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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민, 조각난 이야기에서 젤리 심해로

고충환




정해민, 조각난 이야기에서 젤리 심해로 





여기에 동굴이 있다. 잘 보면 파먹고 남은 식빵 동굴이다. 식빵 동굴 위에는 언덕 위에 가설된 사일로처럼 커피포트가 굽어보고 있다. 상식적이라면 동굴은 자연에 속해야 마땅하고, 식빵과 커피포트는 식탁 위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작가는 상식적이지 않은, 마땅하지 않은, 자연스럽지 않은 어떤 상황 논리라도 그려놓고 있는 것인가. 

사실, 작가의 그림은 온통 그런 식이다. 이를테면 환기구로 새어든 빗물이 바닥에 홍수를 일으키고, 그 위로 종이배가 떠가는 식이다. 방 안이 불현듯 파도가 치는, 제법 자갈돌 몇 개가 놓인 해변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해변으로 불가사리가 떠밀려오기도 하고, 물이 담긴 대야 속에 종이배가 정박해 있기도 하다. 멀리 섬이 보이는 해무가 피어오르는 바다로 변한 방 안에는 탁자 위로 나무(맹그로브)가 자라고, 좌초된 선박처럼 바닥에 탁자가 좌초돼 있다. 커튼 자락 밑으로 문지방을 넘어 물이 범람하면서 방안은 졸지에 개울로 변하고, 눅눅한 습기 탓인지 바닥에는 달팽이가 기어 다닌다. 복어(황태?)가 마룻바닥을 대신하는가 하면, 화초 대신 물고기가 자라기도 한다. 아마도 형태적 유사성(이를테면 무늬목과 유선형)에 착안한 것일 터이지만, 그 변태가 의외고, 그 조합이 상식적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이처럼 자유자재로 변태 되는 소재들이며, 의외의 조합은 다 무엇인가. 작가의 그림은 온통 그런 식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그 자체 작가의 회화를 관통하는 형식적이고 의미론적인 특징이며,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경을 밝히는 것이 관건이겠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자유자재한 변태가, 그리고 의외의 조합이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 기법을, 의식의 흐름 기법을, 그리고 데페이즈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를테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를 연상시킨다(불러온다). 여기서 형태는 사물이 될 수도, 기호가 될 수도, 때로 서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대개 형태와 형태를 매개하는 연상은 논리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보는 것이 자유연상 기법이다. 그리고 의식은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흐른다. 사실을 말하자면 의식이 어디로 어떻게 흐르는지에 대해서 다만 추론을 할 수 있을 뿐,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사로운 내적 필연성(이를테면 억압된 욕망이나 트라우마와 같은, 개별 주체 안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면 우연성으로 볼 수밖에. 그리고 알다시피 데페이즈망은 의외의 조합과 관련이 깊다. 특히 시어에서 발달 된 경우를 확인해볼 수가 있는데, 의외의 조합이 열어놓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의미를 확장 시키는 계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조각난 이야기>라고 부른다. 주체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주체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정의를 인정한다면, 조각난 이야기를 하는 주체는 조각난 주체다. 무슨 말인가. 주체 자체가 이미 조각난 주체고, 파편화된 주체고, 다중적인 주체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나를 만든다. 그러므로 어쩌면 타자가 나를 만든다. 나는 타자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내가 보고 들은 타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조각난 이야기고, 파편화된 이야기고, 다중적이고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로 구조화된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그렇다. 여기에 하나의 의미란 사물 고유의 성질이 아니라, 맥락적이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 의미 또한 달라진다. 작가의 조각난 이야기 시리즈는 이처럼 후기구조주의의 다중주체와 맥락 의미 결정론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조각난 이야기는 형식적으로도 예시되는데, 일종의 설치회화가 그렇다. 작가는 크고 작은, 그리고 그 형태도 다양한 변형 캔버스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그렇게 그림 자체도 조각나 있다. 크고 작은 조각 그림들을 그린 연후에 벽에 걸기도 하고 천장에 매달기도 하는, 공간설치작업을 보여준다. 그 자체 평면에 한정된 회화를 공간으로까지 확장 시키는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확장성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는 이런 변형 캔버스를 이용한 공간 설치작업과 함께, 때로 스탠드와 합판, 그리고 늘어트린 천(비닐?)과 같은 오브제(레디메이드)를 도입해 재현된 현실과 현실 자체 간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이 일련의 공간설치작업에서 부분과 부분은 상호 연관성이나 논리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작가의 경우에 상관성은 폭넓은 의미에서, 더 유연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관상 이질적인 의미들, 상관없는(엄밀하게는 상관없어 보이는) 의미들, 정박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의미들을 붙잡아 저마다의 의미(그리고 서사)로 재구성하는 일이 과제로 주어지는데, 과제라기보다는 의미를 재구성하는 놀이에 초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가 디지털로 그린(디지털 드로잉) 또 다른 시리즈 그림 <젤리 심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번에는 사물과 사물 간 의외의 조합보다는 사물의 자유자재한 변태에 방점이 찍힌다. 그 배경은 욕실이다. 알다시피 욕실은 집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쉽게 무장 해제되는 것인데, 심리적으로 무장 해제되면서 그 빈자리를 상상력이 파고든다. 의외의 조합도 그렇지만 사물의 변태가 열어놓는 예기치 못한 의미에 바탕을 둔 작가의 상상력이 꽃 피우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욕실을 지키는 소품들, 이를테면 면도기, 수도꼭지, 세면대, 비눗갑, 때밀이 수건,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가 이름도 아리송한 각종 생명체로 변태 된다. 때로 형태적 유사성에, 그리고 더러 형태가 불러일으키는 자유연상에 착안한 것이지만, 여기에 작가는 심지어 이름마저 부여해 일종의 유사 생물 도감을 구상한다. 비록 지금은 따로따로지만, 차후에 그렇게 창조된 생물과 생물이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서사를 써나갈 미래를 예상해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외 작가의 작업에는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해 본 크레이 애니메이션 <뾰로롱 뽀글>도 있다. 일면식도 없는 세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공동체 경험을 모티브로 한 작업이다. 어떤 행위를 하면, 그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아이템을 얻는 게임 방식을 적용한 작업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고립된 개인의 차원을 넘어, 향후 인간관계와 같은 사회 공동체를 향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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