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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이/ 바람의 집, 풍경을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고충환



최제이/ 바람의 집, 풍경을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최제이는 자신의 근작을 내면적 풍경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풍경은 자연과는 다르다. 자연이 인간의 인식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다면, 풍경은 자연에 대한 해석의 산물이고 의식의 소산이다. 풍경은 말하자면 주체의 인식이 가닿을 수 있는 한계다. 주체와 자연 사이에 그어진 경계고 보이지 않는 금이다. 다시 말해 풍경은 작가와 자연 사이, 그러므로 관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작가에게서 자연 쪽으로 건너가는 무엇이 있고, 자연에서 작가에게로 건너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것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풍경은 비로소 생겨난다. 여기서 자연이 당기는 힘이 강할 때 그림은 재현적인 회화로 나타나고, 작가 쪽으로 쏠릴 때 그림은 표현적인 회화로 현상한다. 회화는 그렇게 재현과 표현,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조율하는 일이다. 

이 모두는 외계와 가장 먼저 만나는 감각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감각적인 그림이 있고, 내면적인 그림이 있다. 작가의 경우에 감각적인 그림과 내면적인 그림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풍경은 어느 정도 내면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굳이 자신의 그림을 내면적 풍경이라고 부른 것은 내면화의 경향성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를 강조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풍경을 통해서 정작 자신을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풍경을 매개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고, 그러므로 주관을 객관화하고 싶어서일 것이다(예술은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연을 통해서, 풍경을 빌려서 자신의 무엇을 표현하고 객관화하는가. 사실 내면화의 경향성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전작을 스케치해볼 필요가 있다. 침대, 가방, 소파, 인형, 램프, 촛대, 주전자, 우산, 드레스, 하이힐, 오르골, 액자, 열린 새장, 사슴, 상자, 그리고 목마와 같은 사물들이 무중력 상태를 부유하고 있다. 때로 사물들은 나무가 결실한 과일처럼 나무에, 때로 웃자란 사슴뿔에 매달려있다. 

무중력 상태도 그렇거니와 있을 법하지 않은 사실이 초현실적 비전을 예시해준다. 아마도 유년 시절에서 호출된, 꿈이 현실이기도 했던 시절(자크 라캉이라면 상상계, 줄리아 크리스테바로 치자면 코라)에서 소환된, 그렇게 지금은 상실을 재확인시켜주는 한편으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은 사물들이 자유연상 기법과 의식의 흐름 기법에 따라 재편되고 재구성된 비전을 보여준다. 그 비전 그러므로 자기 내면 풍경을 작가(아마도 새장을 열고 날아간 새와 사슴에 비유된)가 보고 있고,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에 내면의 거울(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살고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자기_타자를 의미할 것이다), 비밀의 정원, 생각의 나무, 그리고 대화(또 다른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와의 대화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와 같은, 내면화의 경향성을 환기하는 제목들이 이런 내면 풍경을 지지해준다. 


그렇다면 이런 내면화의 경향성과 내면(적) 풍경이 근작에서는 또한 어떻게 자기표현을 얻는가. 풀잎이 눕는다. 바람이 분다. 바람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덕 위 어디쯤엔가 작은 집이 보인다. 집이 없는 풍경도 있지만, 대개의 그림에서 풍경은 외딴집 한 채를 품고 있다. 그림 밖에서 그 집에 가려면 누운 풀잎을 헤쳐서 가야 하고, 바람길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때로 빨간 지붕을 이고 있는, 때로 빨간색으로 벽을 마감한 그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때로 그 집에는 멀리 먹구름이 보이고 흐린 것도 같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낮 같은 풍경과 상관없이 노란 불빛이 창문으로 은근하게 빛을 발하고 있어서 초현실적인 느낌과 함께 안온한 느낌을 준다. 폭풍의 전야 같다고 해야 할까. 폭풍의 언덕 같다고 해야 할까. 폭풍의 전조와 대비되면서 그 집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폭풍우로부터 존재를 감싸 안는 보금자리 같다고나 해야 할까. 

풍경은 잔뜩 흐린데, 바람에 풀잎이 일렁이는데, 바람에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데, 때로 불어온 바람에 풀잎 위에 집이 얹혀있는데, 그 집 창문에는 노란 불빛이 새 나오고 있다. 현실 속 풍경을 닮았지만 현실 그대로라기보다는 극화된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집 역시 현실의 일부라기보다는 연출된 풍경의 한 부분처럼 보이고, 노란 불빛 또한 그렇게 보인다. 황량하고 스산한 바람만 부는 풍경 속 외딴집이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람만 부는 세상에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될 것도 같다. 여기서 작가는 현실을 참조할 뿐, 사실은 자기 내면 풍경을 그렸다. 자기 내면에 부는 바람을 그렸고, 자기 내면의 스산하고 처연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고(자기 내면 곧 자기를 그린 것이므로 스산하고 처연한,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그렇게 양가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세상에 부는 바람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줄 내면의 집을 그렸고,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자기를 밝혀줄 노란 불빛을 그렸다. 

풍경을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라고 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세상에 저 홀로 던져진 존재의 처지를 세계 내 존재라고 불렀다. 이미 의미론적으로 세팅된 그러므로 결정화된 세상 속으로 존재가 태어난다는 의미지만, 여기에는 왠지 실존적 인간의 자의식이 묻어 있고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그림 속 풍경은 스산하고 처연한, 황량하고 아름다운, 쓸쓸하고 따뜻한, 바람인지 온기인지 모를 양가감정을 전해준다. 아득하고 먼, 언젠가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신기루 같기도 하고 데자뷰 같기도 한, 현실 속 풍경 같기도 하고 작가가 지어낸 상상의 풍경 같기도 한, 노스텔저와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양가적인 풍경 그러므로 경계의 풍경을, 작가는 그려놓고 있었다. 

무의식(어쩌면 그 자체 내면 풍경과도 통할지도 모를)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학으로 초현실을 예비한 프로이트는 예술을 억압된 욕망의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여기에 예술이란 상실된 것들의 원형을 되찾는 상징적 행위라는, 어쩌면 일맥상통할 또 다른 정의를 덧붙이고 싶다. 예술은 말하자면 상실된 유년으로 존재를, 자기를 소급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상실된 유년? 상실된 원형? 유토피아다. 존재가 유래한 우주적 자궁이다. 존재가 나고 드는 코라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현실에는 없는, 다만 인간의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장소 그러므로 비장소고 탈장소다. 그리고 코라는 의미로 분별 되기 이전의 세계, 그러므로 그 자체로 자족적이고 온전한 세계, 원초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이로써 작가는 바람만 부는 세상에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 줄, 보듬고 감싸 안아줄, 위로하고 위안해 줄 우주의 자궁을, 코라를, 유토피아를, 이상향을, 그리고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본향을 바람 부는 언덕 위 외딴집으로 소환해 그린 것이다. 여기서 본향 그러므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원형으로 이해해야 하고, 대개 현대인이 이런 원형의 상실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의 그림이 이처럼 상실된 원형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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