를 소재로 한 입체 조형 작업 역시 투명하고 깊은 청색을 떠올리게 된다.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에 대한 자발적인 마니아가 된 것이다. 

작가는 그 색깔 말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바다 저편에서 온. 바다 저편? 이국적인? 바다 저편에는 이국 말고 죽음도 있고 내세도 있다. 보통 사람이 죽을 때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넌다고 한다. 그렇게 바다 이편에는 삶이 있고 현세가 있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는 죽음이 있고 내세가 있다고 본 것이 낭만주의다. 낭만주의는 현세를 내세에 대한 상징으로 간주했고, 죽음이 삶을 정화한다고 믿었다. 타나토스가 에로스를, 죽음충동이 삶의 욕망을 정화한다고 믿었던 프로이트의 관념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바다 저편에는 형이상학이 있고, 바다 저편에서 온 청색에는 존재가 유래한 곳과 돌아갈 곳, 죽음과 내세, 영성과 숭고와 같은, 형이상학의 부수물들이 있고, 작가는 그 부수물들을 그리고 만든다. 

그리고 바다 저편이란 말을 제도를 매개로 볼 수도 있다. 바다 저편에는 미처 의미화되지 못한 말들, 의미화되기 이전의 재료에나 해당할 말들, 의미화를 거부하는 말들, 그럼에도 억지로 의미화하면 왜곡되고 마는 말들이 산다.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닌데, 실제로도 의미화되지 않은 채로 의미하는 것들이 있다. 반면, 제도는 모든 것을 의미화하고 개념화한다. 의미 바깥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개념으로 환치되어야 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제도의 이 기획을 정형의 기획으로 보고, 그 기획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서, 그 속에 예술을 위한 실천적 당위도 포함하고 있는 무정형을 제안한다. 의미화되지 않으면서 의미하는 것,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의미하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의 의미의 바깥과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식과 합리를 doxa(독사) 그러므로 부르주아 고유의 언술이라고 했는데, 같은 의미와 문제의식을 지적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흐릿한, 희박한, 애매한, 섬세한, 깊은, 시적인, 아마도 바다 저편에서 추수한 말들을 재구성한 작가의 작업은 의미화와 개념화에 맞춰진 제도의 기획 그러므로 욕망으로부터 탈주선을 그리는 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림들, 드로잉들, 사진들, 오브제들, 설치와 설치의 부수물들, 두루마리들, 병풍 형식의 그림 구조물들을 매개로 시간의 법칙을 넘고 공간의 법칙을 넘어, 공간(그리고 시간)이 아득히 깊어지고 끝없이 넓어지는 곳으로 순간이동 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 본연을 그리는 것, 나는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귀환하는 사라진 것들의 반짝임을 붙잡아 둔다...결코 명확하게 표현 되어질 수 없는 것들, 부재 하는 것들, 흩어지는 것들, 그것들의 희미한 경계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 그 사이 어디 즈음에서 떠다니는 것, 그리움을 그리는 것, 그렇게 별이 되는 것. (작가의 말) 

별, 잊혀지지 않는 마음. 사람들은 저마다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잊혀지지 않은 채 별이 된 마음이 있다. 결코 명확하게 표현 되어질 수 없는 것들, 부재 하는 것들, 흩어지는 것들, 희미한 경계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들, 그 사이 어디쯤엔가 떠다니는 것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화신으로 화해진 것들, 그리고 종래에는 별이 돼 반짝이면서 귀환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전통적인 족자 형태의 화면 위에, 종이 벽지 위에, 일상 속의 벽면 위에,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 위에 그렇게 귀환한 것들을 글귀로 아로새겼다.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라고. 깨알 같은 별 하나를 모나드 혹은 단자 삼아 하나하나 그리면서 덧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재현했다. 그 자체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잊혀지지 않는 마음을,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을 물화했다. 

그리고 근작에서의 허밍 허밍(혼자 부르는 콧노래 혹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은 시적이다. 일관된 서사, 닫힌 서사에 바탕을 둔 소설적 서사와 비교해보면 그 행간이며 여백이 넓은 편이다. 그만큼 비결정적이고, 가변적이고, 가역적인 구조며 생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 똑 떨어지는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업도 있지만, 대개는 무엇과 무엇이 만나고, 어디에 어떻게 놓이는지에 따라서 매번 그 의미가 달라지는, 그런, 열린 의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의미론에서는 그 자체 이미 의미를 담보하고 있는 의미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논리가 의미를 만든다고 본다. 그림이든 오브제든 어떤 상황 속에 담겨질 때 비로소 의미는 발생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상황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이처럼 상황 결정적 작업에서 연출(개념 연출과 공간 연출을 포함하는)은 사실상 창작의 또 다른 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작가는 개념을 연출하고 공간을 연출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재구성한다. 그렇게 매번 한 권의 시집 같은 풍경을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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